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가호의 의미 (5)
플레이어는 항상 부상을 달고 산다.
전 세계의 병원 수익을 플레이어들이 책임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복 아이템이 치료하는 건 외상뿐이었고, 부상의 정도가 크면 회복 아이템을 사용하기 전에 플레이어 자격을 가진 의사와 상담하는 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계 공략 팀에 구성원이 두 자릿수가 넘어가면 팀 닥터를 상주시키고, 플레이어 특목고에서는 양호실을 항상 열어 두는 게 상식이었다.
그 정도로 훈련 과정에서 다치는 학생은 매일 나왔다.
‘플레이어가 다치는 건 그리 큰일은 아니야. 장남욱도 그걸 잘 알고 있어. 홍천 가리산에서 도시후가 처맞고 회복 아이템을 쓰려던 함근형 선생님을 말리기도 할 정도였는데.’
무엇보다 장남욱은 제 친구가 다친 일을 가십거리로 삼아 떠들 놈이 아니었다.
단순한 부상일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옥토연의 말이 떠올랐다.
—그사이에 주변에 상을 당한 사람이 있어? 상갓집에 간 적은? 간 적이 없더라도 가까운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거나 하진 않았어?
—그런데 왜 사상(死相)이 보이지?
죽을 조짐이 나타난 얼굴을 의미하는 사상(死相)이 보인다 했다.
옥토연은 5월 5일 어린이날에 만났을 때와 달리 7월 초에는 도시후의 얼굴에서 사상(死相)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도시후는 게임 속에서 암살당했다.
그 생각에 얼음을 삼킨 것처럼 속이 싸늘하게 가라앉았지만 냉정하게 사고했다.
‘도시후가 다치긴 했어도 심각한 부상은 아닐 거야.’
평범하지 않은 부상이겠지만, 입원이 필요할 정도의 중상은 아닐 것이다.
장남욱의 성격상 중상을 입은 도시후를 내버려 두고 전화나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도시후는 괜찮아? 많이 다쳤어?”
[어깨뼈에 금이 갔어. 회복 아이템으로 완치한 상태야. 시후는 지금 자고 있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말 많은 장남욱이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지금 어디야?”
[사관학교는 자율 훈련 기간인데, 반 애들하고 같이 훈련하고 있어. 지금 기숙사야.]
시계를 보니 오후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관학교 교칙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자율 훈련 기간이라면 외박 신청이 쉽게 나올 것 같았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까?”
[……바로 만날 수 있어? 1시간 내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빨라도 내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장남욱의 마음이 많이 급했나 보다.
[시후가 의무실에서 군의관 장교님하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전에 네가 말한 일도 처리해 뒀어. 가지고 갈게.]
전에 내가 말한 일이라면 분명 5월 이후로 반입한 도시후의 개인 사물에 관해서 말하는 걸 거다.
장남욱이 이렇게 서두르고, 자세한 사항을 통화 중에 말하지 않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그래, 은광구로 올 수 있어?”
[갈게. 어디서 볼까.]
“일단 은광고 정문 쪽으로 오고 있어. 10분 내로 연락할게.”
[그래, 고마워. 조금 있다가 보자.]
아직 한 게 없는데 장남욱은 고맙다고 말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장남욱을 부르기 전에 나도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디바이스 주소록을 열어 어느 인물의 연락처를 불러왔다.
‘사적인 일이긴 한데, 결국 도시후도 스토리에 연관되긴 하니 그렇게까지 사적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거야.’
그렇게 판단하고 전화를 건 순간, 화면이 바로 ‘통화 중’으로 전환되었다.
[조의신, 네가 이 시간에 연락하다니 별일이군.]
전화를 걸자마자 황지호가 바로 응했다.
빨리 받더라도 대기 신호가 두세 번은 가야 하지 않나?
지나치게 빠른 응답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조의신? 무슨 일이지?]
“어, 여보세요.”
[그래. 말해 보도록.]
저 노친네가 매우 한가해 보이니 바로 용건을 말하기로 했다.
“부탁할 게 있는데.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생도 한 명한테 학교 출입 허가를 내려 줘.”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생도?]
“오늘 하루면 돼. 신분은 내가 보증할게.”
[누군지 알 것 같군. 은광고 입학 실기 시험 13조에 소속했던 장남욱을 말하는 거겠지?]
내 뒷조사를 했던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로 짚어 내다니.
아니, 장남욱은 은광고 입시까지 치렀으니 아는 게 당연한 걸까.
[네가 신분을 보증할 만한 사관학교 생도는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그런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결계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학교에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 학교의 결계를 이용하고 싶은 건가.]
“그래. 은광고 교내 주요 보안 시설에 접근 가능한 등급이 아니어도 돼. 비어 있는 훈련실을 쓸 생각이니까.”
[그럼 굳이 학교로 갈 필요가 없겠군.]
학교로 갈 필요가 없다고?
사설 훈련실을 대관하기엔 시간이 늦었는데.
은광고 수준의 결계도 없을 거고.
다시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내 저택의 마당을 빌려주겠다. 그 사관학교 생도도 데리고 오도록.]
의외의 제안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 * *
오늘 자율 훈련 중, 도시후에게 이상한 일이 있었고 그 결과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 이상을 감지한 건 도시후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최근 통찰계 스킬을 계속 발동 중이던 장남욱뿐이었다.
함께 훈련하던 생도들도, 훈련을 참관하던 교관도, 심지어 사고의 당사자인 도시후조차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장남욱은 성실하게 제가 보고 느낀 것을 모두에게 전하고 해결 방법을 같이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무실로 실려 가는 시후를 보던 중, 조의신이 한 말이 떠올랐다.
—도시후가 5월 이후에 반입한 사물을 전부 교체해. 비슷한 걸로 사서 채워 둬. 그리고 그 교체한 사물은 나한테 가져다 줘. 도시후 몰래.
—너 혼자 해야 해. 다른 애들이나 교관한테도 들키지 말고.
장남욱의 친구이자 목숨을 구해 준 조의신이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장남욱은 조의신을 믿었고, 도시후에게 감춰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장남욱은 야구장에 다녀온 이후로 기회가 될 때마다 같은 제품이나 비슷한 종류의 물건을 구해 도시후의 사물을 교체해 왔었다.
하지만 도시후의 눈을 피하며 사물을 교체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결국 늦어 버렸다.
‘사고를 막는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늦는 바람에 시후가 다쳤어.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해!’
다행히 교내외 출입이 통제되는 10시 이전에 모든 사물을 정리할 수 있었다.
외박계를 제출한 장남욱이 캐리어를 끌고 남자 기숙사동을 지나 공용 생활관 밖으로 나설 때였다.
“기수장님, 이 시간에 어디 가?”
장남욱은 표정을 굳혔다.
공용 생활관 현관에는 이 시각에 대체 뭘 한 건지 몰라도 이계 금속으로 된 야전삽을 들고 빙글빙글 웃는 동기가 있었다.
동기는 들고 있던 야전삽을 현관 근처의 화단에 대충 푹 하고 꽂으며 물었다.
“시후는 어때? 귀찮아서 병문안도 안 가긴 했는데.”
“애초에 입원을 안 했어.”
“그래? 기수장님 표정이 다 죽어 가길래 입원이라도 한 줄 알았음.”
도시후와 어렸을 때 아는 사이였다던 동기, 남궁규연은 깔깔하고 웃었다.
입교 전부터 국방부 산하 연구기관에 속해 있던 남궁규연.
그녀는 도시후 무단 외출 사건에서 가리산까지 틸트로터를 몰고 온 괴짜였다.
현재 군사관학교의 성비는 9:1로, 그 10% 정도 되는 여성 생도 중 하나인 남궁규연은 베테랑도 다루기 어렵다는 거친 중장비도 장난감처럼 가볍게 다루는 천재였다.
‘규연이는 좋은 애긴 한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필 1학년 최고의 괴짜에게 잡히다니, 뭐라 변명하면 좋을까 장남욱이 고민하던 때였다.
“다녀오셈.”
“응?”
“기수장님 급하신 거 같은데 빨리 다녀오라고.”
“어……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알았음요.”
남궁규연이 야밤에 대체 무슨 삽질을 한 건지 신경 쓰였지만 장남욱은 우선 은광구로 서두르기로 했다.
야전삽을 뽑아 든 그녀가 캐리어를 끌며 사라지는 장남욱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외부에서 봤을 때, 황명호 대저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였다.
황금 담장과 미로 정원.
거대한 부지를 둘러싼 황금 담장 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별채들이 듬성듬성 있었고, 담장 안 미로 정원 속에 호족들과 후예들이 거주 중인 본채가 있었다.
지금 나와 장남욱이 향하는 곳은 황금 담장과 미로 정원 사이에 있는 마당이었다.
“굉장하다……! 저 담장을 감싼 건 마력이지? 고밀도의 이능파를 이 정도의 힘으로 변환시키다니!”
황금 담장을 지날 때에는 줄곧 굳은 표정이던 장남욱도 감탄할 정도였다.
“어서 와라.”
미로 정원의 입구는 7, 8월에 피는 호랑이꽃이라는 별명을 가진 참나리가 가득 피어 있었다.
은광고 하복을 입은 황지호는 입구 앞, 호랑이꽃을 등지고 서 있었다.
방학 중인데 왜 저걸 입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쪽은 우리 반인 황지호. 얘는 데리고 온다던 사관학교 생도인 장남욱.”
내가 성의 없이 소개하자 ‘같은 반이면 동갑이겠지?’ 하고 장남욱이 반말로 인사했다.
“……안녕?”
“그래, 이 몸은 안녕하시다.”
황지호의 인사 같지도 않은 소리에 장남욱이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뭔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의신이는 0반이었지.”
뭘 납득한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둘이 인사를 마쳤으니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장남욱이 눈에 띄는 곳에 캐리어를 두곤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내 스킬은 ‘백리안’이라고 알려져 있어.”
“천리안의 하위 호환 기술인가. 저레벨일 때는 정밀성에선 백리안이 더 낫다곤 하지만 레벨이 상승하면 천리안의 디메리트가 사라지니 의미가 없지. 하루라도 빨리 천리안 스킬 습득 조건을 충족하는 게 좋을 거다.”
통찰계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건 알았는데, 그게 백리안이었나?
황지호가 말한 대로 스킬 백리안은 천동하나 주수혁이 가진 천리안에 비하면 가동 범위가 상당히 좁았다.
하지만 장남욱이 한 ‘알려져 있다.’라는 말에는 뭔가 다른 의미도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나도 내 스킬이 ‘백리안’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천리안 스킬을 얻을 생각이었지.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어.”
안경을 접어 셔츠 윗주머니에 넣은 장남욱이 스킬을 발동했다.
파앗!
장남욱의 눈에 이능파가 흘렀다.
은은하게 장남욱 눈 주변을 감싼 기의 흐름을 보니, 백리안이나 천리안이 보이는 양상과 조금 달라 보았다.
“이건 백리안이나 천리안은 아니야. 투시안? 미래안? 아니, 이건…….”
“이 스킬은 백리안의 파생 스킬, ‘별 처녀의 눈’이야.”
장남욱의 말에 황지호도 나도 놀랐다.
별의 처녀가 가리키는 인물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의를 호소하던 여신은 인간의 타락을 지켜보다 하늘로 떠났고, 그녀가 들고 있는 천칭은 천칭자리로, 그녀는 처녀자리에 올라 별이 되었다는 설이 있었다.
전 세계의 법정 앞에 정의의 여신상으로서 서 있는 정의 그 자체를 의미하는 유스티티아와 동일시되는 여신이 별의 처녀 아스트라이아였다.
“너, 아스트라이아의 눈을 가진 거야?”
“호오, 실물은 처음 보는군.”
가끔 강력한 가호는 파생 스킬의 추가로 이어지고는 했다.
토트의 가호를 강하게 받은 제갈재걸의 ‘언령’ 스킬에 파생 스킬이 더해진 게 대표적인 예였다.
“내가 각성한 광림이 아스트라이아님의 마음에 들었나 봐. 가호를 받은 뒤에 파생 스킬이 생겼어.”
장남욱의 눈에 아직은 흐릿한 별빛이 가득했다.
아스트라이아는 흔히 눈을 감거나 눈가리개를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각상을 만든 조각사에 따라서는 눈을 뜨고 있기도 했다.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의 눈은 공정하고 공평하게 정의와 진실을 관철해 낼 수 있었다.
“아직 스킬 레벨이 낮고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시후가 다치는 순간, 이 눈으로 봤어.”
장남욱은 ‘별 처녀의 눈’ 스킬 사용을 중단하고, 다시 안경을 꺼내 쓰며 말했다.
“시후를 둘러싼 악의의 결정체가 이능파를 어그러뜨리고 있었어. 그건 씨앗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말로 표현하면, ‘저주의 씨앗’이라고 불러야 할 거야.”
저주의 씨앗.
그 아이템은 게임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사용된 결과물을 봤었다.
제갈재걸을 낚기 위해 교지편집부 학생들에게 심어졌던 게 바로 저주의 씨앗이었으니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