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청소년 수련회 (6)
왕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월세음의 광림, ‘왕이 가라사대’는 매우 강력하고 위험한 능력이었다.
물론, 교통수단과 통신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서 목소리를 전할 매체는 전령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일반적인 방식과 ‘왕이 가라사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령(傳令), 명령을 전하는 데에 있다.
사월세음의 광림은 메시지의 본질을 곡해하지 않는 선에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대상이 그 명령을 이행할 때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목소리를 전했다.
내가 내린 명령은 ‘중앙 대피소로 향하라.’.
주민들은 중앙 대피소로 향하기 전까지 ‘왕이 가라사대’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될 것이다.
‘갑자기 모르는 고등학생이 피난 권고를 하면 따르기 어렵겠지. 직접 머릿속에 목소리를 전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그 명령을 이해하도록 유도할 거야.’
별을 보기 위해 밖에 나와 있던 주민의 눈에 갑자기 북쪽에 유성우가 쏟아지는 환상이 보인다거나.
잠들어 있는 주민은 꿈자리가 사나워져서 갑자기 깨어난다거나.
잃어버린 지갑이 중앙 대피소 쪽에 있었다고 떠오르거나.
고인의 영정이 엎어지거나 유리창이 깨지거나.
‘왕이 가라사대’는 온갖 현상을 일으켜 주민들을 중앙 대피소로 유도할 것이다.
휘이이이…….
사월세음을 중심으로 따뜻한 이능파가 퍼져 나가자 해안가 주변의 민가에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전용 메뉴의 ‘주변 지도 열기’ 기능을 사용하니 수많은 주민이 대이동을 하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렇게 쾌재를 부르면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섬 전체를 하나의 맵으로 인식해 각 개체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건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했지만, 궤적의 사용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천동하의 ‘건곤(乾坤)을 품은 눈’이나 주수혁의 ‘천리안’ 스킬을 쓰는 방법도 있긴 하다.
하지만 광림 발동 중에는 무방비 상태에 이동도 불가능해지는 사월세음을 지켜야 하니, 적과 조우하는 상황을 대비해 힘을 아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가면 피난은 무사히 끝날 거야. 피난이 끝날 때까지 사월세음을 무사히 지키면 돼. ……어?’
우리 반 아이들, 선생님들 그리고 적의 위치를 확인하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과 어긋난 움직임을 보이는 점이 몇 개 있었다.
어느 정도 불확실한 상황을 염두하고 계획을 뒀지만, 절대 늦게 움직여선 안 될 존재가 눈에 띄었다.
‘황지호가 늦어……!’
황지호가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없었다.
이대로 가면 사상자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 * *
김유리를 필두로 맹효돈과 권레나는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스프린터 스킬을 보유한 김유리와 우수한 신체 능력을 가진 맹효돈은 가볍게 달리고 있었지만, 권레나는 전력 질주를 해야 앞선 둘을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너무 빨라!’
이런 비상사태에 우는 소리를 낼 수도 없어서 권레나는 참고 달렸다.
거기에 두 사람이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텐데도 그녀를 배려해 이 정도로 달리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괜찮은 걸까.’
오늘 김유리는 피곤했는지 일찍 잠들었었다.
맹효돈이 오기 전, 권레나는 김유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베란다에서 민그린과 영상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통신이 끊겨 디바이스가 고장 났나 했을 때, 창문 너머로 막 일어난 김유리가 떨고 있는 게 보였고 곧 맹효돈이 등장했었다.
“잠깐.”
김유리가 멈춰 서서 도로 쪽을 바라봤다.
김유리를 따라 맹효돈과 권레나가 시선을 돌리자 자동차, 에어보드, 자전거 등을 이용해 주민들이 이동하는 게 보였다.
“이 밤중에 이렇게 이동하나?”
“방향을 보니까 석모도의 중앙 대피소로 가는 거 같은데.”
“아, 피난 유도는 의신이랑 세음이가 한다고 했지? 두 사람이 잘해 주고 있나 보다!”
주민들이 피난하는 모습을 확인한 후, 셋은 계속 해명산을 타고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마침내 해안선이 보이는 곳까지 당도했을 때였다.
파팟!
권레나와 김유리 주변에 이능파가 일순 터지다 사라지더니, 둘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동시에 한 방향을 바라봤다.
사정 범위에 들어가 권레나의 에너미 탐지 스킬과 김유리의 위험 감지 스킬이 동시에 발동한 것이다.
“세상에…….”
“……!”
스킬은 없지만 맹효돈도 볼 수 있었다.
잔잔하고 어두운 밤바다 저편, 에너미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매음리 선착장에서 민머루 해수욕장, 어류정항으로 이어지는 1km가량의 해안선이 에너미로 뒤덮이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눈대중으로 계산해도 그 숫자가 천은 넘을 것 같았다.
“어, 어떡해. 저거, 다, 희귀도 SR급 이상이야……!”
정보를 읽은 권레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셋 다 근접 공격형 전투 스킬을 가진 데다 다중 개체를 상대로 공격을 할 만한 스킬도 없었다.
굳은 얼굴로 맹효돈이 보호대를 착용하고 권레나도 뒤따라 무기를 들었다.
이미 도망가기에 늦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김유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 때문에 반 친구가 위험해졌다는 생각에 패닉에 빠졌다.
‘나 때문에, 레나랑 효돈이가……!’
얌전히 꿈에서 상위 존재들이 조언해 준 대로 북쪽으로 도망쳤다면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대피를 담당한 의신이랑 세음이를 믿고 함근형 선생님을 찾으러 갔어야 했는데!
김유리가 그렇게 자책하려 했지만.
“유리야, 무기 꺼내! 전열에 있는 에너미는 3분 내로 육지에 도착할 거야! ……저기, 괜찮아?”
“……어디 아프냐?”
그런데도 두 사람은 원망도 안 하고 김유리를 다독였다.
그때.
김유리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하나 들렸다.
[아직 당신에게는 용기가 남아 있나요?]
김유리가 고개를 드니 이능파로 구현된 작은 나비가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게 보였다.
김유리는 자신에게 가호를 내렸던 나비의 진족을 떠올렸다.
그 진족은 김유리에게서 용기가 전부 사라진다면 도와주겠다는 말을 남겼었다.
‘여기로 온 건 용기 있는 행동일까? 방금 내가 한 짓은 그냥 만용이나 객기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도 친구들을 말려들게 한 최악의 용기였다.
김유리는 진족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우리가 싸우고 있으면, 다른 애들도 선생님들도 와 주겠지……?”
“그럴걸. 부반장 그 새끼가 여기 사람들 피난시킨 거 보면 지금 무슨 일이 터지고 있는지 눈치 까고 있는 거 같은데.”
망설이는 김유리와 달리 두 사람은 승산 없는 싸움을 준비하면서도 굳게 믿고 있었다.
김유리는 아이템 카드를 꺼내 라이트세이버를 실체화했다.
친구들이 없었다면 모를까, 이들이 있는 한 계속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김유리는 이 진족의 힘도 아직 빌릴 수 없었다.
김유리가 무기를 들고 싸울 준비를 하자, 다시 나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타까워라, 생각대로 되질 않네요……. 최소한 두 번은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대로 되질 않아?
최소한 두 번은 사용해?
이 진족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김유리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나비의 날개 문양이 새겨진 망사 망토를 입은 진족이 머릿속에 환상처럼 나타났다.
가호로 맺어진 나비령과 김유리의 정신이 이어진 것이다.
나비령의 손에는 목련을 배경으로 하얀 나비가 압핀으로 고정된 액자가 있었다.
[안녕히, 목련의 아가씨.]
그녀가 작별을 고한 직후.
새하얀 나비가 액자째로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파스스!
머릿속에서 나비령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것과 동시에 김유리의 가호가 끊어졌다.
그리고.
강대한 이능압이 김유리를 덮쳤다.
콰아아아아!
“아아아악!”
온몸의 세포가 터지고, 혈관이 끊어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갈 곳을 잃은 이능파가 배출구를 찾아 김유리의 몸을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두 자리 수에 달하는 상위 존재와의 인연을 짊어지면서도 이능압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김유리.
그녀는 광림 봉인술식으로, 나비령의 가호로 상위 존재의 힘을 억눌러 뒀었다.
그 폐해가 지금 나타나고 있었다.
문득 광림 봉인술식이 사라진 날 황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위 존재를 계속 거부하면 이능압으로 몸이 상할 수도 있어.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김유리가 그걸 외면했던 탓에 하필 지금, 최악의 상황에서 광림이 폭주하려 하고 있었다.
김유리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 힘을 억누르려 했다.
“어? 왜 그래, 반장! 야!”
“유리야!”
친구들의 목소리가 멀게 들리고 이능파의 압력은 더 거세졌다.
그 와중에도 에너미는 점점 해안선으로, 그들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었다.
* * *
송대석은 패닉 상태에 놓였다.
갑자기 창문 밖으로 이능파가 밀려오더니, 창문이 전부 깨져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연 이능파 방출 현상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즉, 독을 푼 에너미가 물리적인 공격을 할 만큼 가까이 있다는 것.
그렇게 판단한 송대석은 다급하게 외쳤다.
“아, 진짜! 야, 좀 일어나 봐! 일어나라고!”
방금 유리 조각들을 뒤집어 쓴 바람에 송대석의 티셔츠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티셔츠 밑으로 드러난 팔은 부분 강화 스킬 덕에 무사했지만, 방어 기능 따윈 없는 시판 티셔츠로 유리 조각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선택해야 해.’
아직 송대석에게는 여력이 있었다.
적어도 둘, 많으면 셋 정도는 업거나 들고 도망칠 수 있었다.
스무 명의 학생 중 살릴 사람을 골라야 했다.
‘미친, 그딴 걸 어떻게 해!’
일반인 구조도 플레이어의 주요 임무 중 하나다.
그러나 플레이어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모든 사람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필수 과목인 ‘플레이어와 윤리’ 수업 시간에 언젠가 이런 종류의 일로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오며, 이는 매우 가혹할 거라고 텍스트 너머로 배웠다.
그럴 때가 오면 자신은 냉정하게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눈앞에 현실로 닥치니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게 불가능했다.
‘가장 데미지가 적은 사람, 구출한 후 치료를 받으면 살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 전부 비슷한 상태라면 구조하기 용이해 보이는 사람. 즉, 몸집이나 체구가 작은 사람부터.’
기계적으로 수업 중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 봤지만, 손이 벌벌 떨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쾅!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등장했다.
“선생님!”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건 1학년 2반 담임, 노영미였다.
송대석은 겨우 누가 와 줬다는 생각에 환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 기쁨은 금방 끝나 버렸다.
“……0반의 송대석 학생?”
노영미는 중상을 입고 있었다.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게 내상을 입은 것 같았고, 그녀가 장비 중인 한기가 흐르는 검이 두르고 있는 이능파는 학생의 것보다 미약했다.
‘독에 당한 건가! 게다가, 뒤에는……!’
끼에에에에!
크르르르……!
저 뒤로 에너미가 여럿 있는 것 같았다.
노영미가 재빨리 문을 닫기는 했지만, 이미 금이 가고 있는 문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노영미는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반 여학생들을 바라보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송대석을 향해 말했다.
“여기는 제가 막겠습니다. 창문을 타고 나가세요!”
노영미의 그 말을 들으니 송대석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1학년 0반 아이들과 봤던 액션 영화에서 저것과 비슷한 대사를 한 조연이 어떻게 죽는지 떠올랐다.
송대석은 이를 악물고 보호대를 착용하며 말했다.
“저도, 싸울래요!”
“……송대석 학생!”
노영미가 무모한 선택을 한 송대석을 힐난하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는 주먹을 쥐고 문 앞에 섰다.
“늦지 않았습니다. 도망치세요! 빨리……!”
“싫은데요!”
쾅! 쾅쾅!
끼에에!
그 와중에도 먹잇감을 노리는 에너미가 문을 부수기 위해 공격을 시도했다.
멀리 돌아 창문 쪽을 노릴 정도의 지능이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이 에너미들에게는 그걸 커버할 만한 완력이 있었다.
문도, 벽도 한계에 달해 부서지는 틈 사이로 에너미가 언뜻 보였다.
“선생님, 제가 앞에 설 테니 협공을, ……선생님?”
스륵.
이미 노영미는 한계에 달해 있었는지 벽을 타고 쓰러졌다.
“선생님! 정신 차려요!”
곁으로 다가가 노영미를 흔들어 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노영미의 얼굴엔 핏기도 없었고 피부가 싸늘했다.
‘죽는다.’
송대석은 냉정히 판단했다.
독은 자신의 몸을 확실하게 좀먹고 있었다.
자신의 전투 능력은 반감된 상태인데다 에너미의 상태는 미지수였다.
은광고의 교사와 함께 싸운다면 그래도 누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노영미가 전투 불능이 되고 말았다.
처음부터 도망쳤으면 자신과 자신이 데리고 간 학생 몇 명은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우유부단하고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그린이가 자책하면 어떻게 하지.’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민그린이었다.
민그린은 아이들과 친하게 좀 지내라는 뜻에서 송대석을 억지로 청소년 수련회에 보냈다.
지금 송대석이 죽기라도 하면 민그린은 그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여길 거다.
‘청소년 수련회 재밌었는데. 오히려 억지로라도 보내 줘서 좀 고마웠는데.’
송대석은 디바이스 녹음 기능을 켰다.
문이 완전히 박살 나기 전에 민그린에게 한마디 남기고 싶었다.
“그린아.”
하지만 이름을 부르고 나니 그 뒤로 할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 한마디만 녹음하고 녹음 중단 버튼을 눌렀다.
그때였다.
문 너머로 사나운 기운을 띤 이능파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파앗!
부서진 문틈으로 이능파가 한 번 번뜩였다.
‘이게, 이게 뭐야!’
에너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틈 사이로는 에너미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기척 감지 스킬이 없어도 에너미가 한순간에 완전히 전투 불능 상태에 놓였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똑, 똑.
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자신과 비슷한 체격의 인물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송대석이 고민하던 중에 바깥쪽에서 멋대로 열어 버렸다.
끼익.
반사적으로 무기를 움켜쥔 송대석의 앞.
그가 알고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무사한가, 나의 은인이 부탁한 일을 처리하느라 조금 늦었다.”
1학년 0반 최고의 돌아이, 황지호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