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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70화 (170/925)

37. 신화의 잔해 (4)

옥토연은 붉은 눈을 크게 뜨고 도시후를 위아래로 샅샅이 훑으며 물었다.

“너, 저번에도 야구장에 있었지? 음, 그때 있던 고등학생 중에 너처럼 TC 나이츠 모자 쓴 애가 하나 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없었나?”

옥토연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 망팀의 모자를 썼냐 안 썼냐인가.

도시후가 장남욱의 강권으로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옥토연 대표이사님.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도시후의 대답을 들은 옥토연의 얼굴이 더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사이에 주변에 상을 당한 사람이 있어? 상갓집에 간 적은? 간 적이 없더라도 가까운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거나 하진 않았어?”

“네? 없는데요…….”

TC 그룹의 관계자나 사관학교 소속 인물이 그런 변을 당했다면 기사로 나왔을 거다.

도시후나 장남욱도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듯, 어리둥절해하는 눈치였다.

“그래? 그런데 왜 사상(死相)이 보이지?”

“사상(死相)……? 혹시 죽을 조짐이 나타난 상 말씀하는 건가요?!”

옥토연의 말에 장남욱이 경악했다.

그에 비해 도시후는 간이 큰 건지, 실감이 안 나는 건지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월궁 소속의 달토끼 중 제석천님의 가호를 받는 회토(懷兎)의 토끼야.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봐 왔어. 사상(死相) 정도는 읽을 줄 알아.”

제석천, 회토(懷兎), 사상(死相).

제석천이 가호를 내린 회토(懷兎)의 토끼 설화는 이 세계에서도 유명했다.

먼 옛날, 굶주려서 쓰러진 노인을 구하기 위해 우애 깊은 벗들인 원숭이, 여우, 토끼가 힘을 모았다.

원숭이와 여우는 노인에게 먹일 음식을 구해 왔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한 토끼는 제 몸을 불살라 소신공양(燒身供養)하였고, 노인은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노인의 정체는 제석천.

제석천은 그 토끼를 살려 내 달에 새겨진 회토(懷兎)로 봉해, 죽지 않는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나는 다른 진족과 달리 혼이 육체를 떠나 깊은 잠에 빠질 일도 없고, 육체를 잃더라도 윤회의 굴레를 넘어서 다시 재수복해. 시간은 좀 걸리지만.”

옥토연은 우쭐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후, 선심 쓰는 것처럼 말했다.

“원래 이런 거 안 알려 주는데…… 은인의 친구…… 아니, 뭐,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고, 네가 한참 어리니까 귀띔해 준 거야. 죽기 싫으면 상갓집은 쳐다도 보지 말고, 액(厄)이 붙은 물건은 멀리하고, 가능하면 은인은 쟤하고 놀지 말…… 악!”

짜악!

옥토연의 말은 등짝을 후려치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멎었다.

얇은 티셔츠 위에 어센틱 유니폼을 겹쳐 입었는데도 저렇게 시원한 소리를 내며 등을 때리다니.

보통 고수의 솜씨가 아니었다.

급등장한 고수, 옥토윤이 비틀거리는 옥토연의 어깨를 있는 힘껏 움켜쥐는 게 보였다.

“토연아, 여기에 있었구나.”

“어, 언니! 토윤이 언니? 나 어깨 빠질 거 같은데! 아이고, 나 죽는다! 회토 살려!”

방금까지 자기는 죽음을 초월한 회토 운운하던 옥토연이 죽는다고 악을 썼다.

옥토윤은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토연이는 회토의 가호가 풀리지 않는 한 안 죽잖아.”

“그래도 아픈데! 다시 살아나도 죽긴 죽는데!”

“업무가 상당히 밀려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이만.”

“알았어. 갈게, 갈게! 그러니까 손 좀 놔주면 안 돼? 아, 근처에 수제 떡집 카페 있는데 들렀다 가면 안 돼? 언니랑 같이 냉떡 세트 먹고 싶…… 읍! 읍읍!”

옥토연의 입을 틀어막은 옥토윤이 우리를 향해 살짝 목례를 한 후, 빠르게 퇴장했다.

인파로 가득한 경기장을 순식간에 빠져나간 둘을 보며 경탄했다.

황지호가 그녀를 ‘토족의 전사’라고 몇 번 부르는 걸 봤는데, 그 말대로 놀라운 보법을 구사하는 것 같았다.

한편, 죽을상이 보인다는 도시후는 태평하게 말했다.

“뭐, 조심하면 되지! 당분간 조문은 삼갈까. 주변에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없긴 한데, 무슨 핑계 대지? 사고 하나 쳐서 반성실에 끌려가면 조문도 못 가지 않을까?”

“시후야…….”

저놈이 은광고에 왔으면 0반일 텐데.

장남욱은 도시후에 대한 걱정 반, 도시후가 칠 사고에 대한 걱정 반으로 어쨌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옥토연이 불길한 말을 던지긴 했지만, 우리는 일정대로 움직였다.

야구장에서 실컷 먹은 덕에 배가 찬 우리는 사설 실내 농구장의 코트를 하나 빌려 놀기로 했다.

나와 유상훈, 장남욱과 도시후가 각각 팀을 먹고 한 경기 한 다음, 아직 성이 차지 않은 유상훈과 도시후는 1 on 1을 한판 더 했다.

두 사람이 공에 온 신경을 쏟는 사이, 벤치에 앉은 장남욱에게 말을 걸었다.

“사관학교 교칙 중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개인 사물 반입에 관한 규칙에 대해 물었다.

장남욱은 교칙을 전부 외우기라도 하는 건지 막힘 없이 그 내용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외부에 알려진 대로 사관학교 생도의 생필품은 대부분 군에서 지급되고 있었다.

“……이상이 금지 품목이고, 허용 품목에 해당되더라도 전부 신고서를 작성하는 게 교칙이야.”

교칙 설명이 끝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작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도시후가 5월 이후에 반입한 사물을 전부 교체해. 비슷한 걸로 사서 채워 둬. 그리고 그 교체한 사물은 나한테 가져다 줘. 도시후 몰래.”

“가능은 하겠지만 시후 몰래 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시후랑 협력해서 하면 금방 할 수 있는데…….”

“안 돼.”

게임 속에서 도시후는 매우 치밀하고 신중하게 움직였었다.

그런데도 보안이 철저하다 못해 폐쇄적인 수준의 군사관학교 내부에서 살해당했다.

도시후를 죽였던 범인은 군사관학교 면회가 가능할 정도로 가까운 촌수의 친척이나, 사관학교 내부의 존재였을 것이다.

그것도 도시후가 믿고 있는 대상일 가능성이 컸다.

‘도시후가 장남욱과 친하다 해도 이놈이 장남욱보다 그 범인 쪽을 믿고 행동한다면 끝이야. 그렇게 되면 장남욱도 위험해져.’

이 도시후 놈이 장남욱의 통수를 치고 바다에 입수하겠다고 동해안으로 간 꼴을 보면 그랬다.

도시후의 인물 자체는 믿어도 그 정신머리는 믿기 어려웠다.

‘정보도 없어. 호족이라 해도 군대, 군사관학교, TC 그룹의 내부 사정을 전부 파악하는 게 어려울 거야. 지금도 해 줘야 할 일이 많기도 하고…….’

제한된 정보와 수단 속.

도시후를 둘러싼 복잡한 배경 속에서 확실하게 범인이 아니라고 믿을 수 있는 건 현재 장남욱과 도원우뿐이었다.

‘넓게 보면 TC 그룹의 차기 총수 일가도 포함할 수 있겠지만, 그들과 제대로 된 접점도 없고 사관학교 쪽에 힘을 쓰긴 어렵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 혼자 해야 해. 다른 애들이나 교관한테도 들키지 말고.”

장남욱은 옥토연의 말이 떠올랐는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대화를 듣지 못한 듯, 유상훈과 도시후는 여전히 팽팽하게 맞서며 공을 쫓으며 웃고 있었다.

*    *    *

최종 석차 발표가 끝나자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학생회에서는 각종 여름방학 행사 공지와 0반을 대상으로 한 듯한 ‘제발 사고는 적당히 쳐라.’라는 요지의 호소문을 올렸다.

1학년의 여름방학 첫 행사는 청소년 수련회.

여름방학이 시작한 바로 다음 주말이었다.

‘안배는 끝났어.’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이 세계에서 변한 상황을 토대로 계획은 전부 짰다.

변수에 대한 대비도 해 뒀다.

‘그 변수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NPC, 호족들을 믿어야 할 때였다.

“스승님!”

오늘은 방학 전 마지막으로 염준열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거나 지방 출신이지만 서울에 남아 외부 활동을 하는 학생을 위해 방학 중에도 기숙사가 운영되었고, 나는 당연히 기숙사에 잔류하는 걸 택했다.

그러니 학교에서 만나는 건 방학 중에도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염준열이었다.

“방학 전에 뵐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방학이 시작하면 학교에 오기 어려워져서요.”

스타 플레이어인 염준열은 방학 동안 방송 쪽 일도 많을 거고, 팔불출들과 여행도 가면서 놀아 줘야 하니 바쁠 거다.

“이번에는 아쉽게 차석을 하고 체스에도 졌지만, 방학 동안에 열심히 해서 2학기에는 좋은 결과를 낼게요. 스승님이 내 준 과제에서도 성과를 낼 거예요!”

바쁠 텐데도 밝게 포부를 밝히는 내 제자가 기특했다.

저번에 죄송하다고 할 때 기운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래. 방학 숙제 많이 내 줄게. 열심히 해.”

“숙제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질문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네! 감사합니다!”

방학 숙제 내 준다는 말에 저렇게 기뻐할 필요가 있나.

기운이 넘치는 염준열과 수업을 마친 후.

“오늘은 내가 배웅할게. 먼저 들어가.”

항상 내가 먼저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을 써서 빠져나갔지만, 오늘은 내가 남기로 했다.

염준열은 당황하면서도 좋아했다.

“스승님이 배웅을요? 아…… 감사합니다……!”

염준열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인사를 거듭했다.

“그럼 진짜로, 진짜 먼저 갈게요!”

염준열이 사라지고 잠시 후.

나는 이 공간에 숨어 있을 것 같은 자의 이름을 불렀다.

“용제건 선생님, 계시나요?”

그 말에 먼지 가득한 교실 구석의 공간이 일그러졌다가, 용제건이 나타났다.

염준열이 시험이 끝나고 계속 기운이 없었으니 염방열이나 청룡이 용제건에게 뒤를 밟으라고 의뢰했을 것 같아 찔러 봤는데.

정말 있었다.

“내 기척도 읽은 거야? 대단한데.”

유감스럽게도 플레이어의 궤적 중, 염준열로 광림을 사용하는 중에 용제건의 기척을 읽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이 기척은 준열이 같은데. 가면 벗어 봐.”

가면을 벗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까마귀 가면을 완전히 벗기 직전 광림을 해제하며 조의신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면을 벗기 전후 체격이 확연히 바뀐 걸 본 용제건은 실망한 눈초리였다.

“기습했어야 했나. 아쉽네.”

다음부터는 기습에도 주의해야겠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불렀어?”

“다음에는 용제건 선생님도 끼워 달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용제건이 눈을 번뜩였다.

“말해 봐.”

“청소년 수련회 일이에요.”

“그거면 문제없어. 나는 이제 부담임이니까, 부담임 자격으로 함께 갈 수 있으니까. 여행 짐도 다 싸 둔 상태였어. 이번에는 0반, 1반, 2반이 다 크루저로 이동하지? 나도 거기에 타서…….”

“타지 마세요.”

단호한 말에 용제건이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내 속을 읽어 당황하게 만들던 용제건에게 한 방 먹인 거 같아서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대신 부탁드릴 게 있어요.”

*    *    *

현재는 김신록이라는 이름을 사용 중인 호족과 웅족의 후예, 김신록.

그가 자신의 부모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대죄를 지어 개천 신화에서는 그 이름이 지워졌지만, 호족의 기록 속에 남은 아버지의 위업은 너무나도 위대했다.

백호, 황호, 청호와 함께 최전선에서 외적을 물리치던 적호의 무용담은 김신록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그 네 전사 중에 후예를 남긴 건 오로지 적호뿐.

신화가 남긴 흔적이 오로지 자신뿐이란 생각에 어찌나 설렜는지 몰랐다.

‘이제는 나뿐인 것도 아니지만.’

전장을 달리던 전사는 아니었으나 신화계 호족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은호.

적호와 함께 웅족에게 자비를 청하고, 적호의 유일한 윗사람이라는 이유로 함께 신화 속에서 기록이 지워진 옛 호족의 우두머리였다.

그 은호가 숨겨 둔 후예가 등장해 자신은 더 이상 유일한 신화의 잔해가 아니게 되었다.

‘웅족과 피가 섞인 내가 은호 님의 후예와 같은 취급을 받을 수는 없지. 나는 신화의 불순물 정도 될 거다.’

그렇게 자조한 김신록은 수장의 대저택 대문을 넘어 미로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는 인쇄한 서류가 가득한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보안 레벨이 높은 서류가 아니라서 디바이스로 보내도 될 것을, 황호는 무슨 변덕인지 그를 불러냈다.

—오늘은 들렀다 가도록. 왜? 아, 구실이 필요한가. 그래, 하기 예산 집행 서류가 있었지. 그거나 들고 와.

마치 서류가 아니라 김신록이 방문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는 말투였다.

수장인 황호의 말을 어길 수도 없었기에 김신록은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오랜만에 왔으니 저녁이라도 먹고 갈까. 후예 아이들에게 요리도 가르치고…….’

위잉—.

김신록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의외의 존재가 눈에 보였다.

적호.

기다렸다는 듯이 적호가 서서 김신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계셨구나.’

백호만큼은 아니지만,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적호가 어쩐지 김신록을 보고 안심한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신화 속 영웅인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에 들떠 몇 번이나 큰 사고를 쳤다.

그를 구하기 위해 저지른 무모한 행동의 벌은 모두 자신이 아닌 적호가 뒤집어썼다.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가 적호에게 족쇄이자 멍에라는 사실을 지울 수 없었다.

저는 자식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며 김신록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적호 님.”

인사를 받은 적호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것 보라지.

차라리 인사를 하지 않는 게 적호의 마음이 더 편했을지도 몰랐다.

“신록 오빠! 안녕하세요!”

“와, 오늘은 신록이 형도 계실 거예요? 곧 황호 님도 오신다고 했으니까 같이 놀아요!”

“요즘은 적호 님도 계속 저택에 계시고 신수도 산책을 나가지 않아서 저택이 북적거려서 좋아요.”

적호가 계속 저택에 있어?

김신록은 그 이유를 고민해 보다 바로 결론을 냈다.

‘저번에 다쳤을 때, 황호 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어. 저강렵에 대해 정보를 캐냈으니 요양시킬 생각인 거구나. 내가 없는 편이 더 마음 편히 쉬실 수 있겠지.’

적호의 휴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게 좋을 거라 판단한 김신록이 서류 봉투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저는 잠시 황호 님 심부름으로 들렀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김신록의 말에 후예들이 서운한 얼굴을 했다.

“더 있다 가시지…….”

“맞아요.”

“신록이 오빠는 왜 매일 바빠요? 황호 님이 자꾸 일 시켜서 그런 거예요?”

“맞아요!”

김신록은 후예를 몇 분 동안 달래다가 현관을 다시 나섰다.

적호는 그 뒷모습이 사라지고도 아주 오랫동안 서서 문을 지켜봤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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