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68화 (168/925)

37. 신화의 잔해 (2)

기말고사 최종 석차가 발표되는 건 0시였다.

염준열은 바로 등수를 확인하기 위해 긴장한 얼굴로 방 한가운데에 정좌해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안 자면 내일 일정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얼마 전에 찍은 교복 광고 촬영이 길어져 새벽에 귀가했던 날을 제외하면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깨어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지?’

홀로그램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시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염준열은 항상 모든 시험에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수석을 노린 건 처음이었다.

‘스승님은 학교 관계자일 거야. 학생인지 교직원인지 알 수 없지만 늘 만나는 곳은 학교에 있는 폐쇄 구역이고, 체스 기보도 바로 확인하고 계시는 것 같으니까.’

하늘 같은 스승님이 학교 관계자라면 염준열이 인정받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좋은 성적을 받는 것.

학생의 가치는 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건 염준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학생을 평가하는 가장 보편적인 기준은 성적이었다.

‘못난 모습밖에 보여 드리지 못했어. 꼭 수석을 차지하고 싶어.’

스승님이 관심을 보인 체스 대회에서도 후배인 조의신에게 졌다.

이를 만회해 보겠다고 작년 체스 챔피언인 천동하에게 도전해 봤지만, 또 지고 말았다.

자신보다 훨씬 우수한 용족과 붉은 사자의 고위 플레이어 사이에서 자란 염준열은 지는 것에 익숙했다.

그러나 또래, 그것도 인간에게 지는 건 익숙하지 못했다.

삐이이!

그때, 염준열이 0시에 맞춘 알람이 울렸다.

켜 놓고 있던 페이지를 새로 고침을 한 번 하자, 홀로그램 화면이 하얗게 물들었다가 텍스트가 떠올랐다.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최종 석차 발표]

[1등: 2-1 천동하]

[2등: 2-1 염준열]

[공동 3등: 2-0 금찬솔, 2-0 왕찬솔]

…….

…….

…….

석차를 확인한 염준열은 시야가 검게 물드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수석이 아니야!’

최선을 다하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는데도 졌다.

체스도, 기말고사도.

무력감과 허탈함이 염준열을 엄습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지.’

체스 대회 우승을 노리겠다, 기말고사 수석을 노리겠다는 둥 자신은 늘 말뿐이었다.

‘이능 삼키기’도 다음엔 꼭 성공해 보겠다고 수업마다 말했지만, 얼마 전에 손바닥만 한 화염을 간신히 삼켰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세우는 것 없이 묵묵하게 악행을 막고 사람을 구하는 제 스승과 자신이 비교되어 낯이 뜨거워졌다.

‘나는 못난 제자구나…….’

염준열은 홀로그램을 보며 스승님께 뭐라고 고해야 할지 밤새 고민했다.

결국 ‘죄송합니다.’ 한 문장만을 입력하고 염준열은 등교할 채비를 했다.

답변은 곧장 도착했다.

[스승님] 죄송해하지 않아도 돼.

[스승님] 고생했다.

부족한 제자를 아껴 주는 마음이 넓은 스승님은 염준열이 예상한 답변을 해 줬다.

스승이 이렇게 괜찮다고 말해 줄 거라는 걸 알고 저런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염준열을 더 자책하게 만들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청룡과 염방열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고 있어 의아하게 여겼지만, 두 사람의 대화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    *    *

방과 후, 총동아리회관 신문부실.

오늘은 신문부 부장이 직접 여름 방학 일정을 프레젠테이션을 하겠다며 부원을 모두 소집했다.

신입생 전용 부실보다 넓은 공용 회의실에 앉아 부장을 기다리는 동안, 화면을 작게 켜 놓고 디바이스 메신저를 확인해 봤다.

‘염준열이 답변을 안 하네.’

‘죄송합니다.’라는 메시지 이후 염준열의 추가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낸 염준열이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을 거다.

‘속상한 티도 못 내고 있겠지.’

그가 겉으로 ‘차석이라 아쉽다’, ‘준우승에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절대다수의 열등감을 부추기게 된다는 걸 염준열도 알고 있을 거다.

용족이나 붉은 사자 소속원들에게 그런 티를 내면 그들이 자신보다 더 힘들어 할까 봐 입을 다물 거고.

‘위로해 주고 싶은데.’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이 말은 부담을 줄 것 같다.

2등도 잘한 거다?

이 말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잘했는데 왜 속상해하는 거야?’라고 책망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 체스 올림피아드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대표가 아닌 예비군으로 뽑혀서 돌아왔을 때, 다른 사람이 보였던 반응과 내 기분을 떠올려 보니 확실해졌다.

고민 끝에 메시지를 보냈다.

[나] 다음 수업은 언제 할까?

이 메시지는 곧바로 기독 처리되어 답변이 왔다.

[염준열] ……스승님!

[염준열] 전 언제든 괜찮아요!

[염준열] (스탬프)

초롱초롱한 눈을 한 홍룡 스탬프가 붙어 왔다.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다.

그리고 다음 메시지를 탭했을 때, 이상한 문구가 보였다.

[은서호] 백호 님께 혼났어요…….

이건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은호의 후예 삼 남매들 같이 착한 아이들이 잘못을 할 리도 없고, 어지간한 일로 백호군이 화낼 리도 없는데.

[은이호] 오랜만에 적호 님이 계셨는데 기운이 없어서요. 산령이 가르쳐 준 장난으로 기운 내게 할 생각이었는데 실패했어요.

이어진 설명을 보니 혼날 만했다.

가뜩이나 김신록이 표적이 된 일로 예민해진 적호에게 은호의 후예들이 황지호도 낚았던 시체놀이를 시도한 것이다.

백호군이 저택 지하에서 고서를 읽던 사이.

혼자 남은 적호를 상대로 아이들이 일을 쳤고, 적호는 가짜 피투성이가 된 아이들을 보고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그 결과 후예들은 지금 몹시 당황한 적호와 함께 거실에 꼼짝도 못 하고 앉아 있고, 산령은 백호군의 손에 의해 저택 내 수련실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번에는 산령이 주도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뭐, 훈련해서 강해지면 좋지. 그런데 황지호는 아직 모르나?’

황지호는 분신을 바쁘게 굴리는지 집중력이 다소 떨어진 모습이었다.

내가 옆에 앉은 황지호를 쳐다보니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곤 내 홀로그램을 들여다봤다.

곧 후예들과의 대화 내용을 보고 얼굴을 딱딱히 굳히다 이를 갈았다.

“산령…….”

이번 일은 후예 잘못이 컸는데 황지호도 산령만 족칠 생각인 것 같았다.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답답했는지 삼 남매들이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

[은재호] (사진)

은호의 삼 남매 중 가장 열심히 사진을 찍어 올리는 막내 은재호.

사진 찍는 솜씨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는데 오늘 올무 사진은 초점이 엉망이었다.

초점이 흩어져 있는 흐린 화면으로도 올무의 귀여움이 적나라하게 전해져 왔지만, 의외였다.

[은재호] 사진 잘 찍고 싶은데. 미안해요.

[은서호] 평소에 의신이 형한테 보낼 사진 찍는다고 하면 포즈를 취해 주는 데 이상하네요……. 계속 도망 다녀요.

[은이호] 오늘 아침에 의신이 오빠 배웅도 안 나왔는데 어디 아픈 걸까요?

이 착한 후예들은 내가 올무한테 잘못을 했다는 가능성을 아예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은재호] (사진)

이번엔 초점이 맞는 사진이 도착했다.

올무가 자는 사진이었다.

[은재호] 자는 사진은 완벽해요.

막내 은재호 말대로 자는 올무의 사진은 초점이 잘 맞아 완벽했고, 피사체인 올무도 완벽했다.

“그 멍청한 얼굴을 좀 자제해라.”

사진을 저장 중인 나를 보던 황지호가 핀잔을 줬다.

핀잔에 이어진 건 어딘가 쓸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나한테 도착한 메시지는 없군.”

저놈은 매일 저택에서 후예들을 보는 주제에 뭔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자, 주목!”

부장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부장은 앞뒤 다 생략하고 본론부터 들어갔다.

곧 뒤에서 대기하던 부부장이 벽면에 타이틀 하나를 투사시켰다.

[여름 방학 해외 취재 계획]

세계 지도를 배경으로 뜬 글씨를 본 부원들이 환호했다.

“작년엔 이런 거 없었잖아! 부장 힘 좀 썼네!”

“나 해외 처음 가 봐! 플레이어등록증은 여권 대신 쓸 수 있지?”

“우리 러시아도 가? 러시아에 UR급 이계 자주 뜨니까 시기 맞추면 보러 갈 수 있지 않나?”

“나 미국이랑 중국 플레이어 양성소 구경 가고 싶은데!”

“중국은 요새 입국 심사 빡세지 않음?”

“이거 부 활동 맞지? 그럼 인솔 교사로 제갈쌤 가는 거지?”

들뜬 목소리로 떠는 부원들 사이에서 부장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 얘기가 나왔잖아. 상대의 전력 분석 겸, 신문부 내의 단합을 높일 겸 해외로 다 같이 나갈 거야! 다들 일정 조정해!”

다음 화면은 대략적인 일정표였다.

2학년 0반 놈들에게서 따낸 에어 호텔 ‘이카로스’ 숙박권을 이용해 하루 묵은 후, 아침 일찍 함께 공항으로 이동해 시작하는 해외 취재 일정.

보면 볼수록 관광에 가깝게 보였지만, 어쨌든 취재 일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코 제갈재걸 선생님 모시고 해외 여행 가고 싶어서 계획한 게 아니야. 제갈쌤이랑 여행 가기 싫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번 기획을 주도한 3학년들은 졸업 전에 제갈재걸 선생님과 해외 여행을 가 보고 싶었나 보다.

사심이 듬뿍 묻어나는 기획서를 디바이스에 저장하며 부 활동을 마무리했다.

부 활동은 끝났지만 아직 나는 일정이 남아 있었다.

‘요새는 바로 기숙사 방에 가는 날이 드무네.’

오늘도 체스 대국이 예정되어 있었다.

상대의 요청에 따라 스테일메이트의 부실이나 지익회관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할 계획이었다.

[나] 부 활동 끝났어요.

답변은 바로 도착했다.

[천동하] 먼저 자리 잡고 있을게.

천동하와 만나기로 한 곳은 은광구 의 사설 스터디 카페.

천동하가 예약한 4인용 스터디 룸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여기까지 불러내서 미안해. 어제 준열이랑 대국할 때 사람이 많이 몰려서 오늘은 조용히 두고 싶었어.”

“괜찮아요.”

천동하가 직접 가져온 나무 체스판이 펼쳐진 테이블 위.

스터디 룸에 캡슐 커피 머신이 놓여 있는데 천동하는 믹스 커피를 마신 듯 종이컵 옆에 믹스 커피 포장지가 있었다.

테이블을 정리하는 걸 도운 후,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수석 축하드려요.”

“고마워.”

염준열의 이의 제기로 격차가 점점 좁혀지다 간발의 차이로 수석 자리를 차지한 천동하.

염준열이 올린 점수만 따지면 충분히 역전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천동하도 성적 정정 대상에 포함되어 점수가 올라간 과목이 몇 있었다고 한다.

“천동하 선배님이 대국을 청해 오실 줄은 몰랐어요.”

천동하는 은광고에서 양심과 상식을 담당하는 캐릭터였다.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국을 청해 온 건 조금 의외였다.

“내 동생이 무명의 초신성 팬이라서 신경 쓰였어.”

동생?

천동하에게 동생이 있었나?

게임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는데.

나한테 팬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에게 동생이 있다는 건 더 놀랄 일이었다.

“팬이요?”

“그래. 네 기사를 보여 주면 반응이 좋아.”

뭔가 이상한 말이었지만, 천동하는 그 이상으로 동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 후, 우리는 조용한 스터디 룸에서 대국을 했다.

첫판은 나의 승리.

두 번째는 천동하의 승리.

사이좋게 1승씩 나눈 우리는 스터디 카페에서 제공하는 통밀 달걀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고 복기하다 헤어졌다.

*    *    *

주말, 유상훈과 함께 장남욱을 뜯어먹기로 한 날이 왔다.

평소에는 유상훈이 냈지만, 오늘은 특별히 장남욱에게 비싼 밥을 사게 해 혼쭐을 내기로 했다.

“그런데 저놈은 왜 온 건데.”

약속 장소에 나타난 도시후를 본 유상훈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남욱이가 너희랑 놀 예정이라고 들어서 왔어. 나도 뭐 사고 싶어서.”

“어디서 야구 티켓이 나왔나 했다.”

어젯밤에 급히 약속 장소를 잠실로 바꿔서 야구도 보자고 하더니만.

도시후가 표를 구해 줬나 보다.

“미안해, 밥은 다음에 또 살게! 당분간 주오는 계속 지방 원정이라서 오늘 봐야 돼!”

뭐라 하고 싶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오 드래곤즈 응원 용품으로 도배한 장남욱을 보니 말이 안 나왔다.

도시후의 탈주 사건으로 고생한 장남욱에게 뭐라 따지기도 뭣하고 저렇게 좋아라 하고 있으니 좋게 넘어 가기로 했다.

오늘 경기는 TC 나이츠가 홈이라 주오 드래곤즈 휘장은 별로 보이지 않는 데도 장남욱은 신나게 야구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쪽 가게부터 저쪽까지 1인분씩 다 사자.”

“눈꽃 치즈 닭강정은 줄 서야 해!”

“그럼 도시후만 세워 놓고 우린 다른 가게로 가자.”

“어? 어?”

도시후를 알박기용 줄서기 토템으로 사용해 야구장 먹거리의 모든 메뉴를 섭렵한 후.

중앙석에 위치한 테이블에 자리 잡은 내 눈에 익숙한 뒤통수가 들어왔다.

‘옥토연이 또 여긴 왜!’

TC 나이츠 유니폼을 입은 옥토연이 펜스에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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