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69화 (169/925)

37. 신화의 잔해 (3)

주말 오전.

볕이 잘 드는 창문 아래.

김유리는 얼음이 다 녹아 묽어진 아이스 카페라테가 든 유리잔을 들고 혼자 앉아 있었다.

‘같이 먹을 브런치 준비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입원으로 넓은 집에 홀로 남게 된 김유리가 쓸쓸해한다는 걸 반 아이들도 눈치챘는지, 그녀의 반 아이들은 자주 놀러 왔다.

어제도 등교 중인 반 여자애들이 모두 찾아와서 묵고 갔다.

비록 권레나는 레슨을 받으러, 한이는 태호권 훈련을 위해 일찍 돌아갔지만, 아직 민그린은 늦잠을 잔다고 남아 있었다.

딩동.

메신저 알람음과 함께 그녀의 절친 안다인이 보낸 메시지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다인이≧▽≦♡] (사진)

[다인이≧▽≦♡] 귀엽지?

[다인이≧▽≦♡] 자는 중에도 혀를 살짝 내밀고 있는 거 봐. 의신이가 보내 준 올무 사진인데 귀여워……!

안다인이 보낸 사진에는 흰 솜뭉치 같은 강아지가 혀를 내밀고 잠들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진이었지만, 감상보다는 다른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다인이한테는 광림에 대해서 말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낸 안다인.

최근 그녀가 보내는 메시지의 빈도가 늘어났다.

김유리가 기말고사 전후로 불안정해졌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아 초조해졌다.

‘다인이라면 절대 피하지 않을 거야. 무섭더라도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야.’

안다인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편을 들어 주고 곁에 있어 주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안다인이 무서운 걸 참고 곁에 있어 주는 것도, 참고 곁에 있다가 무서운 일을 당하는 것도 싫었다.

김유리는 파자마의 긴 소매를 걷어 손목을 드러내고 시곗줄을 풀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목을 보니 우울해졌다.

‘……광림 같은 거 없어졌으면 좋겠다.’

김유리는 충동적으로 테이블 위에 장식용으로 놓여 있던 깃털 펜을 잡았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펜촉에 잉크를 듬뿍 찍어 손목에 광림 봉인술식 인장을 그리기 시작했다.

금장 손잡이가 불편해 제대로 그리기도 힘들었고, 잉크가 제대로 피부에 묻지 않아 몇 번이나 덧그려야 원하는 모양이 나왔다.

거기에 날카로운 펜촉 탓에 피부가 긁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데도 뭔가에 홀린 것처럼 김유리는 어설픈 광림 봉인술식 그림을 피부 위에 그리며 자신을 상처 입혔다.

“……뭐 해?”

덜컥.

깃털 펜이 잉크를 점점이 흩뿌리며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김유리가 어렸을 때 입었던 파자마를 빌려 입은 민그린이 딱딱한 얼굴로 깃털 펜과 김유리의 손목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있잖아, 그게, 그러니까…….”

여름에도 긴 소매 교복 블라우스를 입으며 평소 철저하게 가리던 손목을 드러내고 뭔가를 그리고 있던 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광림 봉인술식의 인장하고 비슷한데. 그걸 그리려고 한 거야?”

“…….”

해가 뜬 지 꽤 지나 거실은 후덥지근했다.

그 탓에 침묵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왜 그런 짓을 하려 했냐고 물으면 어쩌지?’

이미 같은 반에서 조의신과 황지호는 알고 있었다.

손목에서 인장이 완전히 사라졌던 그 밤, 둘은 광림의 정체를 바로 꿰뚫어 봤다.

또 그걸 알고도 괜찮다고 말해 줬다.

특이한 플레이어들이 모인 은광고 안에서도 수상하다, 돌아이다라는 취급을 받는 둘.

이 둘 외에 다른 이들이 받아들여 줄지는 미지수였다.

“……그려 줄까? 모양은 기억하고 있는데.”

민그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나도 AR 글래스랑 후드를 쓰고 있으면 마음이 진정돼. 그런 것처럼 유리한테는 그 그림이 필요한 거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김유리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놀란 목소리였지만, 어느 사이엔가 민그린은 평소대로 말하고 있었다.

반응하지 못하는 김유리를 보고 민그린이 등을 돌렸다.

“잉크랑 펜촉으로 그리면 금방 지워지고 손도 다쳐. 유성 펜 갖고 올게. 기다려.”

민그린은 발 사이즈에 맞지 않는 큰 슬리퍼를 끌며 게스트룸으로 사라졌다.

펜촉에 긁힌 손목이 쓰라렸지만,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은광고에 와서 다행이다…… 그때 용기를 내길 잘했어.’

김유리는 손목을 꾹 움켜쥐며 자신에게 가호를 내린 다정한 진족이 해 준 말을 떠올렸다.

막 광림을 각성했던 1월 1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부모님이 잠들었을 때, 그녀가 찾아왔다.

가호를 주겠다고 제안한 그 진족은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호를 받지 않을래요?

—무거운 광림을 받고도 용기 있게 당신의 부모님을 감싸는 모습에 감명받았어요.

—가호의 내용은 별것 아니에요. 당신에게 용기가 전부 사라지면,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요.

—당신의 의연한 용기가 사라질 때, 다시 만나러 올게요.

이름을 감춘 진족으로부터 김유리가 받은 가호의 말은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세요’.

아직 친구들이 곁에 있으니, 용기를 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최근 9연패를 달리는 만년 꼴찌팀 TC 나이츠.

10연승만큼 힘들다는 10연패.

그 어렵고 힘든 기록을 눈앞에 두고 시즌 중 감독 경질, 교체설이 도는 가운데 치러지는 TC 나이츠와 주오 드래곤즈의 주말 더비 매치 3연전.

이미 금요일 경기를 내준 TC 나이츠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팬들의 인내심과 멘탈 역시 터지기 직전이었다.

“오늘은 이기겠지, 이길 거야! 그렇지? 설마 10연패 하겠어?”

망팀의 팬인 옥토연이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10연패냐, 연패 탈출이냐가 갈리는 경기를 앞둔 탓인지 그녀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말이 씨가 되는데.’

플마고에서 새 스토리가 공개될 때마다 ‘설마 또 죽이겠어?’, ‘여기서 더 불행해질 리가.’, ‘그렇게까지 하겠어?’라고 낙천적인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생각과 말이 씨가 된 것처럼 온갖 불행한 일이 줄줄 터졌었다.

“어, 그때 잠실 야구장에 있었던 진족이네. 또 오신 걸 보니 야구를 좋아하나 보다.”

“누구임?”

“달토끼떡 대표이사님이셔.”

“아, 그 토끼가 판다는 떡. 급식으로 나온 적 있는데.”

“뭐! 은광고는 학생들 복지에 돈을 아끼지 않는구나. 사관학교에서도 가끔 특식으로 비싼 메뉴가 나올 때는 있는데 달토끼떡 정도 되는 건 나온 적이 없어.”

장남욱이 뭐라 길게 말하는 사이, 토끼랑 떡이라는 단어를 들은 도시후의 눈이 번뜩였다.

“토끼는 빠르고…… 떡…….”

유상훈은 뒤에 나올 말을 예상한 듯 도시후의 말을 끊으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떡은 헐레벌떡!”

잠깐 모두 입을 다물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자리에 앉자.”

“그래.”

“시후야, 베이컨 치즈 핫도그부터 꺼내 줘. 마실 거는 얼음 들어 있는 음료부터 꺼내고.”

“어…….”

무시당한 도시후가 시무룩한 얼굴로 테이블 세팅을 했다.

오늘 도시후는 물주, 짐꾼, 심부름꾼 역을 자청해 아낌없이 부려 먹기로 했다.

닭강정, 닭꼬치, 소시지, 치킨, 핫도그, 탄산음료 등등을 늘어놓다 보니 4인용 테이블로도 부족해 개봉하지 않은 음식도 많았다.

그리고 시작된 경기는 개판이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TC의 야구인가.’

쓰레기 같은 야구가 아니라 야구 같은 쓰레기를 하기로 이름난 TC 나이츠다웠다.

폭투, 불쇼, 병살, 3이닝 연속 병살, 본헤드 플레이…….

주오 드래곤즈의 팬인 장남욱도 ‘우리 팀이 점수를 내긴 했지만, 저건 좀 아닌 것 같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스코어만 보면 야구 경기인지, 핸드볼 경기인지 분간이 안 갈 경지에 이르렀을 때.

딩동.

황지호로부터 디바이스 메시지가 도착했다.

[황지호] 왜 또 달토끼와 야구장에 있지? 또 이계의 틈이 나타나는 건가?

이놈은 어떻게 안 건가.

그 의문은 다음 메시지에서 풀렸다.

[옥토윤] 안녕하세요, 은인님.

[옥토윤] 기사로 야구장에 계신 걸 확인했습니다. 토연이도 거기에 있죠?

[옥토윤] (링크)

옥토윤이 보내 준 링크에는 야구장 응원석을 찍은 사진 기사가 들어가 있었다.

왁왁 소리를 지르는 중인 옥토연의 사진도 있었고, 나란히 앉아 끊임없이 먹는 우리 넷 사진도 있었다.

저번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사건에 활약한 고등학생 플레이어가 찾아와서 사진으로 찍어 둔 모양이었다.

[옥토윤] 경기가 끝나면 말을 걸어서 붙잡아 두시겠습니까? 현장에서 잡고 싶어서요.

옥토윤의 고통이 느껴져서 흔쾌히 승낙했다.

[나] 네. 그런데 일행이 있어서 길게는 못 잡을 것 같은데요.

[옥토윤] 경기 종료 후 5분 이내로 가겠습니다. 은인님을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바로 잠실로 날아올 준비를 하는지 옥토윤의 메시지가 뚝 끊겼다.

한편, 10점 차가 넘게 벌어진 경기를 보는 옥토연은 거의 절규하고 있었다.

옥토연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첫 번째는 부정.

“설마 이대로 지는 거야? 말도 안 돼! 10연패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두 번째는 분노.

“주오 놈들아, 그만 쳐라! 코인 야구장 왔어? 돈이라도 내고 쳐! ……어, 또, 또 놓쳤잖아! 악! 아아악! 야, 이 유사 야구단아! 예능을 하지 말고 야구를 하라고! 개TC 해체해!”

세 번째는 공포.

“……이러다가 8월 되기 전에 트래직 넘버 세고 있는 거 아니야?”

네 번째는 흥정.

“적어도 한 점수 차이로 졌으면 좋겠다. 10점 넘게 차이 나게 지는 건 좀 그렇잖아!”

마지막으로 수용.

“……음음, 한국 최다 연패 기록엔 18연패도 있으니까! 10연패 할 수도 있지.”

결국, 10연패를 확정을 짓는 졸전이 끝나고 옥토연은 정신력이 완전히 박살 난 상태로 허망하게 웃었다.

돌아갈 준비를 하는 듯 털래털래 걷는 그녀가 좀 불쌍해 보였겠지만, 더 불쌍한 옥토윤을 위해 붙잡아 두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뭐야, 난 지금 인사할 기분이 아닌데? ……어?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잠실 야구장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일부러 찾아가 인사를 하는 걸 이상하게 여길 법도 할 텐데, 일단 나이 많은 어른에게 인사를 하는 게 동방예의지국의 고등학생다웠다.

“내가 야구 보러 가자고 했을 땐 안 왔으면서! 다음부터는 같이 직관하러…… 응?”

바쁘게 움직이던 옥토연의 붉은 눈이 도시후를 보더니,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춰 섰다.

몇 초 전까지는 망팀 팬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옥토연이 잠깐이나마 토족의 수장다운 눈을 한 것 같았다.

*    *    *

나비령은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조명이라곤 복도의 벽에 전시된 액자를 밝히는 자그마한 등 몇 개뿐.

나비령은 ‘그분’을 뵙고 온 날마다 이 공간을 찾곤 했었다.

그녀답지 않게 고양된 마음은 이 수많은 액자를 들여다보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생각대로 되지 않네…….’

그녀는 액자 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날개를 활짝 펼친 채로 재단용 핀에 꽂힌 나비들이 액자 속에 갇혀 힘없이 퍼덕거리고 있었다.

나비령은 목련 그림을 배경으로 고정된 나비 앞에 멈춰 섰다.

‘목련 아가씨가 이쯤 되면 무너질 때가 됐는데……. 왜 나를 부르지 않았던 걸까. 봉인술식이 사라지는 날, 나를 부를 것 같았는데.’

어린 나이에 신과 강제로 인연이 맺어지고도 의연하게 굴었던 목련의 화신.

서구초 사건부터 그 핏줄을 주시하고 있었던 나비령은 그 강대한 힘이 훌륭한 장기 말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목련의 화신은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었고, 그 힘의 정체를 아는 가족들은 무력하며 겁에 질려 있었다.

‘도중까지는 완벽했는데.’

달콤하고 그럴듯한 말로 잘 구슬려 가호를 주고받는 데에 성공했다.

마침 목련의 화신 때문에 부친이 병이 걸려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나비령의 계산대로였지만, 그 계산은 어디서부터인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여름이 시작될 때쯤 호족의 수장이 그 집에 들락날락하고, 그 아이는 나를 부르지 않았어.’

인장이 없어질 때면 자연스럽게 10대 인간 아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전부 사라져 버리고 자신을 의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가호가 이어져 있으니까. 아직 이용할 방법은 있겠지.’

나비령은 작은 액자를 벽에서 떼어 내 품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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