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54)
저강렵의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 황지호와 이야기하려 등교했을 때, 주수혁과 마주쳤다.
기숙사생과 통학생은 산책로에서 맞닥뜨릴 일이 없는데.
“왜 그쪽에서 와?”
“가볍게 몸 좀 풀려고 일찍 왔어. 오늘은 실기 시험도 있어서.”
모범생 주수혁이 시험 기간을 맞아 일찍 등교해 24시간 개방 중인 시뮬레이터 룸과 샤워 시설을 이용하고 왔나 보다.
기말고사를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때.
주수혁이 시야를 고정하고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췄다.
‘근처에 안다인이 있나?’
예상대로 저 멀리 앞서 걷는 안다인이 보였다.
서둘러서 나왔는지 완전히 마르지 않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주수혁은 그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렇게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안다인은 가 버릴지도 모르는데.
마음이 갑갑해져 훈수를 뒀다.
“말 안 걸고 뭐 해.”
“어? 그러니까…… 누구한테?”
이 완벽한 주인공에게 시치미를 떼는 능력은 없었다.
말을 더듬는 주수혁을 대신해 말을 걸어 줘야겠다는 생각에 안다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야.”
“응? 의신아, 안녕.”
안다인의 주의를 이쪽으로 끌고, 두 사람이 인사하도록 유도한 후 빠지려고 했었지만.
“의신아, 전에 유리 SNS에 올라온 그 솜뭉치 같은 애…… 올무 사진 잘 봤어.”
김유리에게 올무 사진의 출처를 들었는지 안다인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가끔 사진 보내 줄 수 있어? 유리 말로는 의신이랑 올무가 아주 친하다고 들었는데.”
게임 속 솜뭉치의 주인, 애견가 안다인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쁜 마음이 들었다.
타이틀 히로인이 올무의 귀여움과 옳음을 알아주고 하는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 했다.
“그래. 예전에 찍은 사진도 있는데 그것도 보내 줄까?”
“응! 가리지 말고 전부 보내 줘!”
안다인과 마주 웃으며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하고, 올무 사진을 모아 둔 전용 폴더를 통째로 공유하고 있을 때.
주수혁이 세상이 무너지는 걸 본 듯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티는 잘 안 나지만 고이고 썩은 물인 나의 눈썰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주수혁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졌어! 안다인이 남고생과 연락처를 교환하는 장면에 충격을 받은 거구나.’
추한 도원우나 송대석처럼 나를 경계하는 게 아니라, 그냥 혼자서 무한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주수혁.
역시 타이틀 히어로의 성품과 순애보는 남달랐다.
안다인과 내가 올무 사진을 보며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수혁의 얼굴에 점점 혈색이 사라졌다.
“고마워, 의신아! 앞으로도 자주, 많이 사진 보내 줘! ……응?”
올무의 사진에 정신에 팔려있던 안다인이 주수혁의 얼굴에 핏기가 없는 걸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혁아, 어디 몸이 안 좋아? 양호실 갈까?”
“아, 그게…… 괜찮아.”
안다인이 말을 걸자 주수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주수혁의 말대로 괜찮아진 걸 확인한 후.
“교실에 먼저 들어간다. 천천히 와.”
“응, 어? 어…….”
두 사람이 대화하기 시작하는 걸 확인하고 교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시험이 끝나면 저번처럼 서로 책을 추천해 주자는 요지의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시험 끝나고 놀러 가자는 약속은 안 하나.’
주수혁은 나와 맹효돈에게 놀러 가자고 자주 권하면서 왜 그걸 안다인한테는 못 하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이 데이트하도록 유도할 방책을 생각하다 보니 금방 1학년 건물에 도착했다.
아직 한산한 1학년 0반 교실.
황지호가 심드렁한 얼굴로 책상 위에 걸터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호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저강렵이 돌아올 때까지 정탐하다 돌아오겠다고 한 적호.
막상 저강렵이 오니 좀 더 조사하다 오겠다고 버티고 있나 보다.
적호는 돌아오면 또 황지호에게 한 소리 듣게 될 것 같다.
“저강렵의 손상은 심각하다더군. 키모폴레이아에서 네 공격을 받고 강제로 하선한 후,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것 같다는데…….”
비탄의 웅녀 얘기구나.
대체 어떻게 공격한 건지 모르겠지만, 진족의 수장을 행방불명으로 만들고 저 정도로 손상을 입히다니.
“저강렵은 자력으로 본거지에 복귀한 후, 현재 혼절해 회복 아이템을 사용하는 중이다.”
“그래서 적호가 아직 거기에 있는 거구나.”
“그래. 적호와 비슷한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이해가 빠르군.”
나와 적호는 입장이 다른데 왜 또 엮어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황지호는 불만과 짜증이 섞인 표정이었다.
“저강렵의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상보심금파가 없으니 문제없다고 우기더군. 적호는 잠입을 계속하겠다고 보고한 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잠입 중인 적호를 억지로 끌고 올 수도 없으니 황지호가 저렇게 열이 받나 보다.
황지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작게 말했다.
“……저강렵은 둘째치고 ‘그자’가 오면 어쩔 생각인지 모르겠군.”
황지호의 빡침과 걱정 속에서도 기말고사 기간은 계속 이어졌다.
* * *
기말고사 마지막 날, 시험이 끝난 후.
김유리의 집.
“얘들아, 고생 많았어!”
“효돈이는 정말 고생했지…….”
“이번에도 50점 넘기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고맙다…….”
수학 시험 가채점을 하다 온 나와 맹효돈을 제외한 모든 아이가 모여 있었다.
맹효돈이 저번에 선택과 집중을 하느라 특정 파트를 버렸던 것과 달리 이번엔 모든 시험 범위를 성실히 공부했다.
그 결과 나온 점수는 51점.
이번에도 수학을 수강한 학생 중에서는 꼴찌를 했겠지만, 찍지 않고 자력으로 낙제를 면한 맹효돈의 공부기는 인간 승리 그 자체였다.
수학의 압박을 이겨내고 담임 선생님께 점수 보고를 하는 맹효돈의 표정은 세상 밝아 보였다.
“그럼 건배할 준비 하자! 각자 다 사 왔어?”
“그래. 모자랄까 봐 3인분씩 사 왔어.”
“어, 저도 석 잔 샀는데!”
“나도.”
이번 뒤풀이 때에는 각자 음료수를 지참해 교환해 먹기로 했다.
상의 없이 랜덤하게 가져올 계획이라 누가 뭘 가져오고 어떻게 바꿔 먹을지 모르는 게 묘미였다.
“각자 뭐 가져왔는지 공개해 줘!”
그 결과는 이랬다.
나, 학교 앞 생과일주스 전문점에서 테이크아웃한 과즙 음료.
맹효돈, 유명한 탄산음료 회사에서 출시한 여름 한정판 소다맛 이온 음료.
사월세음, 수제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아이스 카푸치노.
“이 셋은 뭔가 예상한 대로야.”
“세음이 거 맛있어 보여…….”
“그럼 우리 것도 공개할게.”
김유리, 탄산수 제조기로 직접 만든 진저에일.
권레나, 김유리와 함께 만든 블루베리에이드.
민그린, 아몬드 크림 견과류 우유.
한이, 흡입하면 혀는 행복해도 혈관은 안 행복할 것 같은 엄청난 당도의 자바칩, 휘핑, 초코 파우더, 헤이즐넛과 캐러멜 시럽을 추가한 밀크 셰이크.
“한이 거 대박이다……!”
“어디에서 주문한 건지 알려 주세요!”
“다음에 같이 가자.”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는 한이의 음료 공개가 끝나고.
요주의 인물, 송대석과 황지호의 차례가 되었다.
그나마 나을 것 같은 송대석을 집어 물어봤지만.
“안 사 왔는데.”
송대석은 뻔뻔하게 답했다.
분위기가 싸해질 뻔했지만, 김유리가 곧장 수습했다.
“자, 그럼 대석이는 모든 음료를 섞은 믹스판 마시는 걸로 당첨.”
“뭐! 내가 왜!”
“큰 소리 내지 마! 대석이가 잘못했으면서.”
민그린이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니 송대석이 입을 다물었다.
상당히 개성적인 음료들이 많은데, 송대석이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자업자득이니까 할 수 없지.’
남은 건 1학년 0반 최고의 돌아이, 황지호.
“안심해라. 둘 중 하나로 고르라고 두 종류로 가져왔다. 종류별로 10인분씩 들고 왔어.”
저 말을 들으니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황지호가 꺼낸 금분이 잔뜩 발린 쇼핑백 안, 종이 상자 안에 포장된 음료를 보고 아이들이 할 말을 잃었다.
홍삼 주스와 솔잎즙.
이 노친네가 사고를 쳤다.
“이게 뭐야!”
“돌아이 새끼.”
“……붕어즙이나 버섯즙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하하하하!”
황금색 라벨이 붙은 홍삼 주스와 솔잎즙 세트는 상당히 비싸 보였고, 영양가도 높아 보였지만 최고의 기피 대상이 될 것 같다.
정색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황지호가 신나게 처웃었다.
아이들한테 몸에 좋은 거 먹일 생각에 노친네가 신나셨나 보다.
“그럼 대석이 몫인 믹스판부터 만들게.”
“잠깐, 저 돌아이가 가져온 거지 같은 홍삼이랑 솔잎도 섞을 거야? 그것도 먹어야 해?”
“응. 먹어야 해. 그럼 믹서기 가져올게!”
“야, 진짜로 할 거냐고! 잠깐!”
김유리와 권레나가 조금씩 덜어 낸 음료들이 차례차례 섞이기 시작했다.
색이 점점 이상해진 괴상한 색의 음료를 보고 송대석의 안색도 괴상하게 변했다.
“자, 그럼 건배!”
“건배!”
“……건배.”
“네…….”
홍삼 주스와 녹즙에 당첨된 사월세음과 믹스판을 마시게 된 송대석이 고통스러워했다.
송대석은 아무도 봐주지 않았지만, 사월세음의 경우, 가엾이 여긴 아이들이 자신의 음료를 나눠 줬다.
아이들은 호기심에 결국 모든 음료를 조금씩 나눠 먹게 되었다.
“그럼 그날이 마침 영원의 호수 팀 빌딩 보안 점검일이었던 거예요?”
“응, 팀원분들의 건강검진일이기도 했대. 하필 팀 닥터 님은 그날 목이 다치셨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른 분들이 말을 못 하게 말리시는 바람에 홀로그램 자막으로 대화해야 해서…… 좀 오래 걸렸어.”
“오래 걸렸어? 뭐가?”
“건강검진. 덤으로 나도 건강검진을 받았어. 사양해도 권제인 선배님이 봐주시질 않으시더라.”
“하하하, 선배님은 여전하시네.”
기말고사 기간 하지 못했던 밀린 잡담 중.
권레나가 영원의 호수 팀 빌딩 방문기를 얘기했다.
영원의 호수 일당은 그런 핑계로 권레나에게 걸려 있는 침묵맹세의 저주를 확인하고 해제했나 보다.
“검진받는 사이에 권제인 선배님이 신곡을 구상 중인데 들어 달라고 하셔서, 연주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곧 권제인의 신곡으로 화제가 바뀌고, 항상 이능 바이올린과 활을 소지하고 다니는 권레나가 그 신곡을 커버링해 보였다.
이전보다 훨씬 실력이 좋아진 권레나의 연주에 다들 감탄했다.
정신없이 뒤풀이도 끝날 무렵.
‘송대석은 아직 고민 중인가.’
민그린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송대석이 홀로그램을 띄워 플레이어 협회 홈페이지를 확인하는 게 보였다.
확인하는 탭은 주요 시설 소개.
그중 언론에도 공개된 위성 제어실의 내부 사진이었다.
한편, 처진 모습을 보이는 건 송대석 외에도 또 있었다.
“……당분간 또 혼자겠네.”
시험 기간이 끝나서 스터디 모임도 끝났으니 김유리는 집에 또 혼자 있게 되겠지.
김유리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목소리를 썩은 화석인 내가 놓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에게 힘을 주고 싶은데.’
방금 적호로부터 오늘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보고라도 받은 건지 황지호도 기분이 나빠 보였다.
두 사람과 덤으로 황지호의 기분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본 결과.
“자, 이걸 보여 줄게.”
나는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아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어디에서 본 것 같은 강아지인데…… 아, 올무네요!”
“어, 진짜다. 올무잖아.”
“귀엽다!”
비장의 올무 사진을 공개했다.
어젯밤 은족의 후예들이 기말고사 마지막 날도 힘내라며 보내 준, 올무가 앞발을 화면 쪽으로 내밀고 점프하는 사진이었다.
“……조의신, 네 지능이 간헐적으로 낮아진다는 걸 반 아이들에게도 알릴 생각이냐.”
황지호가 질색하며 나를 간헐적 저능아 취급을 했지만, 아이들도 좋아하고 올무가 귀여워서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귀엽긴 하네.”
봐라, 송대석도 저렇게 말할 정도다.
김유리는 기뻐하는 얼굴로 사진을 전송받고 즉시 보정해서 자신의 SNS에 올렸다.
“의신아, 다음에 또 올무랑 놀러 와!”
결과적으론 두 아이에 이어 황지호도 올무 사진을 보고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았다.
역시 올무는 항상 귀엽고 옳았다.
* * *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 날.
학교는 축제 분위기였다.
단순히 시험이 끝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빅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던 탓이었다.
“야, 부반장! 이게 뭐야!”
학교 게시판에는 신문부가 주관하는 두 개의 이벤트로 떠들썩했다.
이벤트 하나는 ‘강한 담임 임연화 VS 3학년 0반’.
맹효돈이 문제로 삼는 건 두 번째 이벤트였다.
[숨겨진 강자, 1학년의 유일한 특별 전형 합격자 맹효돈.]
그 타이틀 밑에는 맹효돈의 수상 이력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문단, 사진 두 장과 타이틀이 하나 더 떠 있었다.
[싸움 천재에 대항하는 그레이트 탁과 지옥에서 돌아온 빵셔틀 방윤섭.]
“응, 심판은 신문부에서 볼 거야. 준비 운동 잘하고 가라.”
내 말에 맹효돈은 어처구니없어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 *
돈족의 본거지.
저강렵의 방.
적연으로 몸을 감춘 적호가 가만히 저강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래로 제 뱃속을 헤집은 진족이었지만, 적호의 머릿속은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자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보다 단서를 캐는 게 더 중요하다.’
적호는 이성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호의 귀환 요구에도 응하고 있지 않았다.
‘높은 희귀도의 회복 아이템을 사용했는데 저강렵이 낫질 않는군.’
조의신이 만든 갈래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손톱자국이 남은 복부는 아물지 않았다.
저강렵의 부상은 특수한 이능으로 입은 것이라 추측되었다.
적호가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붉은 드레스…… 죽인다…….”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적호의 마음을 흔드는 단어가 나왔다.
‘붉은 드레스……?’
그녀가 이 일에 관여했을 리가 없는데.
적호의 머릿속에 붉은 옷이 아주 잘 어울렸던 옛 정인(情人)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