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가호의 의미 (3)
이 세계의 가호 시스템은 상당히 독특했다.
가호란 신화와 허구 속에서 탄생한 상위 존재와 진족의 ‘존재감’을 상호 동의하에 한 존재 안에 심고 각인하는 것이었다.
본래 현세에서 인지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하게 되며 생긴 존재감은 가호를 통해 강력한 힘으로 바뀌곤 했었다.
가호를 내린다 한들 자신의 이능의 위력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가호를 거둘 수도 있으니 가호를 내리는 존재들은 적지 않았다.
물론, 리스크가 존재하긴 했다.
받는 대상의 그릇에 맞지 않는 강한 가호를 내리면 주고받는 쪽 모두 심신이 붕괴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가능성이 있으니 가호를 내리는 순간에는 상호 동의가 필요했다.
“세음이가 은광고에 다시 다닐 때 도움이 됐으면 해서 내가 알던 진족을 소개해서 가호를 받게 했었어.”
사월세음의 가호는 게임 속에서 없던 것이었다.
만우절에 다시 만났을 때, 사월세음에게는 계족의 가호가 걸려 있었다.
가호의 힘이 꽤 강력한지 황지호도 신경 쓸 정도였다.
‘확인해 볼까.’
사월세음은 오혜정을 숙모로 부르지 말라는 사월세민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조금 삐죽 내밀고 있었다.
사월세민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는 사월세음을 곁눈질하며 메뉴를 열었다.
〈‘사월세음’의 인물 정보를 열람합니다.〉
[이름] 사월세음
[칭호] 마지막 왕조의 전령의 후계자, 은광고 1학년
[가호] 계족(鷄族)의 제안, '비행을 사용할 때 나를 부르렴'
······.
······.
······.
기억하고 있던 대로 게임에서는 없던 가호가 걸려 있었다.
‘계족이 시나리오상 등장한 적이 있긴 하지만 판단할 단서가 적어.’
게임 속 시나리오를 다시 떠올리고 상태창을 봐도 결론이 나지 않아 오혜정에게 물었다.
“어떤 진족이죠? 신뢰할 만한 진족인가요?”
“그 계족의 기원은 계림(鷄林) 왕조 시조의 탄생을 알렸던 흰 닭이야. 막 태어난 시조가 잠들어 있던 금궤짝의 위치를 탈해왕에게 알린 신성한 닭이었는데, 김씨 왕조가 시작되자 진족이 되어 생(生)을 얻었어.”
계림(鷄林)은 신라의 또 다른 이름이고 닭은 신라의 국조였다.
사월세음에게 가호를 내린 계족은 건국 과정에서 호족만큼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개국 신화에 등장했으니 신화계 계족으로 구분될 것이다.
그 신성한 닭의 행보를 고려하니 확신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계림부터 이어져 온 계족이라면 믿고 사월 일족을 맡길 수 있겠네요.”
“오, 눈빛이 바뀌었네. 방금까지는 의심하지 않았어?”
“계림에서 이어져 온 신성한 닭은 마지막 왕조에서도 상서로운 존재로 숭상되었죠. 왕의 등극을 예견하는 신성한 동물이라고요.”
“잘 아네.”
“마지막 왕조의 종묘제례에서는 놋그릇에 닭 문양을 새긴 놋 계이(鷄彝)에 명수(明水)를 담기도 했으니까요.”
갑자기 튀어나온 계족이라면 모를까, 오랜 기간 인간을 지켜온 데다 마지막 왕조와 깊은 연을 맺은 계족이라면 신뢰할 만했다.
적어도 사월 일가에 관한 건에서는.
“맞아. 내가 소개한 진족은 용족처럼 강한 세력은 아니지만, 마지막 왕조와 의리를 지켜 온 진족이라서 믿을 만해. 그래도 너무 오래 살아서 괴팍해졌는지 좀…… 막 나가는 성격이라서 욱할 땐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어. 그게 걱정이야.”
계림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탄생한 건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탈해 이사금 시절 1세기였다.
2천 살이면 너무 오래 산 거구나.
오혜정이 1학년 0반 구성원의 평균 나이를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계족이 과하게 개입하는 걸 걱정하시는 건가요?”
“응. 우리 도련님 그릇이 크다고 하지만 무거운 가호를 새로 받을까 걱정도 되고, 무슨 일 생기면 닭이 은광구까지 찾아가 깽판을 부릴까 봐 신경 쓰여.”
저렇게 말할 정도면 계족의 흰 닭은 오혜정보다 더 화끈한 성격이 아닐까.
사월세음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잘 지켜보고 있을게요.”
“그래, 부탁해. 세민 씨랑 결혼하기 전에 밖에 나가기 어렵거든. 영감탱이들이 귀찮게 굴 게 뻔하니까.”
오혜정은 그렇게 말하며 행복한 얼굴로 사월세민을 바라봤다.
오혜정의 시선을 느낀 사월세민이 이쪽을 보다 얼굴을 붉히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게 뻔한 데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사월세음도, 오혜지도 오혜정의 행복을 바랄 것 같으니 나도 응원하기로 했다.
얼굴을 식힌 사월세민의 안내에 따라 몇 분 이동했을 때, 사월세음이 밝게 말했다.
“제 방은 저기예요. 지금 문 열게요!”
사월세음의 방은 창호지 문으로 되어 있어 언뜻 보기엔 보안상 허술해 보였지만, 문고리에 새겨진 결계는 허투루 볼 것이 아니었다.
파앗!
사월세음의 이능파에 반응한 문고리의 결계술식이 빛을 뿜었다.
빛이 멎자, 문고리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도 방문객을 환영하는 것처럼 창호지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사극의 한 장면을 그린 듯한 예스러운 방을 본 순간, 딱딱히 굳고 말았다.
방 곳곳에 ‘그 단어’가 붙어 있었으니까.
[환몽 게이트 깬 ‘적벽괴도(赤壁怪盜)’, 문화재 돌려줘]
[환몽 경매를 폭로한 의적 적벽괴도(赤壁怪盜)의 선행, 문화재청 ‘감사 표한다’]
[의적 적벽괴도, 그 정체는 누구인가?]
인쇄된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사월세음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제 방에 반 친구를 초대한 건 처음이에요! 먼저 뭘 하는 게 좋을까요?”
“차랑 과일이라도 내오렴.”
“아, 그렇죠!”
사월세음은 밖으로 날아가 차를 준비해 왔다.
차는 소나무의 뿌리혹을 우려낸 물에 벌꿀을 가미한 복령차(茯苓茶)로, 백복령은 차게, 적복령은 뜨겁게 달여서 나왔다.
차에 곁들여진 과일은 제철인 자두로, 하얀 당분이 잔뜩 올라온 게 보여 아주 달 것 같았다.
차와 과일이 나오자 뒤늦게 통성명을 시작했다.
“자기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그 이후로 조의신의 모습으로는 처음 만나는 이들과 인사를 마쳤다.
통성명을 마친 오혜정은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오혜정이 ‘지랄’, ‘노망’으로 표현한 약혼식 사건부터 나와 마주칠 때까지 이야기를 짤막하게 전한 그녀가 다시 감사 인사를 한 후, 화제를 바꿨다.
“혹시 내 동생 알아? 은광고 3학년 오혜지.”
“체스 대회에서 대전 상대로 만난 적이 있어요. 키모폴레이아에서 신세도 졌습니다.”
“혜지 얘기도 해 줄래? 우리 도련님은 혜지랑 접점이 거의 없어서.”
이번에는 내가 아는 것들을 말했다.
키모폴레이아 이야기에 이르자, 오혜정은 잠시 말을 끊었다.
“혹시 그 영감탱이들이 이번엔 수혁이랑 혜지를 이어 주려고 지랄했니?”
주수혁과 함께 간 키모폴레이아 호에서 오혜지를 만났다고 얘기했을 뿐인데.
오혜정은 귀신같이 눈치챘다.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오혜정은 확신한 듯 혀를 찼다.
“하, 그 영감탱이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줄래?”
“아…… 저에게도 연락 부탁드립니다.”
오혜정과 사월세민과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한 후에도 내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계 공략에서 주수겸이 오혜지를 감싸고 다쳤다는 말에 오혜정이 아주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 주수겸이가 그랬다고? 그 인간이? 걔가?”
“네, 갑판에서 치료받는 걸 봤습니다. 오혜지 선배님도 걱정하는 것 같았어요.”
오혜정이 인상을 구겼을 때.
딸랑!
어디선가 맑고 정명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방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창호지 너머로 방울이 달린 새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 식사 준비가 다 됐나 봐요! 가 봐요!”
사월세음이 문을 여니 이능파로 된 새가 부리에 방울을 물고 파닥거리는 게 보였다.
새는 사월세음의 주위를 한 번 돌더니 날갯짓을 하며 앞서 인도하기 시작했다.
“이 방향에는 송림심처(松林深處)가 있었죠? 저도 자주 가 보진 못 했는데!”
“귀하신 은인을 모셔서 어르신들이 배려한 것 같구나.”
귀하신 은인이라는 말에 머쓱해져 입을 다물고 소나무 숲을 바라봤다.
언뜻 보기에는 길이 없어 보이는 소나무 숲이었지만, 신묘하게도 새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쾌적한 산책로가 열렸다.
송림 저편을 향해 한참을 걸었을 때, 길 너머에 정자가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딸랑, 딸랑.
안내를 마친 새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듯 방울을 두 번 울리고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곁으로 사라졌다.
널찍한 정자에는 한복 차림의 네 사람이 보였다.
우리를 기다리는 청수한 인상의 노부부와 중년 부부의 얼굴엔 사월세음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저희 조부모님과 부모님이세요.”
사월세음이 귓속말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소중한 가족을 구해 주신 은인을 뵙습니다.”
한참 연배가 위인 분들이 저렇게 공손히 대해 주니 당황했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마주 인사를 하며 말했다.
“정중히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고개를 들어 주세요.”
“사월 일족의 현 가주와 전 가주로서 가족들을 구한 은인께 인사를 올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 단어’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월세음의 부모와 조부모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니 낯이 간지러웠다.
“저는 사월세음의 같은 반 친구예요. 그렇게 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의신아…….”
사월세음은 감동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네 어르신들이 흐뭇해하는 얼굴로 이쪽을 봤다.
“우리 은인…… 아니, 세음이 반 친구는 정말 좋은 아이구나.”
“세음이한테서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도 올곧은 아이 같네요.”
덕담을 들으며 자리에 앉을 때였다.
어르신들이 사월세민 곁에 착 붙어 있는 오혜정을 보며 말했다.
“새아가 왔구나.”
“제수씨 오셨어요?”
쾅!
자리에 앉던 사월세민이 상에 무릎을 박았다.
“세민 씨,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아버지, 형님, 왜 혜정 씨를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사월세민의 말에 어르신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그냥 아가라고 부르는 게 낫겠느냐?”
“제수씨가 싫으면 계수씨라고 부를까?”
여기에 사월세민 편은 없는 듯했다.
* * *
황명은광병원 플레이어 특별관 최상층 병동.
모든 은광고 학생이 퇴원했지만 오직 한 명, 김유리만이 병상에 남아 있었다.
“오늘은 어떻지?”
“평소 대로야. 저기, 매일 미안해…….”
“매일 올 필요가 있어서 오는 게 아니다. 당분간 자리를 비울 것 같아서 방비를 철저히 해 두는 것뿐이지.”
그게 그 말 아닌가.
김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결계를 짜는 황호를 미안한 얼굴로 바라봤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 단순히 견디기만 하면 이렇게 피해만 주게 될 거야.’
김유리는 이 광림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힘을 다뤄 내야 해.’
김유리는 자신에게 가호를 내렸다가 거둔 접족을 떠올렸다.
접족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김유리에게 접근했고, 이용했다.
그 목적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석모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막연한 공포에 짓눌리고 주변 사람들이 다치기 전에 강해지고 싶었다.
‘상위 존재와 광림에 관해서 학교 수업보다 더 자세히 배우고 싶은데.’
조언을 받을 대상으로 떠오른 건 함근형과 유상희였다.
하지만 유상희는 졸업을 앞둬서 바쁘고 함근형도 마찬가지였다.
함근형의 경우 김유리를 배려하고 사건을 수습하느라 업무량이 상당히 늘어난 상태였다.
그 둘이 안 된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김유리의 광림을 눈치채고, 결계를 펼쳐 그 힘을 감당하는 존재.
황호였다.
“지호야, 그…… 나 말이야. 이 광림을 어떻게 좀 하고 싶은데…….”
황호가 결계술을 펼치며 답했다.
“설마 또 가호를 받을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달콤한 언어로 존재감을 새긴다 해도 그 효과는 그들이 남긴 말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말에 김유리를 에워싼 상위 존재들이 아우성을 쳤다.
가호를 받을 거면 자신에게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접족에게 가호를 받을 때와 달리 광림 봉인술식도 없고, 그들과 함께 있던 시간도 길어진 탓에 그 목소리들이 똑똑히 들렸다.
“음, 나도 당분간 가호는 사양하고 싶어.”
다정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용기를 북돋아 준 아름다운 나비의 진족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잘 봤기 때문이었다.
“이 힘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잘 다루게 되고 싶어.”
“쉽지 않을 거다.”
“그래도 방법이 있다면 내 힘으로 만들고 싶어.”
황호는 바로 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어두운 병실 안, 결계술에 새기는 금빛의 마력 탓에 황호의 눈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알았다. 우리 쪽 수석 주술사를 소개해 주지.”
“고마워!”
“다음에는 수석 주술사가 대신 올 거다.”
“응!”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한 김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 뭐 하나 더 물어봐도 돼?”
“들어는 보겠다.”
황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질문 여하에 따라서 답해 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의신이랑 지호는 인간이야?”
황호의 표정에서 잠깐 장난기가 사라졌다.
자주 보는 반 친구의 얼굴에서 어쩐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어져 김유리는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조의신은 인간이다.”
황호는 그 대답만을 하고 병실 밖으로 사라졌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