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가호의 의미 (6)
‘별 처녀의 눈’을 가진 장남욱이 그렇게 봤다면 의심할 수 없었다.
‘저주의 씨앗을 키우는 마족(魔族)이 연루되어 있구나.’
마족의 모습은 게임에서 자주 다루어지지 않았다.
마족은 다른 진족에 비해 그 수가 많고,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 무리 짓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다.
그런 습성을 지닌 마족의 행동 양상을 예측하고 이쪽의 득실, 행위 자체의 선악 구분을 따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마족이 있었다.
‘제갈재걸이 죽고 나서 축배를 든 마족이 있었지.’
그 마족이 착용한 로브에 새겨진 문양을 기억하고 있었다.
상위 존재인 7대 죄악의 마신 중 하나, 탐욕의 아바리티아.
그 마신이 내린 로브를 걸친 그 마족은 아바리티아의 광신도 중에서도 최고위의 사제로 꼽히고 있었다.
‘이번 도시후의 부상과 이어져 있었구나. 4대 그룹 암투 사건 때의 암살 건에도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관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건을 도시후 암살 미수라 보기는 어려웠다.
아직 4대 그룹 간의 암투는 시작되지 않았고, 각 그룹의 동향을 고려해 봤을 때 지금 암투가 시작되더라도 흑막이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게다가 도시후는 회복 아이템으로 간단하게 나았다.
그들이 그렇게 어설프게 도시후를 노릴 리가 없었다.
안경알 사이의 브릿지를 검지로 꾹 눌러 고정한 장남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후는 전투 기술로 전기술을 사용해. 하지만 군 커리큘럼에는 일반 체술도 포함되어 있어.”
“은광고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체술의 단련도 종합 능력치 향상에 이어지니까.”
황지호가 말을 덧붙이자 장남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지호 말대로야. 우리도 종합 능력치 향상을 목표로 자율 훈련에 ‘무기를 활용한 체술’을 추가해 뒀어. 오늘은 이계 시뮬레이터를 낮은 레벨로 설정해서 근접 전투형 스킬만을 활용해 클리어하는 걸 목표로 훈련을 시작했는데…….”
도시후는 주수혁이 다니는 쌍검 도장을 잠깐 다닌 적이 있다며 무기로 쌍검을 택했다고 한다.
초반 공략은 무리 없이 진행됐지만, 문제는 보스 룸에서 일어났다.
“보스를 눈앞에 뒀을 때, 갑자기 시후의 움직임이 둔해졌어. 그러다 한순간 움직임이 완전히 멎고, 보스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고 쓰러졌는데…… 그런데도 시후는 시뮬레이션에서 강제 종료가 되지 않았어.”
“강제 종료 조건을 충족했는데도?”
“응. 강제 종료 조건은 디폴트, 표준 설정으로 되어 있었어. 시후는 그때 HP가 0까지 떨어졌었어.”
이계 시뮬레이터에는 가상으로 플레이어의 HP를 설정해 그 이상의 데미지를 입으면 해당 플레이어는 게임 오버, 사망 처리되어 강제 종료된다.
또한, 아무리 강제 종료 조건을 엄격하게 설정해도 가상 에너미들은 치명타를 날릴 수 없었다.
애초에 플레이어의 바이털 사인이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지면 해당 플레이어만 강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이계 시뮬레이터 전체가 셧다운 되고 협회와 가장 가까운 의료 시설에 콜이 간다.
“시후의 움직임이 이상해졌을 때부터 ‘별 처녀의 눈’의 출력을 최대로 올려서 시후를 살피니까 그 씨앗이 보였어.”
“다른 파티원들은 어땠어?”
“시후가 다친 직후엔 시후 앞을 가로막고 보스 에너미와 대치했어. 그런데 시후 근처에 간 애들 움직임도 둔해져서…….”
훈련을 모니터링하던 교관이 이계 시뮬레이터 가동을 중단하려 했으나 에러 메시지만 뜰 뿐, 종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보스 에너미의 희귀도가 낮아서 최악의 사태가 닥쳐도 죽지는 않았겠지만, 그대로 있었다면 시후는 많이 다쳤을 거야. 기계를 잘 아는 동기가 시뮬레이터를 강제 종료해서 살았어.”
“기계를 잘 아는 동기?”
“저번에 틸트로터 운전해 온 애. 이계 시뮬레이터는 무선 전원으로 가동하는데, 전원 부분에 야전삽을 꽂아 넣어 부쉈어.”
그 국방부 산하 연구기관 출신이라는 천재말인가.
그런데 야전삽이라고?
설마 무기로 야전삽을 택한 건가?
아니면 군 지급품인 야전삽을 항상 들고 다니는 걸까?
“좋은 동기를 둔 덕에 도시후가 많이 안 다쳤구나. 다행이다.”
이 상투적인 말에 장남욱이 성실하고 진실된 사족을 붙였다.
“……걔는 다친 시후보다는 망가진 시뮬레이터에 관심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시후가 얼마나 다쳤는지도 몰랐으니까.”
생각보다 더 특이한 생도인가 보다.
장남욱은 정황 설명을 모두 마치자 끌고 온 캐리어를 열었다.
안에는 식기나 수건 같은 일상 생활용품부터 서포터 손질용 오일, 회복 아이템 카드 등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을 법한 아이템들이 가득했다.
“시후가 5월 이후로 들여온 개인 사물을 다 가져왔어. 소모품도 섞여 있어서 이미 다 써 버린 것도 있지만.”
내 옆에서 캐리어를 내려다보고 있는 황지호에게 물었다.
“야.”
“말해 봐라.”
“여기서 뭐가 느껴져?”
“딱히. 이능파의 잔해가 느껴지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뭐라 할 수 없군. 이능파가 마력이나 성력 등으로 변화하면 더 감지하기 어려워진다.”
그 빡빡한 사관학교의 검열을 거친 물건이니, 흔적을 찾기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자정까지는 시간이 남았어.’
이 세계에서 광림이 초기화되는 시간은 한국 표준시, 그리니치 표준시 GMT +09:00 기준으로 0시를 따른다.
광림 제한 시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타이밍이었다.
“뒤로 물러나 있어.”
여기에 있는 건 이미 내 광림에 관해 알고 있는 황지호, 또 제 친구를 어디에 팔 리가 없는 우직한 성품의 장남욱뿐이니 광림 사용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파아앗!
플레이어의 궤적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연습한 덕에, 지금 내 손끝으로 뻗어 나온 캐릭터 카드는 한 장뿐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캐릭터는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의 주역인 무녀 후보생이었다.
* * *
은광고 연구동 구역 광림 연구 4관, 은영관(銀影館)의 지하.
은광고의 시설 안내도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은 층의 결계 앞.
적호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이 결계 너머에는 최근 하루에 한두 번 정도 대화를 나누게 된 적호의 아들, 김신록이 있었다.
—오늘은 그 ‘흉내꾼’을 심문할 예정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
김신록은 그렇게 보고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고문의 스페셜리스트인 김신록이 제 임무를 잘 수행하리라 믿었지만, 웅족의 후예이기도 한 김신록이 웅족 수장의 오른팔이었던 흉내꾼을 상대하러 간다니 걱정이 되었다.
적호는 고민 끝에 같이 가도 되겠냐 물었고, 김신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밤송이를 본 호랑이 같은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적호와 김신록 두 부자가 단란하고 화목하게 흉내꾼이 감금된 은영관 지하로 이동한 후.
고문의 일환으로 흉내꾼의 손톱 틈과 혓바닥에 압정과 샤프심을 꽂아 넣던 김신록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렇게 보고 계시면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를 테니 나가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예전 같았으면 아무리 자신이 불편해도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을 김신록이 그렇게 말하니 적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대신 시간이 되시면, 그러니까…… 좋은 술이 들어와서요. 괜찮으시면, 바쁘시지 않으면 제가 안주를 만들고…….
밖으로 나서는 적호를 향해 김신록은 횡설수설하며 술자리를 함께하자고 권했다.
비록 비릿한 피 냄새가 나고 바로 앞에 웅족이 추하게 엎어져 있었지만, 아들의 그 어설픈 말을 듣는 적호는 감개가 무량해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아이가 술잔을 나누자고 먼저 청하는 날이 오다니!’
적호도 김신록도 긴 세월을 살았지만, 오랜 시간 적호는 붉은 형틀에 묶여 있어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이계 충돌 이후 혼란에 빠진 현세에서 호족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형틀에서 내려왔으나, ‘적호 님.’이라고 부르며 선을 긋고 불편해하는 아들에게 차마 아버지 흉내를 내지 못했다.
황호가 가끔 변덕스럽게 술자리를 열긴 했으나 적호가 있으면 김신록은 자리를 떠 버렸다.
‘황호에게는 고마워해야겠군.’
적호는 먼 옛날, 웅족이 배신했을 때 황호와 나눈 계약을 떠올렸다.
그 계약이 없었다면 오늘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먼 과거를 떠올리고 있을 때, 낯익은 기척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기척의 주인은 발걸음 소리도 감추지 않고 다가왔다.
이곳에서 두 다리로 서 있는 건 호족과 그 후예뿐이니 자신을 경계하지 말라는 배려일 것이다.
얼굴을 식별할 정도로 상대가 가까이 오자 적호가 기척의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백호, 흉내꾼의 심문을 하기 위해 온 겁니까?”
“그렇다.”
백호는 무뚝뚝한 얼굴로 품에 신수를 안고 있었다.
신수에게도 인사를 한 적호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겠습니까? 지금 제 아들이 이것저것 시험해 보고 있어서요.”
계속 적호 쪽으로 걸어오던 백호가 멈춰 서 신수를 바닥에 내려 뒀다.
신수가 꼬리를 파닥이며 두 호랑이를 올려다보고 결계 쪽에 코를 킁킁거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이제는 늘 아들이라고 부르는군.”
“제 아들이 저를 아버지로 여겨 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저도 제 아이를 아들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 아이와 대화를 자주 하나?”
“네. 마침 은광고가 방학 중이라 만날 기회가 많아서…….”
그 이후로 말을 하는 건 적호뿐이었다.
적호는 김신록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자신이 하는 이야기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하는 등의 내용을 늘어놓았다.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아들 자랑으로 변했다.
적호가 김신록이 저번에 잡힌 웅족에게서 어떻게 정보를 캐냈는지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백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만 나오거라.”
“……네?”
적호가 되물을 때, 뒤에서 문이 열렸다.
끼익…….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이 벌게진 김신록이 나왔다.
하필 문틈 사이로 보이는 건 머리카락으로 가리지 않은, 적호를 닮은 외꺼풀의 오른쪽 얼굴이었다.
마치 용족의 팔불출 수장 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적호도 민망해졌다.
김신록이 문밖으로 걸어 나와 고개를 숙였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두 부자는 숨 막히게 어색했다.
왕, 왕!
신수가 두 부자 사이를 오고 가며 밝게 짖었다.
적호나 김신록이 민망함에 백호 쪽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지만, 백호는 그 둘을 내버려 두고 결계의 경계, 인줄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인줄을 넘자 공기 중에서 피 냄새가 희미하게 흘렀다.
김신록이 뒤처리는 말끔하게 해 놨지만 흘린 피가 많다 보니 혈향이 다 가시지는 않은 듯했다.
“으……! 크윽……!”
김신록이 한 모진 고문에도 조금도 입을 열지 않았던 흉내꾼은 백호를 본 순간 몸을 크게 떨고 입을 뻐끔거렸다.
“…….”
백호는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흉내꾼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일’도 있었으니 ‘그 반대의 일’도 있을 법하지.’라는 발언을 했다고 들었다.”
조의신이 백호의 힘을 사용했을 때 흉내꾼이 뱉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허공에 손짓했다.
카앙!
검명이 짧게 울린 후, 백호의 손에서 검붉은 손잡이의 대검, 웅렵조(熊獵爪)가 나타났다.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신인과 호족, 외적과 웅족이 전쟁을 치렀을 때.
최전선에서 몇 번이나 흉내꾼에게 굴욕감을 맛보게 하고, 그 무위에 대한 갈망과 차마 표현할 수 없는 동경을 품게 만든 대검이었다.
흉내꾼이 제 동족을 도륙한 웅렵조를 홀린 것처럼 보고 있었다.
“그 뜻을 말하라.”
백호는 웅렵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흉내꾼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 네 수장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