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75화 (175/925)

38. 청소년 수련회 (5)

마지막 왕조의 왕이 풀어 준 전령의 피를 잇는 사월 일족.

왕조와 명운을 함께 하던 그들의 삶의 양식은 변했고, 이 땅에서 점차 신비가 사라지며 사월 일족의 힘은 퇴색되어 갔다.

그러나 이계 충돌이 발생하고, 또 사월세음이 태어나며 사월 일족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가 태어나던 날, 이름도 없는 역대 전령들의 위패를 모시는 일족의 가묘에서 신령한 빛이 흘러나왔다.

빛과 함께 가묘에 강림한 시조를 비롯한 역대 전령의 그림자들은 젊은 가주, 사월세음의 친부에게 말을 남겼다.

—이 땅에는 이제 왕이 없지만, 이 아이는 세상에 널리 옥음(玉音)을 전하기 위해 태어났다.

—‘역사에 남지 말아야 할 왕의 말’을 전하는 우리 전령(傳令)은 단순히 명령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 아이가 제힘을 옳은 일에 사용하게 하려면, 어질고 착하게 키우되 넓은 식견과 경험을 갖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기대와 우려 속에서 태어난 사월세음은 명석하며 바른 아이로 자라났다.

하지만, 사월세음은 참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바깥 세계를 동경하는 사월세음은 이름을 숨기고 외부에서 활동하는 사월세민이 본가에 돌아올 때마다 바깥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랐다.

편식도 전혀 하지 않는 사월세음이 유일하게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건 바깥 세계와 연관된 사항뿐이었다.

“고등학교는 은광고로 가고 싶어요!”

사월 일족은 시조로부터 ‘넓은 식견과 경험을 갖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는 그를 일족의 보호 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바깥을 동경하는 사월세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일족들이 그를 밖으로 보내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게 이계 충돌 이후부터 이어진 100년간의 숙고 끝에 처음으로 ‘사월’의 성을 걸고 바깥으로 한 발을 내밀었을 때.

사월세음은 환몽 경매 일당의 손에 걸려 납치당하고 말았다.

‘세상은 마냥 아름답지 않았구나.’

사월세음이 홀로그램과 LCD 액정 너머에서만 보던 결계 밖의 세계.

그 세계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가혹했다.

이능이 엄중하게 봉인된 채 철창 안에서 1월 1일을 맞이해 광림을 각성한 사월세음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능파를 운용할 수 없어 광림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 존재와 능력의 상세는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내 광림은 굉장히 위험한 힘이야……. 역대 전령 중에서도 이런 힘을 가진 분은 시조밖에 없었어.’

그가 광림을 각성하기 몇 시간 전,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온 사월세민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똑똑하게 보았다.

환몽 경매 일당은 사월세음의 탈출 의지를 꺾고 절망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그와 대면시켜 줬을 거다.

그들의 의도대로 사월세음은 삼촌이 구해 주러 올 거라는 희망을 접었지만, 그 대신 어떤 의지가 생겼다.

두려움에 질려 울면서도 사월세음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이런 못된 사람들이 내 광림을 사용하게 할 수는 없어! 절대로 들키면 안 돼. 들키더라도 아무도 이 힘을 쓰게 해선 안 돼.’

그렇게 다짐한 사월세음 앞에 어떤 괴도가 나타나 그를 구하고 환몽 게이트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가 보인 정의로운 행보와 대담하고 치밀한 행동력에 사월세음은 감사와 동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은광고 입학의 재고를 권하는 가족들에게 당당히 말했다.

“세상에는 변순회 일당이나, 환몽 경매 참가자처럼 못된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적벽괴도 님처럼 어떤 대가도 없이, 목숨을 걸고 생면부지의 저를 구하시는 분도 있어요! 이번 일로 저 말고도 예전에 납치된 희귀 이능을 소지한 플레이어 분들도 많이 구출되었어요!”

병상에서 일어난 사월세음은 쉬지 않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보자고 말씀해 주셨어. 적벽괴도님은 은광고에 계신 거야!’

몸의 회복도, 설득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등교하게 된 건 4월 1일 만우절.

길을 헤매며 도착한 은광고에는 신기하고 즐거운 일들이 가득했다.

기상천외한 만우절 이벤트부터, 등교 첫날 처음 만난 학생이 같은 반 급우 조의신이었다는 작은 우연까지.

매일 같이 산책 겸 학교 전체를 비행해도, 염준열을 직접 만난 후에도 적벽괴도의 단서를 전혀 잡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학교생활은 매우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사월세음과 그의 친구들이 미증유의 위기와 마주쳐 그 행복이 깨어지려 할 때.

“내가, 적벽괴도야.”

그의 앞에 다시 적벽괴도가 나타났다.

*    *    *

사월세음을 구했던 그 날도 이렇게 달이 밝았는데, 오늘도 달빛이 환했다.

그 덕에 염준열의 모습도, 홍룡의 모습도 훤히 보였다.

그런데도 사월세음은 눈을 의심하듯 계속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증거가 아직 부족한가?’

뭐라고 더 말해야 할지 고민할 때.

사월세음의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의신이가…… 그러니까…….”

사월세음이 꺼질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신이가, 적벽괴도 님이신가요?”

적벽괴도.

님.

그렇게 부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마음이 괴로웠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내 그런 심정이 반영된 듯 홍룡도 손을 꽈악 움켜쥐는 게 보였다.

‘그 단어’에 ‘님’을 붙이니 더 강력한 효과가 나는 것 같았다.

“……그, ‘님’은 안 쓰면 안 될까?”

“하지만…… 저를 구해 주신 적벽괴도 님을, 어떻게…… 적벽괴도 님이 앞에 계신데…… 저는 그동안 적벽괴도 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배은망덕하게 있었는데요. 어떻게 경칭도 없이 막 부르겠어요……!”

‘그 단어+님’을 계속 듣느니 비 오는 날 먼지 날 때까지 백호군의 백아로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 저승맛 녹족의 영약을 1주일 더 먹는 게 낫겠…… 아니, 그건 좀 고민해 봐야겠다.

어쨌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울면서 저 말을 연호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 의미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결국 견디지 못한 내가 플레이어의 궤적을 해제해 버렸다.

파아아……!

조의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사월세음이 거의 통곡을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섬에 닥친 위기와 연이은 광림 실패, 거기에 줄곧 찾고 있던 인물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월세음을 달랬다.

“그동안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염준열 선배님한테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는데…….”

“사, 사과하지 마세요! 적벽괴도 님이 사과하면, 저는……. 적벽괴도 님은 학교에서 보자는 말씀을 지켰는데, 저는 맨 처음 만나 놓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사월세음은 당황하면 ‘그 단어’를 더 많이 뱉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려 했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그의 등을 다독였다.

“……내 목소리, 전해 주지 않을래? 그리고 평소대로 이름으로 불러줘.”

목소리를 전해 달라는 말에 사월세음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닦아 낸 사월세음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퉁퉁 부은 눈으로 사월세음이 웃으며 말했다.

“적벽괴도 님, 아니, 그러니까 의신이가 옆에 있어 주면, 이제 무섭지 않아요. 어떤 말이든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월세음의 온몸에서 따뜻한 이능파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서늘한 밤공기 속, 전령에게 맡긴 나의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    *    *

붉은 안개가 걷히자 옥색의 공간이 온전히 나타났다.

김신록은 다시 한번 제 눈을 의심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불효만을 저질러 뵐 면목이 없는 아버지와 하나뿐인 친우의 힘의 흔적이 나타나다니.

죽기 전에 보는 환상 같은 게 아닌가 싶었다.

사박.

그런 김신록의 의심을 읽기라도 한 듯, 공간술과 비행술로 허공에 같이 떠 있던 용제건과 적호, 둘이 지면에 착지했다.

주변에 붉은 안개가 떠 있다가 사라지는 게 오랜 시간 적연을 사용해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신록아, 미안해. 곰들의 입은 먹이 앞에서 한없이 가벼워진다니까, 아슬아슬할 때까지 버텼어. 쟤들이 입을 안 열면 고문해야 하는 신록이 네가 고생할 거 아냐.”

용제건이 제 이능파의 빛깔과 같은 옥색 눈으로 김신록을 돌아보며 말했다.

평소 실눈을 뜨며 감추던 눈의 색도, 검은색으로 가리던 머리카락도 전부 온전히 옥빛을 띠고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용제건이 오랜 시간 동안 힘을 개방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설마, 적연, 공간술, 비행술. 저 둘이 세 능력을 사용해 계속 내 주변에 있었던 걸까.’

그럴 리 없다.

마치 적호가 자신을 걱정해서 용제건과 협력해 자신을 지키고 있던 것처럼 들렸다.

저 변덕스러운 용이라면 모를까, 적호가 그럴 리가.

김신록의 표정을 보던 용제건이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너를 노리는 무엄한 것들이 있다는 걸 알아낸 건 네 아버지야.”

그럴 리가 없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고 김신록과 웅족 사이를 막고 서 있는 넓은 등을 보니 그저 먹먹한 마음만 들기 시작했다.

적호의 머리카락도 붉게 물들어 있는 게, 긴 시간 힘을 개방하고 있던 것 같았다.

“여기에 있어. 이곳에선 저 등 뒤와 내 옆이 제일 안전할 거니까.”

용제건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곧 노기 어린 붉은 번개가 웅족을 향해 작렬하고, 상대도 이능파를 뿜어 대항해 빛과 빛이 격돌했다.

김신록은 그 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맹효돈의 설명을 들으며 디바이스를 이리저리 조작하던 권레나가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이네, 디바이스가 가동을 안 해!”

“……다, 담임이 지금 혼자래. 빨리 찾으러 가자. 이 상황을 전혀 모를 수도 있잖아!”

평소 여학생들과 말을 제대로 섞지 못하는 맹효돈이 매우 어색해하면서도 정보 전달을 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서툰 말을 꼼꼼하게 경청한 권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효돈이 설명 들었을 때 사람이 안 간 쪽이 어디였더라…… 거기부터…….”

“잠깐. ……북쪽에 이계가 생겼다고?”

떨면서 가만히 맹효돈의 말을 듣던 김유리가 안색을 바꾸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서쪽, 그쪽부터 가야 해!”

“반장……?”

“확인하게 해 줘. 미안해……. 아, 나 혼자서라도 갈게. 꿈에서, 꿈에서……!”

“어떻게 유리 혼자서 보내! 같이 가! 그런데 꿈에서 왜? 혹시, 그쪽부터 가라고 계시라도 왔어?”

상위 존재와 가호를 나눈 플레이어들이 신들에게 계시를 받는 건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권레나도 귀자모신의 가호를 받은 플레이어로서, 상위 존재가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접근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귀자모신에겐 돌보고 지켜봐야 할 ‘아이들’이 많아서 권레나 쪽에는 자주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아니, 그 반대야. 그쪽으로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어.”

맹효돈과 권레나, 두 사람의 의문이 더 깊어졌다.

그쪽에 가지 말라는데 어째서 가야 한다는 것인가.

두 사람이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지만, 김유리가 그 생각에 답을 하듯 몇 마디 덧붙였다.

“‘그들’은 나한테 북쪽으로 도망치라고 속삭였어. 이계가 발생한 북쪽이 더 안전하다고 하는 건 뭔가 이상해. 그러니까 남쪽에 있는 선생님, 아이들, 그리고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해!”

김유리는 결연하게 말하고, 풀고 있던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맹효돈은 저도 모르게 풍성한 머리가 순식간에 단정하게 하나로 묶이는 장면을 주시했다.

그때 맹효돈은 아주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어? 원래 저런 모양이었나?“

김유리가 머리를 묶은 목련 모양 장식이 달린 머리끈.

그 위에 손톱 정도 되는 크기의 작은 나비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장신구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뭐라 말할 수가 없지만, 저 나비가 묘하게 거슬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딴 걸 지적하고 있을 순 없어 맹효돈은 입을 다물었다.

“효돈아, 레나야. 가자!”

“……어!”

김유리를 선두로 셋은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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