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던져진 동전 (4)
[민그린] (링크)
[민그린] 이거 대석이가 만든 웹 애플리케이션인데, 송 할아버지가 협회 쪽에 있는 아는 동생한테 보여 주신다고 한 다음에 접근 불가 처리가 됐어…….
접근 불가 처리라고?
민그린이 보낸 링크를 확인해 보니 플레이어 협회 로고와 함께 ‘접근이 제한된 페이지입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떴다.
협회 측이 특정 웹 페이지의 접속을 차단할 때 뜨는 메시지였다.
‘협회가 나서서 통제할 만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건데…….’
게임 속에서는 그럴 만한 정보가 나오지 않은 탓에 짐작이 가지 않았다.
[민그린] 송 할아버지가 전화를 받고 협회로 가셨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
[민그린] 대석이 마중하러 간 대석이네 부모님하고도 연락이 안 돼.
[민그린] 그러다 갑자기 너희 있는 곳에 이계 경보가 뜨고 날이 밝아도 대석이는 메시지 확인도 안 하고……!
얘기를 들어 보니 민그린은 권레나와 영상 통화하다가 중단된 직후부터 한숨도 안 잔 것 같았다.
애플리케이션 건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우선 민그린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지금 송대석의 상태를 말하긴 어렵지만 숨기려 들면 불안해할 거야.’
필요한 사실을 전하되 거짓말을 하지 않고 민그린을 안심시킨다.
그런 생각으로 메시지를 작성했다.
[나] 걔랑 김유리는 검사받을 게 많다고 들었어. 우리보다 좀 늦을 거야.
[민그린] 유리도?
[민그린] 어, 유리도 답변이 없었지…… 반장이라 바빠서 그런 줄 알았는데. 둘이 많이 안 좋아?
[나] 그거까진 모르겠어. 지금 어디야? 집이야?
[민그린] 응, 사부님이랑 같이 있어.
다행이다.
홍경복이라면 민그린을 잘 다독여 주고 무리하지 않게 말려 줄 거다.
그녀가 석모도나 병원으로 직접 뛰쳐나가지 않고 얌전히 집에서 메시지를 작성 중인 것도 홍경복이 막아 준 덕일 거다.
“야.”
“무슨 일이지?”
“민그린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송대석 면회는 언제부터 돼?”
“민그린? 아, 송대석이 그렇게 됐으니 걱정하고 있겠군. 하지만 오늘 만나게 할 수는 없다. 지금은 가까운 가족과의 면회도 사절하는 중이다.”
“왜?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
“의식이 없는 탓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커. 녹족의 수장이 검체 채취를 요청해서 밤에 병실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인간이 중독된 사례를 연구하면 해독제 개발에 도움이 될 테니까.”
녹족의 수장.
호족도 그렇고 녹족도 그렇고 직접 나서는 걸 좋아하는 수장이 많은 건가.
“아침에는 치료를 위해 유상희가 오기로 했다. 병문안도 좀 나은 다음에 하는 게 낫겠지. 내일 낮까지 기다려라. 반 아이들도 모아서 같이 갈까.”
가족도 아닌 일개 반 친구가 바로 면회를 가는 건 어려운 일인데.
민그린의 불안을 완전히 해소하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황지호가 충분히 배려해 준 셈이다.
[나] 내일 같이 면회 가자. 황지호가 병원 쪽에 부탁해 뒀어.
[민그린] 황지호?
[민그린] 아, 걔 황명 재단 이사장 친척이었지.
민그린은 저 노친네가 저런 설정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나 보다.
내일은 송대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민그린도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나] 그럼 내일 보자.
[민그린] 내일 봐.
[나]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해.
메시지를 보낸 후, 적호와 김신록 두 부자를 기다리며 우리는 저녁 준비에 몰두했다.
백호군과 용제건이 주류 창고를 가서 직접 술을 골랐고, 황지호가 직접 모든 음식을 만들었다.
“저 용족 분은 신록 오빠 친구라면서요? 또 황호 님과 의신 오빠네 부담임이라면서요? 어떤 분이세요?”
“사진 찍어도 돼요?”
“오늘은 손님이 많네요! 저희도 황호 님을 돕는 게 좋을까요?”
“오랜만에 왔으니까 얘기하고 싶은 게 많은데. 아, 저번에 산령하고 너희들이 했다던 게임 말인데…….”
저녁 식사 준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은호의 후예 삼 남매를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유희의 용은 그렇다 쳐도, 부상을 입은 적호와 밤을 지새우고 이능 소모도 심한 조의신 네 위장에 부담을 주기가 꺼려지는군.
—은호의 후예들과 거실에 있도록.
황지호는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돌려 말했다.
아이들의 괴멸적인 음식 솜씨는 아직 변함이 없는 듯했다.
올무를 품에 안고 은호의 후예 삼 남매와 허공에 떠 있는 산령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흘러 금방 해가 졌다.
슬슬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
왕!
“적호 님, 신록이 형!”
올무가 짖는 방향을 보니 두 부자가 보였다.
적호는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적호가 저런 얼굴을 하네.’
반면, 김신록은 얼굴에서 열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고개를 반쯤 숙이고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록아, 대화는 잘했어?”
“…….”
김신록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용제건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대신 적호가 용제건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나 제 아들이 신세 지고 있습니다. 인사가 늦어졌군요.”
“수련회 때 계속 같이 있었으면서 정말 인사가 늦었어. 신록아, 적호 씨는 내내 네 생각에 신경이 곤두서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어.”
적호는 용제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김신록을 경호하는 동안 숨 막힐 정도로 어색했을 두 진족이 아주 쉽게 연상되었다.
그 어색했을 두 진족이 자신의 바로 주변에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지, 김신록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저녁 준비가 다 됐다. 와라.”
기척 없이 나타난 앞치마 차림의 황지호가 웃으며 말했다.
앞치마를 벗은 황지호는 다른 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하고 상석에 앉았다.
“이 몸이 직접 만든 거다. 많이 들도록.”
오토매틱 메이드가 내온 음식과 음료는 전부 붉었다.
두 부자의 화해를 벼르고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은 메뉴들뿐이었다.
캐비아를 올린 붉은 대게 살.
붉게 색을 낸 어란과 금태.
어향소스를 얹은 전복찜.
각 메뉴에 맞춰서 곁들어진 홍국쌀, 산수유, 오미자로 빚어낸 음료.
미성년자인 나와 은호의 후예들에게는 냉차가, 다른 진족들에겐 술이 나왔다.
‘이젠 대화를 하긴 하는구나.’
적호와 김신록은 어색하게 잔을 주고받으며 한마디씩 나눴다.
사정을 모르는 은호의 후예들은 오랜만에 보는 적호와 김신록, 또 처음 보는 용제건에도 열심히 말을 걸며 분위기를 띄웠다.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두 부자가 나누는 대화도 늘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잔을 기울이던 황지호가 한마디 던졌다.
“많군.”
“뭐가?”
“…….”
황지호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백호군, 적호, 김신록, 용제건,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 그리고 트레이가 붙은 유아용 보조 의자에 앉은 올무까지.
많긴 많았다.
‘게임 속에선 황지호 혼자였겠지.’
평소와 달리 황지호는 말수가 적었다.
대신 식탁을 바라보며 자주 잔을 기울였다.
즐거운 시간은 금방 끝났다.
식사에 이어 디저트까지 먹으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정에 가까워졌다.
은호의 후예들이 슬슬 졸리는지 눈을 비빌 때쯤, 용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어. 좋은 것도 많이 봤고. 우리 반 아이들과 크루저를 타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 대신이라고 생각하니 괜찮네.”
용제건은 크루저에 못 탄 걸 아직도 담아 두고 있었나 보다.
능청스럽게 말하는 용제건을 보며 김신록이 인상을 썼다.
“……빨리 가라.”
“그래그래. 신록아, 아버지랑 얘기 잘해.”
“빨리 가라고!”
김신록을 한 번 더 놀려 먹은 용제건은 특유의 황홀한 표정을 한 번 짓고 등을 돌렸다.
저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용제건도 눈치챈 것 같았다.
일 핑계를 대면서 오지 않으려던 김신록이 오늘은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묵고 갈 생각이라는 걸.
“그럼 나는 기숙사로 갈…….”
“의신 오빠…… 기숙사로 가세요?”
“의신이 형…… 안 자고 가세요?”
용제건이 나갈 때를 노려 귀가하려 했지만 은호의 후예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올무는 급히 자기 방으로 뛰어가더니 뭔가를 물고 왔다.
리드인가 싶었는데 다른 물건이었다.
왕왕!
“녹족의 영약을 먹는 걸 지켜봐 줬으면 하는 모양이군.”
백호군과 올무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수련회 짐도 그대로 있으니 갈아입을 옷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올무가 발치에서 몸을 웅크리고 은호의 후예들이 현관 앞을 가로막았다.
자고 가기로 마음 먹을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황명 그룹이 설립한 병원들을 일컫는 종합병원 네트워크, 황명 의료원.
그중 은광구 소재의 종합병원, 황명은광병원의 플레이어 전용관 최상층의 병동.
현재 이 층은 청소년 수련회에서 의식 불명 상태로 돌아온 은광고의 교사와 학생들만이 입원해 있었다.
의료진이 모두 자리를 비운 가운데, 병동 복도는 진족의 수장 둘만이 서 있었다.
“다 끝났나?”
“고마워, 고마워! 호족의 수장이 직접 건넨 데이터도 있고! 최고야!”
아이의 모습을 한 녹족의 수장이 냉매제가 가득한 검체 보관 용기를 끌어안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품에는 황호가 ‘황지호’로서 이능독 해독제 치험약 버전을 복용했을 때의 바이털 사인 기록이 남아 있었다.
“해독제 개발 목적 이외의 용도로 쓰면 거래를 끊겠다.”
“걱정 안 해도 돼! 이걸 다른 용도로 쓸 이유가 있어? 지금 제일 관심 있는 건 이 독인데? 안 그럴게!”
검체 보관 용기를 캐리어에 넣으려던 녹족의 수장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60대의 모습을 한 황호를 올려다 보는 게, 흡사 과자를 사 달라 조르는 손주의 모습 같았다.
“황호, 인간 상대로도 치험을 해 보고 싶은데…… 우린 인간이랑은 별로 연이 없어서…… 막 아무나 잡아서 하기도 좀 그렇고…….”
“마침 인간을 몇 명 잡아 왔으니 심문을 마치면 넘겨 주겠다.”
“진짜? 고마워! 다음에 영약 거래할 때 싸게 해 줄게!”
황호의 말에 녹족의 수장이 신나서 방방 뛰어다녔다.
황호는 폭탄을 설치하려던 수련회 지도사들을 처리하고 이용할 구석이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의 비서가 녹족의 수장을 병동 밖으로 안내하고 몇 시간이 흐른 후.
해가 뜨기 시작한 시각.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일찍 왔군.”
열린 엘리베이터로 황호가 기다리던 인물이 등장했다.
“황명호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비서와 함께 등장한 이는 은광고가 자랑하는 힐러, 치유광풍 유상희였다.
“상희 학생,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우리가 신세를 졌군.”
“학생회도 기획에 참가한 행사에 노영미 선생님과 후배들이 다쳤는걸요.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죠.”
유상희는 겸허하게 말하며 황호와 나란히 서서 병동 복도를 걸었다.
“이번 일도 포함해 반드시 보답하마.”
“보답이요? 저번에 지호를 통해서 선물 세트를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황호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학생을 배려하는 이사장이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황호는 그런 얼굴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진로 문제로 곤란한 일이 있던 것 같더구나. TC와도 엮여서 거절하기 어렵겠지.”
“……알고 계셨군요.”
유상희는 우뚝 멈춰 섰다.
유상희의 얼굴에는 피로감과 당혹감이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
황호도 그 옆에 멈춰 서서 말했다.
“황명 그룹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네가 구했던 자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으니까.”
* * *
꿈 없이 푹 자고 일어났더니 평소와는 다른 곳이었다.
고시원도, 기숙사도 아닌 풍경을 보고 몇 초간 어리둥절해 있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기숙사에서 잔 게 아니었지.’
아직 졸린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왕!
천사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올무가 버둥거리는 게 보였다.
올무를 붙잡고 있는 것의 정체는…….
“잘 잤나?”
백호군이었다.
왜 백호군이 내가 잠든 게스트 룸에 있는지, 왜 올무를 붙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물으니까 대답은 했다.
“어.”
“몸은 괜찮나?”
“푹 잤더니 괜찮아.”
대답을 들은 백호군은 침대 위로 올무를 풀어 줬다.
올무는 시트 위를 종종 달려 내 품에 뛰어들었다.
백호군이 대체 여기서 뭔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올무가 품에서 끙끙거리면서 애교를 부리니 아무래도 좋아졌다.
“이 녀석이 네 수면을 방해해서 붙잡아 뒀다.”
“올무가?”
……왕!
짧게 대답한 올무는 내 품 사이로 계속 파고들었다.
올무가 정말 내가 자는 걸 방해하려고 한 건가?
올무가 밤사이에 외로웠나?
아직 졸리고 올무가 품에 있는 탓일까.
생각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방금 조의신이 한 대답은 들었겠지. 앞으로 조의신이 잘 때 방해하지 마라.”
그 말을 남긴 백호군은 등을 돌려 나가 버렸다.
아침부터 폭풍이 휩쓸고 간 기분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