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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67화 (167/925)

37. 신화의 잔해 (1)

한반도에 천신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닿던 신화의 시대.

아직 신성한 범들이 신화적 존재로 취급 받기는커녕 진족으로서 진명조차 얻지 못했던 때.

한반도는 척박하여 호족과 웅족은 힘을 합쳐 인간도, 짐승도 아닌 외적에 대항해야 했었다.

외적의 존재를 감지한 호족과 웅족, 두 우두머리는 천신께 자비를 청하였고 이윽고 말씀이 내려왔다.

[이것만을 먹고 햇빛을 100일 보지 않는 이에게 새로이 힘을 내려 주겠노라.]

말씀과 함께 하늘에서 천단수를 통해 신령한 쑥과 마늘 스무 개가 내려왔다.

그 양을 본 호족의 우두머리, 은호는 천신으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는 전사는 기껏해야 두 명 정도라는 걸 깨달았다.

웅족의 우두머리와 협의하여 각 부족에서 힘을 받을 이를 하나씩 선발하기로 했다.

그런 연유로 은호는 천신께서 내릴 힘에 적합한 전사를 불러 자신이 들었던 말씀을 전하였다.

“쑥과 마늘만 먹고 햇빛 없이 100일을 버티라고? 안 해. 그딴 짓을 하지 않아도 이 몸은 강하다.”

인내심이 없는 황호가 고개를 저었다.

“황호와 같은 생각이다.”

백호 역시 오만하게 말했다.

“천신께서 내릴 힘은 탐나. 하지만 신인의 곁에서 100일이나 떨어져 있기는 싫어. 요새 신인의 동생 때문에 자주 어울려 주시지도 않았어.”

청호는 고민 끝에 그리 답했다.

“그냥 싫다.”

적호는 별 고민 없이 그리 답했다.

넷 중 아무도 자진하여 힘을 받고자 하는 이가 없으니, 은호는 미리 마음속에 점찍어 뒀던 범에게 말했다.

“적호 님, 당신은 얼마 전 풍백 님과 우사 님의 처소에 숨어들었지요? 쥐도 새도 모르게 그들의 얼굴에 분가루를 바르신 게 적호 님이라는 걸 알아요.”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운사 님이 아끼시던 다기를 몰래 감추어 낭패를 보게 만든 것도 알고요.”

은호는 이 전사들에 비해 턱없이 약했지만, 언제나 그들을 잘 다루었다.

호족 제일의 말썽꾼인 적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100일만 참고 오세요. 제가 입을 열면 그들은 적호 님의 머리 위에 200일 동안 먹구름을 드리우고 비바람을 쏟아 내겠지요. 번거로움은 짧은 편이 좋지 않겠어요?”

적호는 불만스러웠지만 은호의 말에 납득했다.

누군가는 천신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천신의 힘을 받을 만한 이는 호족을 대표하는 네 전사 정도였다.

그러나 백호와 황호는 이미 오만함에 걸맞은 힘을 갖추고 있었고, 무수한 제자를 거느린 청호는 신인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 대신 앞으로도 그 셋한테 하는 장난질은 모르는 척해.”

“그건 생각해 보겠어요. 변덕스러운 풍백 님과 우사 님은 괜찮지만, 온유하신 운사 님께서 적호 님의 장난에 고역을 겪는 건 싫어요.”

부드럽게 할 말을 다 하는 은호와 함께 신역 깊은 곳의 동굴로 향한 적호.

신기가 넘치는 경이로운 풍경 속, 적호는 운명을 마주했다.

“웅족의 웅녀가 은호 님과 적호 님께 인사 올립니다.”

적호가 마주한 운명은 웅족 최고의 기재(奇才), 웅녀였다.

웅족의 수장이 그 빛나는 재능을 아껴 당시 상당히 흔했던 이름인 ‘웅녀’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건 앞으로는 그녀 하나뿐이라 공언했을 정도였다.

‘이 한반도에 이리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있었구나!’

적호는 고아하고 매혹적인 웅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햇빛이 전혀 닿지 않는 어두운 굴 속.

적호는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거친 말을 쓰는 사내를 마음에 담기는 어렵답니다.”

적호는 즉시 자신의 말투를 바꾸었다.

은호의 부드러운 어조를, 풍백과 우사, 운사가 사용하는 정중한 어휘와 신인의 낭랑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적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바꾸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굴 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부족민들은 곧잘 천신과 신인의 근황을 운율과 노랫가락에 담아 널리 전하곤 했었다.

[신인이 천신께 백일의 시련을 견디는 전사에게 아낌없이 힘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 청하였노라!]

신인이 웅녀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가사가 적호의 가슴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신인에게는 처가 없었고 웅녀는 제 연인이 아니었다.

적호는 초조하게 물었다.

“웅녀께서는 신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 생각 없답니다.”

어둠 속에서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던 웅녀가 적호에게 답했다.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생각이 있어요.”

웅녀가 어느 날부터인가 적호의 색인 붉은 천을 몸에 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신인의 청을 갸륵하게 여긴 천신께서 약조한 백일이 아닌 삼칠일 만에 동굴을 열어 줬을 때였다.

그 후 적호와 웅녀는 천신으로부터 힘을 하사받아 외적을 쓰러뜨리는 최전선에 섰다.

둘은 외적을 모두 쓰러뜨리면 맺어지자며 약속하였으나, 이후 웅족이 감히 천신에 반하는 외적의 편을 들어 이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긴 전쟁이 끝나 외적을 모두 쓰러뜨리고 웅족을 제압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 호족.

그 호족을 치하하기 위해 열린 하늘에서 천신이 내려왔었다.

천신이 신성한 범들에게 소원을 묻자 그들이 답하길.

“어디에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신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백호, 황호, 청호의 뒤로 적호는 죽 생각해 온 것을 말했다.

“웅족이 용서받는 것입니다.”

천신은 세 범의 소원은 바로 들어줬으나 적호의 소원을 두고는 오래 고민하였다.

“저도 적호와 같은 것을 바라나이다.”

그때, 은호가 나서서 고개를 숙이고 신인도 은호와 적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긴 고민 끝에 천신은 그 소원을 받아들여 열린 하늘 아래에 있는 호족과 웅족들에게 고하였다.

[그대들의 행보는 이 땅의 신화로 남으리라. 그 몸과 혼은 인간과 짐승의 섭리를 벗어나 ‘진족’이라는 존재로 새로 태어날 것이다. 그대들이 얻을 진명에 기꺼이 내 힘을 불어넣어 주겠노라.]

천신이 사라지고 진족이 되어 다시 만난 웅녀는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천신은 진족이 된 이는 아이를 갖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둘의 사랑의 결정체까지 탄생하였다.

그러나 어렵게 잡은 행복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적호에게는 지킬 것조차 몇 남지 않았다.

그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위협에 처해 있었다.

“저강렵, 듣고 있나.”

“물론입죠!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요!”

돈족의 근거지, 저강렵의 침실.

적연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적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기를 간절히 발했으나, 그 기대를 꺾고 화면 너머의 누군가가 말을 반복했다.

“은광고에 있는 김신록을 죽여야 한다. 반드시다.”

“그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만…… 현재 은광고에 심어 둔 이가 얼마 없어 그 교사를 죽이더라도 대체할 인력이 없습니다요.”

“그것과 상관없이 죽여 둘 필요가 있다. 어차피 적호와 웅녀의 아들을 타락시키기 어려울 테니까.”

적호는 저강렵이 바라보는 화면을 벌건 눈으로 응시했다.

기계음으로 변조된 음성이 들려오는 흐릿한 화면 너머로 보이는 건 긴 손가락뿐이었다.

제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아이에게 쏟아지는 악의를 눈앞에서 보며 적호는 무력감에 떨었다.

*    *    *

‘그자’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저강렵도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했다.

그들이 노리는 건 김신록.

이유는 알 수 없다.

단순히 1학년 1반 담임이자 지익회 고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노리는 게 아니란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왜 흑막이 노리는 걸까.’

흑막은 특정 인물들을 집요하게 노렸었다.

제 의도를 감추려는 것처럼 다른 이의 손을 빌리고 그럴싸한 이유를 붙이곤 했지만, 게임을 전부 플레이한 플레이어의 눈에는 보이는 게 있었다.

왜 굳이 저놈이 이 캐릭터를 집요하게 타락시키거나 죽이려 하는 걸까?

그 캐릭터를 그리 만들면 이득이 있긴 하지만, 흑막의 궁극적인 목표를 생각하면 사소한 이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캐릭터가 사월세음이야.’

주수혁에 의해 구출된 사월세음.

그의 광림은 특별한 조건이 있어야 발동되는데, 그 조건을 충족시킨 게 주수혁이었다.

그리고 사월세음이 광림을 사용하는 장면이 언론에 노출되기 무섭게 흑막이 나비령을 움직여 사월세음을 죽였다.

사월세음을 죽여 은광고의 전력을 깎고 주수혁 일행의 발목을 잡긴 했지만, 굳이 나비령이 직접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비령은 힌트를 던져 주는 것처럼 말했다.

[그 전령 꼬마가 너무 착하게 구는 바람에 일이 그렇게 됐어. 몇 년 괴롭히면 그 애가 망가지거나 타락할 거라고 생각하신 분이 계셨는데, 변하질 않았으니까.]

그 말은 마치 타락했다면 살려뒀을 것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타락시킬 수 없다면 죽여야 한다’는 그 말. 김신록도 그 대상 중 하나였구나.’

적호의 보고를 듣던 황지호는 적호에게 말했다.

“적호, 너는 앞으로 돈족의 근거지에 갈 것을 금한다.”

“하, 하지만……!”

“화면 너머의 ‘그자’는 내가 강화한 상태인 적연을 꿰뚫어 본다. 마음이 흐트러진 네가 당해 낼 수 없어. 화면 너머로만 본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반박하려는 적호를 제지하듯 손을 들어 올리며 황지호가 말했다.

“이 말을 어기면 네 후예가 대신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신 다른 선택권을 주지. 저택에 대기하거나, 후예를 옆에서 경호하거나. 골라라.”

그런 선택지를 주면 당연히 김신록을 경호하겠다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적호는 눈을 잠시 감고 생각에 잠겨 고민했다.

“그 아이는 학교 행사가 아닌 한 신역 밖으로 나가지 않죠.”

“그래. 일이 바빠서 나가지 못하니까.”

“그렇다면 저택에 대기하겠습니다. ……그 아이는 제가 가까이에 있으면 불편해하니까요.”

예상 외의 답변이 나왔다.

내 생각보다 두 부자 관계는 더 꼬여 있나 보다.

“대신 신역 밖에 나가게 되면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생각해 보고.”

적호는 눈을 부릅뜨다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황지호한테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저 모습을 보니 김신록이 은광구 밖으로 나가면 무조건 동행하겠구나.’

적호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자 황지호가 내 쪽을 봤다.

“조의신, 너는 ‘그자’가 청소년 수련회를 노릴 거라 먼저 예측하고 있었지. 김신록이 노려질 거라곤 생각했었나?”

그건 알지 못했다.

김신록은 게임 기준으로 지금 시점에선 이미 죽은 지 반년이 넘게 지났으니까.

“아니.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지금은 많이 달라.”

“……‘알고 있던 것’.”

황지호가 내 말을 한 번 따라 했다.

그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바뀐 상황과 새로 알게 된 것에 맞춰서 생각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이야기할 게 많겠군.”

내 표정을 보던 황지호가 그렇게 말했다.

결국 그날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황지호, 백호군, 적호와 이야기했다.

날이 밝았을 땐 응접실 테이블에 띄운 수십 개의 홀로그램엔 지도와 개요가 가득했다.

“의신 오빠랑 아침 먹으니까 좋아요!”

“자고 가시는 줄 알았으면 방으로 찾아갔을 텐데…….”

여기서 머물긴 했지만 잠은 안 잤는데.

애매하게 웃으며 아침으로 나온 꽃상추쌈과 곱게 간 쌀가루와 녹두로 만든 녹두 쇠고기죽을 전부 비웠다.

“그럼 난 기숙사 들러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갈게.”

“예비 교복은 여러 벌 있는데.”

“사이즈가 안 맞잖아.”

“너한테 맞는 교복도 있어.”

황지호는 나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 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맞춰서 모든 사이즈의 교복을 소지한 건가.

“됐어. 책가방 가지러 가야 해.”

그렇게 현관을 나서려 했지만 마음이 허전했다.

호족들과 상의를 마치고 거실에 놓인 은신처에 숨어 있던 올무에게 빌고 달래 봤지만, 끝내 올무는 마음을 풀지 않았다.

녹족의 영약이 그렇게 싫은 건가.

생각해 보니 싫을 만했다.

나도 전에 그 지옥의 늪을 삼키는 동안 황지호 그 망할 놈에 대한 원망이 절로 솟았었다.

결국 올무와의 산책은커녕 배웅도 없이 황명호 대저택을 나섰다.

‘원래 이 길은 올무와 걸었는데……!’

고통스러운 마음을 안고 기숙사에 들러서 교복으로 갈아입었을 때.

딩동.

메신저 알림음과 함께 내 제자 염준열이 보낸 아침 안부 인사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인사의 시작이 평소와 많이 달랐다.

[염준열] 안녕하세요, 스승님.

[염준열] 죄송합니다.

[염준열] (링크)

염준열은 링크를 하나 첨부했다.

첨부한 링크는 두 개.

하나는 어제 천동하와 한 대국의 결과와 기보.

남은 하나는 성적 정정이 된 기말고사 최종 석차였다.

학년 별로 1등부터 10등까지의 공개된 순위.

그중에서 염준열은 2학년 차석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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