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성장의 실마리 (2)
선남선녀의 훈훈한 대화 장면을 배경으로 문새론이 눈을 찡긋거리며 엄지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유상훈도 문새론의 호출을 받은 듯 우리 뒤쪽에서 설렁설렁 들어오고 있었다.
“왔냐.”
“그래.”
유상훈의 인사가 날이 갈수록 건성이 되는 것 같지만 기분 탓이 아닐 거다.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를 던진 유상훈이 주수혁과 안다인을 보더니 ‘뭐임?’하고 말하며 문새론을 봤다.
“그냥 지나가는 행인1이면 모를까, 너희들이 오면 쟤들이 괜히 부끄러워하거나 말 걸어 올 거 아냐. 그래서 눈에 안 띄게 이쪽으로 불렀지.”
“잘했어, 새론아!”
김유리도 두 사람을 밀어주고 있는지 문새론과 함께 작은 목소리로 환성을 터뜨렸다.
둘은 앞으로도 서로 잘해 보자며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하기까지 했다.
“어, 그러니까 우리 반 반장하고 옆 반 반장이랑 사귀는 거임?”
“아직일걸.”
“아직? 야, 시험도 끝났는데 장남욱 불러내서 놀자.”
유상훈은 두 천재가 썸을 타든 말든 별 관심이 없는지 화제를 바꿨다.
분명 농구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가는 바람에 대화의 내용이 ‘도시후는 머리에 농구공으로 덩크가 꽂혀도 싸다’, ‘장남욱도 한 방 정도는 맞아야 하지 않나?’라는 걸로 바뀌었을 때.
“의신아.”
유상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새론에게 연락을 받은 건지, 처음부터 배려를 해 준 건지 몰라도 유상희도 후문 쪽에서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시후 얘기 들었어. 또 신세를 진 것 같네…… 남욱이랑 함근형 선생님, 홍경복 선생님께도.”
유상희는 도시후와 아는 사이였나?
유상훈은 도시후를 몰랐던 것 같은데.
“저는 한 게 없어요. 시후랑 알고 지내는 사이셨나요?”
“응. 이전에 TC 쪽에 일이 있어서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어. 원우가 그때 소개해 줬어.”
TC 쪽에 일? 모임?
게임에서 다루어진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유상훈이 그 자리에 안 간 걸 보면 그녀의 치유 능력과 관계된 걸지도 모르겠다.
‘어?’
잠깐 생각에 잠겨 유상희를 바라보니 오늘 조금 지쳐 있는 게 보였다.
눈도 조금 부어 있고 입술에도 핏기가 부족했다.
시험도 끝났는데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는 걸까.
“학생회 일 많이 바쁘신가요?”
가장 먼저 짐작 가는 이유를 말해 봤지만 유상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학생회 업무 분량은 평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데, 요새 진로 조사를 하는 중이라서.”
유상희는 3학년이니까 진로 조사를 하겠구나.
플레이어의 진로는 생각보다 다양해서 고민이 될 만했다.
거기에다 유상희는 희귀한 이능을 보유한 데다 아케아가 그녀를 아끼고 있고, 이능을 떼고 봐도 그녀는 우수했다.
‘게임 속 내용, 미래를 알고 있어도 조언해 줄 수가 없구나.’
게임 속 유상희는 진로고 뭐고 다 내던지고 유상훈의 복수에 매달렸다.
복수의 대상이 마수종 에너미 전체에 걸쳐 있어 그 복수를 완수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졸업하기 전에 죽고 마니까.
“아, 진짜.”
그때 유상훈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유상훈의 시선을 따라 나도 눈을 돌려 보니, 추한 시선을 보내는 도원우가 있었다.
가까이 와서 어깨빵을 할 때도 추했지만, 멀리 대회의실 문틈에서 이쪽을 대놓고 엿보는 것도 추했다.
“저 미친놈은 왜 저러고 있어?”
“원우가 요새 진로 얘기로 귀찮게 굴어서 당분간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당분간은 개뿔. 앞으로도 영원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해.”
“도원우 선배님이 귀찮게 구셨다고요?”
무슨 일이 있었을지 짐작이 갔지만 물어는 봤다.
“TC 쪽 연구소에서도 얘기가 들어 왔는데, 졸업 후 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되는 조건으로 학비와 장학금을 준다고 해. 그걸 원우가 계속 집요하게 추천해서…….”
유상희가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흐렸다.
단순히 추천만 받아서 저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나?
“상희 언니, 안녕하세요!”
“언제 오셨어요? 얼른 들어가요.”
그러나 더 묻기 전에 학생회의 후배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몰려왔다.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 됐는지 주수혁과 안다인도 대화를 나누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 얘들아. 들어가자.”
부드럽게 웃으며 앞서 걷는 유상희의 옆얼굴은 어딘가 그늘져 있었다.
마음에 걸렸지만, 더 물을 상황이 아니라서 나도 자리에 들어가기로 했다.
‘엄청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
몇 달 만에 오는 계단식 회의실.
각각 자신의 직책이 쓰여 있는 팻말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학생회, 선도부, 지익회, 각 학급의 임원들.
회의 준비를 하는 이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준열이 표정이 오늘 별로야, 표정은 별로지만 잘생겼네. 잘생겼으니까 저 표정도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무슨 일 있었나?”
“아, 오늘 성적 발표 했잖아. 동하한테 또 져서 그런 거 아니야?”
“어떡해…… 홀로그램에 메신저 켜 놓고 그거만 쳐다보던데, 가족들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돼서 저러는 거 아니야?”
화제의 중심은 학생회 쪽 자리에 앉아 감상적인 표정을 짓는 염준열이었다.
차석도 충분히 잘했는데.
내가 먼저 제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칭찬해 줘야 할까.
아니, 수석을 노릴 거라고 말하던 애한테 차석 했다고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면 약 올리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마진승은 어디 갔지? 그 멍청이가 준열이 속 긁기 전에 떼어 두자.”
“이미 늦음. 마진승 그 등신이 우리 준열이한테 ‘동하가 너를 이겼고, 동하는 선도부니까 선도부의 승리다. 그리고 나는 선도부다. 그러니까 내 승리다!’라고 헛소리하다가 불감옥에 갇혔어.”
“아…… 준열이 팬들이 직화구이 삼겹살 꼬치 해 먹던 곳이 거기였구나.”
2학년 구역에선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
염준열 팬한테 찍힌 것 같으니 마진승은 오늘 강제 결석하게 될 것 같다.
‘마진승 외에 다른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은데…… 0반이 문제네.’
이번에도 가장 앞줄에 배치된 0반이 눈에 들어왔다.
3학년 0반은 오늘은 우주의 기운을 찾지 않는 듯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기환과 부반장으로 추정되는 인물.
그들은 단백질 보충제 파우치에 빨대를 꽂고 무심한 눈으로 들이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아령을 들고 있었다.
‘아직도 벌크업하고 있는 건가.’
우주의 기운을 찾는 거에 비하면 건전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눈을 돌렸다.
문제는 비어 있는 2학년 0반 자리.
금찬솔과 왕찬솔은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또 천장에 붙어 있다가 등장할 생각인가?’
반사적으로 천장을 봤다.
이런 생각을 한 건 나만이 아닌지 여기저기에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보이는 건 조명뿐.
“쟤들 투명화 아이템 쓴 거 아니야?”
“탐지계 스킬 발동해 볼게. ……없는데?”
그때, 의장석에 앉아 있던 도원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무표정으로 바람 같이 움직여 뒤에 걸려 있던 교기를 걷어 냈다.
파팟!
“악!”
“아, 안 돼!”
교기 뒤, 벽에 달라붙어 있는 체육복 차림의 두 남녀가 비명을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금찬솔과 왕찬솔이 도원우를 노려봤다.
“아오! 학생회장이 또!”
“망했네! 아, 이걸 또 어떻게 찾아냈냐!”
금찬왕찬 콤비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도원우가 목소리에 이능파를 실어 무겁게 말했다.
“내려와.”
그러자 두 콤비가 툴툴거리다 뛰어내렸다.
대충 마지막에 등장하기 위해 여기에서 잠복을 1시간을 했다느니, 등장하는 순간 레이저를 발사해 화려하고 멋질 예정이었다느니 그런 내용이었다.
“이게 다 마진승 그 굼벵이가 늦게 와서 그래! 그놈 지금 어딨냐.”
“……지금 불감옥에 있다는데? 아, 우리 반 간식 창고에 냉동 닭꼬치 있지 않았음? 반 애들한테 그거 구워 먹고 있으라고 하자.”
“그러자! 제갈쌤 간식 만들어 가야지.”
둘은 그렇게 말하며 디바이스를 조작하다 자리에 앉았다.
불감옥 안에서 먹방을 구경해야 하는 마진승이 안됐긴 하지만 자업자득이니 모른 척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2/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한바탕 소란이 진정되자 도원우가 개회사를 읊고, 학생 대표 회의를 진행했다.
학급 임원 보고가 끝났을 때,
“……다음은 여름 방학에 예정된 1학년 청소년 수련회 안내입니다.”
내가 가장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현재 단체로 이용 가능한 플레이어 수용 시설이 한정되어 있어, 올해도 나뉘어서 청소년 수련회를 갈 예정입니다.”
1학년의 총원은 약 500여 명.
이 우수하지만 아직 미숙한 플레이어들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1학년 학생을 약 100명씩, 즉, 반 두 개의 단위로 묶어 청소년 수련회를 치를 예정입니다. 학생 수가 적은 1학년 0반은 1반, 2반과 함께…….”
서기 유상희의 보고를 들으며 사전에 배부된 홀로그램 자료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게임 속 사건과 대조하니 대부분의 설명이 일치했다.
‘청소년 수련회의 계획 자체는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래도 큰 차이점이 있어. 1반 담임이 최편득이 아니라 김신록으로 바뀌고, 1반에서 깽판을 칠 부정 입학자들도 없어. 그리고…….’
나는 옆에 앉은 김유리를 봤다.
봉인술식의 인장이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긴 소매의 교복을 입은 그녀는 들뜬 표정으로 홀로그램을 읽고 있었다.
“우리 반 애들 다 같이 갔으면 좋겠다! 그치? 애들 많이 바쁠까? 어…….”
김유리의 표정이 굳었다.
나와 같은 부분을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1학년 0반, 1반, 2반이 배치된 곳은 석모도 플레이어 청소년 수련원.
강화도 서쪽에 위치한 섬이었다.
‘광림 봉인술식이 사라진 지금, 바다에 가는 건 꺼려지겠지.’
게임 속에서도 김유리는 마지막까지 갈지 말지 고민했지만, 지금은 퇴장한 최편득과 부정 입학자들의 작당질로 반에서 고충이 많았던 안다인의 힘이 되어 주기 위해 가기로 했다.
지금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다.
“다음으로, 두 개의 교류전에 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고민하던 사이에 회의 주제가 바뀌었다.
두 개의 교류전?
사관학교 교류전 외에도 뭐가 있었나.
“첫 번째는 2학기에 치를 플레이어 군사관학교와의 스포츠 교류전입니다. 현재 총동아리회와 학생회에 참가 희망을 밝힌 동아리의 수는 총 열셋. 학생 수는 스물여덟입니다. 여름 방학 동안 예선을 치러 대표 팀과 선수를 선발해, 2학기의 교류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입니다.”
허공에 떠 있는 먼지를 쫓고 있던 유상훈이 저 설명을 듣는 동안에는 의욕이 넘쳤다.
홀로그램도 안 켜 두고 멍하니 있던 유상훈은 갑자기 뭔가 필기를 하기까지 했다.
스포츠 교류전 종목과 예선 일정 발표가 끝난 후.
“다음은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
그러고 보니 예전에 황지호가 최편득이 엎으려 했다던 교류전을 운운하긴 했었지.
게임 속에서는 그놈의 계획이 성공했는지 저 교류전은 언급도 안 됐었다.
“현재 일정 조정에 난항을 겪고 있어, 학교 대표로는 졸업을 앞둔 3학년이 맡기 어렵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올해 내에 교류전이 치러지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은광고 대표는 2학년을 중심으로 선발할 예정입니다.”
입시, 취업, 이계 공략으로 바쁜 3학년이 일정도 불명확한 교류전을 준비하는 건 어렵긴 했다.
“먼저 이계 공략 실적과 교내 성적, 교사진의 추천 등을 고려해 사전 선발한 학생 명단을 발표하겠습니다. 이후 참가 희망자를 받아 예선을 치를 예정입니다.”
유상희가 홀로그램을 전개하자 벽면에 학생 명단이 떴다.
대부분 2학년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1학년도 몇 명 있는 것 같았다.
“1학년 후보부터 발표하겠습니다. 1학년 1반 안다인, 1학년 2반 주수혁…… 그리고 1학년 0반 조의신.”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