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가호의 의미 (7)
〈해당 캐릭터의 광림, ‘제의(祭儀)기구 소환’을 사용합니다.〉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에서 사망한 무녀 후보생은 그야말로 무녀에 걸맞은 광림을 가지고 있었다.
제의(祭儀) 기구 소환.
말 그대로 의식에 필요한 도구를 불러내는 광림이었다.
이 세계의 그 무녀 후보생은 아직 17세가 아니라서 광림도 못 쓰고 있겠지만.
파아아아……!
플레이어의 궤적에 이어 제의 기구 소환의 발동으로 수많은 무구(巫具)가 떠올랐다.
쌍골죽(雙骨竹)으로 만든 횡적(橫笛), 녹여 낸 방짜를 무명천으로 연결한 제금 같은 무악기(巫樂器)부터 산가지가 가득한 산통, 축성된 생명주(生明紬)실로 엮은 가사와 고깔까지.
무수한 제의 기구 중, 벽사의 제의 기구인 무선(巫扇)을 펼쳐 들었다.
파앙!
100개에 가까운 부채의 살이 전부 펴지자 태양과 달 사이에 그려진 용이 보였다.
백호와 더불어 벽사의 영물로 꼽히는 청룡을 본뜬 푸른 용 그림이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벽사(辟邪)’를 사용합니다.〉
일월청룡선(日月靑龍扇)에 이능파를 실어 장남욱이 가져온 캐리어를 향해 크게 휘두르자 그림을 뚫고 나온 푸른 용이 캐리어를 통과하다 사라졌다.
거대한 부채가 휘둘러졌지만 바람 한 점 흐르지 않았다.
이 부채가 날리는 것은 오로지 삿된 것뿐이었다.
“이건, 대체……! 평소 의신이가 띄는 이능파랑 형태가 완전히 달라!”
“무녀가 사용하는 벽사 방식이로군.”
장남욱은 ‘별 처녀의 눈’으로, 황지호는 눈에 황금빛 마력을 모아 내 벽사 행위를 지켜보았다.
벽사 스킬은 백호군도 가지고 있지만, 백호군은 대검으로 ‘삿된 것을 벤다’는 방식으로 벽사 의식을 치른다.
그러나 이번 벽사의 목적은 저주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단서를 잡아내는 것이었다.
삿된 것, 그 형태를 보려면 다른 방식의 벽사 의식이 필요했다.
“희미하지만 형태를 갖추었군.”
“내가 봤던 그 ‘저주의 씨앗’과 같은 형태야!”
황지호의 말대로 푸른 용 형태의 이능파가 입 한가득 씨앗을 물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자줏빛 점액질을 두른 저주의 씨앗이 번들거리고, 내가 부른 푸른 용은 점차 흐릿하게 사라졌다.
“뒤로 물러나도록.”
파앗!
저주의 씨앗을 확인한 황지호가 황금빛 마력으로 결계를 엮어 내기 시작했다.
황지호는 구경만 할 줄 알았는데 도와주기까지 할 생각인가 보다.
그래도 이번엔 황지호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결계는 안 쳐도 돼.”
황지호에게 그렇게 말하며 펼치고 있던 일월청룡선(日月靑龍扇)을 비어 있던 왼손바닥에 부딪쳤다.
촤르륵, 탁!
부채살이 완전히 접힌 순간, 무녀 후보생의 파생 스킬을 발동시켰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진령(鎭靈)’을 사용합니다.〉
무선(巫扇) 끝에 달린 푸른 비단과 청옥에서 농롱한 빛이 흘러나와 주변을 밝혔다.
파앙!
다시 부채를 펴 실체화한 씨앗을 향해 부쳤다.
바람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처음과 달리 빛을 띤 바람이 씨앗 쪽으로 쏟아졌다.
“조의신, 무엇을 한 거지?”
“진령(鎭靈)을 사용했어. 령(靈)을 달래서(鎭) 그 실체를 밝힐 거야.”
령(靈)은 단순히 신령이나 영혼, 귀신을 의미하지 않았다.
정기나, 영기, 영적인 존재를 모두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령(靈)은 저 씨앗 모양을 한 악의의 결정체에도 깃들어 있었다.
쉬이익!
푸른 빛에 휘감긴 씨앗의 점액질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점액질이 사라져 금이 간 씨앗의 본체가 드러난 순간.
파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씨앗 사이로 일그러진 얼굴 몇 개와 문양 하나가 연기처럼 떠오르다 사라졌다.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지만, 문양은 아는 거였다.
‘뒤틀려 있긴 했지만 탐욕의 마신, 아바리티아의 문양이야.’
저주의 씨앗이 완전히 정화된 걸 확인하고 광림을 해제하였다.
씨앗 가까이에 다가갔지만, 그 전에 황금빛 결계에 감싸인 씨앗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의신아, 방금 그거…… 뭔지 모르겠지만 굉장하다. 저 더러운 씨앗이 그렇게 깨끗하게 변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장남욱에 이어 씨앗을 제 앞으로 끌어온 황지호가 감탄을 터뜨렸다.
“완벽히 정화되었군.”
“방금 봤던 얼굴들 잊지 마. 저 씨앗이 품은 ‘악의의 기억’이니까.”
장남욱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끄덕일 때, 황지호가 툭 한마디 던졌다.
“뭐, 아는 얼굴도 있더군.”
“응? 저 중에 지인이 있다고!”
“TC 그룹의 인물이었다. 황명 그룹의 총수와도 면식이 있을 정도의 고위직에 재임 중이로군.”
황지호가 디바이스를 켜 사진 하나를 띄웠다.
기자의 인터뷰에 응해 취임사를 읊는 점잖은 중년 남성은 벽사의 의식 중 떠올랐던 얼굴 중 하나였다.
“……시후의 친척이야!”
그렇게 말한 장남욱이 이를 악물다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장남욱의 상식으로는 피가 이어진 혈육을 다치게 할 정도의 악의를 품는다는 게 어떤 건지 상상도 안 가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에 떠오른 문양은 탐욕의 마신, 아바리티아의 것이었어.”
“듣고 보니 그런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고 희미했는데 잘도 알아보았군.”
“마신? 마족이 섬기는 그 7대 죄악의 마신 중 하나 말하는 거지? 시후의 친척 말고도 상위 존재가 개입한 거야?”
“그건 아닐 거다. 상위 존재가 직접 개입했다면 그 정도의 부상으로 끝났을 리가 없지.”
그 말을 듣고도 장남욱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장남욱은 괴로운 얼굴로 캐리어를 바라보다 말했다.
“이 일은 어디에 알리면 좋을까? 경찰? 협회? 사관학교? 아니면 먼저 시후의 부모님?”
“아니,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는 내 말에 장남욱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이내 진정하고 말했다.
“……손민기 사건 때도 그랬지. 네 제안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왔어. 그때처럼 너한테는 뭔가 생각이 있는 거구나.”
장남욱의 눈에서 당혹감과 의심이 지워지고 신뢰감이 넘쳤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뭐라고 설득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이렇게 쉽게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나는 벽사 과정에서 씨앗이 숨어 있던 도시후의 개인 물품들을 체크하며 말했다.
“그때 도시후의 얼굴에 죽을 상이 보인다고 한 건 토족의 수장이야. 무려 사상(死相)이 떴는데 그 정도의 부상으로 끝난다는 건 이상해.”
“그랬었지. 이 정도로 끝났으니 그냥 다행이라고 여길 일이 아니었구나.”
“지금 체크한 물품들이 새로 들어올 때, 다시 상황을 지켜봐. 비슷한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 줘. 다른 물건으로 대체하고 나한테 가져오고.”
“그럼 그사이에 시후는 계속……!”
“계속 조금씩 다치겠지. 그래도 죽지 않게 할게.”
장남욱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남욱을 보며 황지호가 한마디 했다.
“달토끼는 죽음에 민감하다. 죽음이 어디까지 다다랐는지 모르겠지만 달토끼가 사상(死相)을 보았다고 하면 이 정도의 정화 작업으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어.”
황지호는 장남욱의 눈을 가리켰다.
“그 눈을 숨기고 사상(死相)이 뜬 인간을 지켜보는 게 도움이 되겠지. 죽음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닥치는지 알 수 없으니.”
“어, 안경에는 일단 프로텍트를 걸어 놨는데.”
도시후가 안경을 빼앗아 가는 장난을 칠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한 건 단순히 시력 문제 때문이 아니었나 보다.
“‘별 처녀의 눈’은 점점 그 빛이 강해질 거다. 그 정도의 프로텍트로는 별빛을 숨길 수 없어. 줘 봐라.”
“어?”
장남욱의 의문사 ‘어?’를 허락의 의미로 멋대로 해석한 황지호가 안경을 빼앗아 들었다.
황지호가 손가락 끝으로 안경테를 쓸자 마법진이 안경테 안쪽에 새겨졌다.
몇 번 황금빛으로 번뜩이다, 마법진은 보이지 않게 사라졌다.
“흠, 겉으로 태가 나지 않게 마력을 심으니 썩 효과가 좋지 않군.”
“야, 뭐 한 거야?”
“지금 상태에서 레벨 2단계가 더 올라도 어지간한 인간은 다 속일 수 있을 거다.”
황지호가 장남욱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별 처녀의 눈’을 쓰는 게 마음에 든 걸까?
황지호는 장남욱에게 안경을 씌우고 스킬 발동을 하게 하며 테스트한 후, 마법진을 보강하기도 했다.
장남욱은 얼떨떨해 보였지만 ‘의신이의 친구는 좀 이상하긴 하지만, 굉장하구나!’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도시후와 저주의 씨앗에 대해 이야기를 잠깐 하다, 시간이 늦어 해산하기로 했다.
“미로 정원 너머의 본채의 출입은 허락하기 어렵지만, 묵고 가겠다면 여기에 있는 별채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장남욱이 꽤 마음에 든 건지 황지호가 그렇게 제안했지만, 장남욱이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께 의신이랑 좀 얘기하다가 돌아간다고 말씀드렸어. 가야 해.”
“그래? 그러면 정문 앞까지 비서를 붙여 주지.”
“아, 나도 같이 나갈게.”
내가 장남욱을 안내할 테니 굳이 비서를 부를 필요가 없다고 전하려 했지만.
“조의신, 너는 여기 남도록.”
황지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 * *
피 냄새가 더 짙어졌다.
“내 질문에 답하면, 나도 답하겠다.”
“네 놈이 무언가를 요구하고 거래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백호의 싸늘한 일갈에도 흉내꾼의 입은 다시 열렸다.
“나는 네 놈이 유희에 눈이 멀어 진명을 분실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백호, 네 진명은…….”
진명이라는 단어에 흉내꾼의 살을 다시 저미려던 백호의 손놀림이 멈췄다.
“……가호를 내리는 데에 쓴 것이냐?”
* * *
오늘은 황지호가 호의를 베푼 게 많으니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기도 하고.
‘뭐부터 물을까.’
물어볼 게 많았다.
황지호가 장남욱에게 호의를 베푼 건 고마운 일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장남욱을 저택 앞까지 배웅하며 돌아오는 길에 황지호에게 물었다.
“너 이제 네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어?”
반 아이들을 상대할 때도 그렇고, 오늘 장남욱한테 한 것도 그렇고.
처음과 달리 이 노친네는 자기가 호랑이라는 걸 숨기려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럴싸하게 10대 말투도 쓰면서 흉내도 잘 내고, 나 때문에 의심받는 게 싫다고 말도 놓게 했는데.’
입학 초에는 다른 반 아이들처럼 ‘의신아.’라고 부르던 황지호가 떠오르니 몹시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숨길 이유가 있나?”
“1학기 초에는 안 그랬잖아.”
“이 몸이 인간 사이에서 진족이라는 게 들키면 귀찮아지지. 귀찮은 일은 싫으니까.”
“지금은?”
“들켜도 귀찮지 않을 것 같으니까.”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노친네가 변덕을 부리는 건가.
내가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때, 이번엔 황지호가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 조의신 너는 나의 힘도 쓸 수 있나?”
“아니.”
“단순히 힘을 복사하는 광림은 아닌 것 같군. 조의신 너는 환몽 경매를 부술 당시에 용족의 후예의 광림을 사용했지만…… 애초에 광림을 복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황지호는 생각에 잠겼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광림에 대해 이 이상 물어보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바꿨다.
“예전에 네가 한 말에서 걸리는 게 있었다.”
“뭔데?”
“적호가 검은 옷만 입게 된다는 건 네가 ‘알고 있던 일’ 중 하나였나?”
이전에 적호와 김신록을 중재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적호는 김신록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으면, 평생 검은 옷만 입으실 분이에요.
황지호는 그간 나의 정체에 대해 추리를 이어 가고 있으니, 그 말을 단순히 비유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
“……그렇군.”
황지호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그날 그 자리에 없었다면 김신록이 죽고, 그런 일이 생기는 건가 보군.”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어색한 침묵을 깰 겸, 이번에는 내가 질문했다.
“진족은 인간과 달리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하잖아. 그게 뭔지 알고 싶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