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92화 (192/925)

40. 가호의 의미 (4)

사월 일족의 어르신들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피는 못 속인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사월세음처럼 호기심이 넘치는 어르신들은 계속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체류 기간이 길어져 대화할 기회가 많았을 오혜정에게도 잔뜩 질문하고 그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오혜정은 부드럽고 예의 바른 태도로 사월 일족을 대했고, 사월 일족도 오혜정을 아끼는 게 티가 났다.

이 집안에서 사월세민과 오혜정의 결혼을 반대하는 건 사월세민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부부 같은데.’

어르신들을 모신 밥상에서도 오혜정과 사월세민은 틈만 나면 서로 챙겨 주기에 바빴다.

적극적으로 구혼하는 오혜정이야 그렇다 쳐도 표면상 거절 중인 사월세민은 본능인지 뭔지 몰라도 오혜정이 잘 먹는 반찬을 그녀 가까이에 놔 주고 그녀의 잔 안에 물과 차가 떨어지지 않도록 배려해 줬다.

사월세민은 오혜정을 챙기기 바빠서 어르신들과 사월세음이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는 게 안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담소와 식사를 이어갔다.

“세음이는 평소처럼 입이 짧구나.”

“가리는 건 없지만 애가 먹는 양이 적어서 걱정이에요. 은광고 다니면서 살이 올랐길래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던 사월세음이 눈치를 보다 잡채에 들어간 작게 썰린 느타리버섯을 새 모이만큼 집어 깨작깨작 먹었다.

‘양식은 많이 먹어도 한식은 그렇지 않구나.’

사월세음은 기숙사 식당에서 양식만 2인분 이상을 먹곤 했다.

기숙사 밥도 잘 먹는 데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한이와 함께 방윤섭 빵 맛집 리스트를 깨고 다니기도 했다.

‘사월 일가의 식탁에는 한식만 나와서 그런 건가.’

지금 한 상 가득 차려진 메뉴는 전부 한식이었다.

식단만 잘 조절하면 한식만으로도 균형 잡힌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긴 하지만, 사람에게는 취향이 있는 법이다.

마지막 왕조가 남긴 전령의 후계자의 입맛에는 양식이 맞는 모양이었다.

이번 초대에 대한 보답으로 양식으로 이름난 맛집으로 그 후계자를 모시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월 일가와의 단란한 식사를 마친 후.

기숙사로 돌아가려 하니 어르신들과 사월 일가의 예비 신혼부부, 사월세음이 마중 나왔다.

예비 신랑이 입을 열었다.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세음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혜정의 맹렬한 대시에 넋을 잃는 장면을 생중계로 전부 봤으니 인사를 못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혜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알았지?”

오혜정은 오혜지가 신경 쓰이는 듯 거듭 부탁했다.

“아직 여름 방학은 많이 남았으니까 방학 동안에 반 애들이랑 자주 만나고 싶어요!”

방학 기간에는 기숙사를 떠나 본가에 머무를 예정인 사월세음이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찾아뵙겠다는 상투적인 인사를 남기고 학교로 돌아갔다.

*    *    *

예정했던 하루 치 훈련을 끝마치고 기숙사 내 방으로 돌아온 후.

오늘도 넓게 느껴지는 방 안에서 잡념을 떨치기 위해 조사에 몰두했다.

조사의 주제는 계족이었다.

‘오혜정의 연줄인 계족은 주오 그룹과도 연관이 있을 거야. 주수혁과 오혜지가 있는 주오 그룹에 대한 정보는 많을수록 좋겠지. 사월세음도 가호를 받기도 했고.’

한반도에는 왕과 신하들이 신년을 기념하며 세화(歲畵)를 주고받는 풍속이 있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호랑이와 용에 이어 닭 역시 세화(歲畵)에 등장했다고 한다.

닭의 울음소리는 밤이 끝나고 동이 트는 것을 알리는 광명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니까.

닭에 연관된 신앙을 죽 확인해 보던 중, 신경 쓰이는 단어가 보였다.

‘달걀은 닭이 되고, 닭은 달걀을 낳는 반복과 재생 현상에 따라, 닭은 윤회생사(輪廻生死) 사상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윤회’라는 말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이 단어는 최근 어떤 진족의 입에서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다른 진족과 달리 혼이 육체를 떠나 깊은 잠에 빠질 일도 없고, 육체를 잃더라도 윤회의 굴레를 넘어서 다시 재수복해. 시간은 좀 걸리지만.

TC 나이츠가 기록적인 10연패를 달성한 날.

회토(懷兎)의 토끼 옥토연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진족이 깊은 잠에 빠진다는 건 단순히 뇌사나 식물인간 상태가 된다는 게 아니었나? 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건 정확히 어떤 개념이지? ‘윤회’라는 단어는 단순히 죽다 살아난다는 비유가 아니었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

다음에 황지호나 옥토연을 만날 때 물어보기로 다짐하고 조사를 이어갔다.

닭이 무속 비방술(秘方術) 중 하나로, 수명을 대신하고 명을 대신하는 대수대명(代數代命) 희생물로 쓰여 신을 달래고 서낭고를 풀어낸다는 묘사까지 읽었을 때였다.

딩동.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내 제자 염준열이었다.

아침에 안부 인사를 항상 하고 있어서 늦은 오후에도 연락한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며 디바이스를 확인했다.

[염준열] 스승님, 안녕하세요.

[염준열] (사진)

사진에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코트를 입은 염준열과 홍룡이 찍혀 있었다.

배경은 인공 눈이 내리는 놀이터.

모델은 조금 곱슬한 머리를 말끔하게 정리하고 교복 동복 위에 붉은 더플코트를 입은 염준열과 불꽃 비늘을 빛내는 홍룡이었다.

‘겨울용 교복 화보인가? 화보는 공개하기 몇 달 전에 미리 찍어 둔다고 했지. 고생이 많네.’

염준열은 플레이어로서,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우선시하고 있다.

그러나 스타 플레이어인 염준열에게 연예계에서 보내는 러브콜이 끊이질 않았다.

염준열은 처음에는 연예계 쪽 활동을 고사했었지만, 플레이어에 대한 대중의 의식 개선, 이계 안전 홍보 캠페인 등에 자신의 인지도가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모델을 비롯한 다른 활동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또한, 수저 등급으로 따지면 팬시 컬러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레드 다이아몬드 수저를 쥐고 태어난 염준열은 씀씀이도 넓었다.

염준열은 연예계 활동으로 얻은 모든 수익을 기부했고, 그 때문에 극소수 존재하는 염준열의 안티 조차 염준열의 스타 플레이어로서의 행보를 까지 못했다.

지금 염준열이 보낸 화보 사진은 내 착한 제자가 이런 기특한 생각을 품고 일한 결과물이었다.

‘굳이 이 사진을 보낸 이유가 있을 텐데.’

망겜의 썩은 물이 갈고 닦은 관찰력을 동원하여 화보를 살펴봤다.

문득 1 대 1 수업에서 본 염준열과 화보와의 다른 점을 발견했다.

홍룡이 성장해 있었다.

몸체도 한 뼘은 넘게 커지고 불꽃으로 된 눈썹이 더 높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 홍룡이 성장했구나. 축하해.

[염준열] 역시 스승님이세요! 말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알아봐 주시다니!

염준열의 반응을 보니 정답을 맞춘 것 같았다.

‘이능 삼키기’ 훈련의 효과인지, 그저 한창 성장기인 10대 청소년 염준열의 성장에 따른 변화인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자의 성장은 기뻐할 일이었다.

[염준열] 스승님, 감사합니다!

[염준열] (스탬프)

염준열은 기뻐하며 손을 들어 올리는 홍룡 스탬프를 첨부했다.

[염준열] 이 스탬프도 곧 성장한 홍룡에 맞춰서 다시 디자인할 예정이에요.

홍룡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실물을 봐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이모티콘 상품화를 위해 데포르메까지 하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텐데 굳이 새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미세한 성장이 디자인에 반영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염준열] 이거 디자인한 분이 용족이시거든요. 홍룡이 성장한 걸 아시자마자 바로 작업에 들어가셨어요.

용족이 관여했다면 어쩔 수 없었다.

홍룡 성장에 따른 신규 스탬프 발매는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홍룡의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마치자, 이번에는 염준열의 방학 숙제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바뀌었다.

[나] 과제는 잘 하고 있어?

[염준열]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잘 안 되고 있어요.

염준열이 부정적인 답변을 보냈지만, 이는 예상한 바였다.

‘생각한 대로야. 이능 삼키기만큼 이번 과제도 쉽지 않겠지.’

내가 염준열에게 내 준 과제는 ‘기척 죽이기’였다.

염준열은 용족 만큼은 아니지만 용의 기운을 띄고 있었고, 홍룡을 부르면 그 기운은 더욱 커졌다.

기척을 숨기는 기술도 기본은 배웠지만, 그리 능숙히 사용하지는 못했다.

‘염준열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용족 놈들이 많을 테니 연습할 기회도 적었겠지. 전투 기술을 배우기에도 바빴을 거고.’

내 대답이 늦어지자 불안했는지 염준열이 긴 메시지를 날려 왔다.

[염준열] 아, 오늘 화보를 찍긴 했지만 스승님이 내 주신 과제를 소홀히 하진 않았어요. 촬영하는 도중에 틈틈이 연습했어요. 성과는 나지 않았지만요.

[염준열] 이제 화보 촬영도 마쳤으니까 더 열심히 연습할게요!

착한 제자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바로 답변을 보냈다.

[나]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염준열] 네! 무리하지는 않더라도 최선을 다할게요.

내 제자는 성실한 데다 솔직하기까지 했다.

염준열의 노고와 노력을 칭찬하고 건투를 비는 말을 남기고 대화를 마쳤다.

염준열과 대화하는 사이에 도착한 메시지가 있었다.

[성국언] 후배야.

[성국언] ‘이무기의 귀천’의 행방을 잡았다.

성시완도 있는 단체 메시지 방을 통해서가 아닌, 개인적으로 보낸 메시지였다.

황지호보다 먼저 단서를 잡다니,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능력은 남달랐다.

[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성국언] 그건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해외에 있다는 것밖에 확인하지 못했어.

해외라니.

‘이무기의 귀천’이 한반도 밖으로 나갔다고?

한반도 최고의 거장과 그 제자의 합작은 해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비싸게 팔렸나 보다.

이걸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국언] 그 기간에 리모델링 업체가 해외 브로커와 접선한 흔적을 발견했다.

이걸로 의문이 하나 풀렸다.

‘이무기의 귀천’이 사라지고 나서 한국의 대화백과 국회의원, 거기에 4대 재벌의 일각인 호족이 나서서 털었는데도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하긴 했다.

이미 한반도 안에 없었기에 찾기 어려웠던 거다.

성국언은 해외 수사 기관의 협력을 얻는 데에 난항을 겪는다는 요지의 보고를 간략히 전했다.

[성국언] 수사가 진행되는 대로 다시 연락하마.

[성국언] 이 건은 나한테 맡기고 놀고 있어. 여름 방학이면 좀 놀아야지.

어쩐지 마지막 메시지에서 성국언이 ‘하하핫!’ 하고 호쾌하게 웃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고1 여름 방학 청소년 수련회에서 큰일을 겪은 후배를 배려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바쁜 성국언에게 맡기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해외가 엮인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수를 짜고 있을 때.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 장남욱]

잔소리 많은 장남욱이 전화를 하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어딘가 불길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바로 통화에 응했다.

“여보세요?”

[의신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무슨 일 있어?”

[…….]

평상시와는 달리 물 흐르듯 나오던 특유의 자질구레한 안부 인사를 전부 생략한 장남욱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시후가 다쳤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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