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96화 (196/925)

40. 가호의 의미 (8)

‘깊은 잠’은 이 세계에서 진족이나 후예가 맞는 최후 중 하나를 칭하는 말이었다.

퇴장하여 등장하지 않는 진족은 죽거나 깊게 잠든 것으로 묘사되곤 했다.

천신과 신인을 소멸시키려다 일을 그르친 진웅팔선 중 셋이, 게임 속에서 염준열의 복수에 실패하고 가호를 잃은 청룡이 그리고 호족의 옛 우두머리 은호가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깊은 잠이라…… 인간 사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겠군. 너는 어떻게 알고 있지?”

“식물인간이 되었거나 가사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어.”

“그건 신체 기능의 문제로 발생하는 거다. 식물인간은 뇌 손상으로 인해 운동 기능을 상실한 것을 의미하고, 가사 상태는 생리적 기능의 약화로 맥박과 호흡이 한도에 가깝게 멎어 죽은 것처럼 보이는 상태니까. 진족이나 후예가 깊게 잠드는 것과 달라.”

미로 정원 너머 본채를 향해 걸으며 황지호가 말을 이었다.

“진족과 후예, 인간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태어나는 방식이었다.

진족은 신화나 전설, 픽션 같은 근원을 필요로 했다.

‘후예는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태어나. 황지호가 원하는 답이 아닐 거야.’

그러면 힘일까?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광고만 봐도 강한 담임 임연화는 진족 급의 힘을 과시하고, 제갈재걸과 함근형, 공청훤도 그에 밀리지 않았다.

거기에 최근 부임한 명예 교사들과 염방열 같은 최정상급 이계 공략 팀의 플레이어까지 고려하면 힘은 진족, 후예와 인간을 구분 짓는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어떤 결론에 다다랐다.

“진명(眞名)의 존재 여부.”

“훌륭하다, 조의신. 정답이야.”

황지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인간은 언제든지 이름을 바꿀 수 있지. 하지만 우리는 달라. 여러 개의 이름을 쓰더라도 결국 진명(眞名)은 하나뿐이다.”

진족은 진족으로서 생을 부여받는 순간에, 후예는 힘을 자각하는 때에 자신의 진명(眞名)을 알게 된다.

존재의 근원, 힘 그 자체를 의미하는 진명은 인간과 진족과 후예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진족과 후예의 혼은 아주 불안정해. 후예는 진족보다 비교적 안정적이긴 하지만 언제든 그 혼이 육신을 떠나 버릴 수 있어. 그 혼과 육신을 잇는 쐐기가 진명이다.”

신화와 허구 속에서 탄생한 존재인 그들을 이 세계와 그들의 육신 안에 묶어 두는 건 그들의 진짜 이름이었나.

‘그러면 진명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지?’

진명을 상실하고, 게임이 종료되는 순간까지 진명을 찾지 못한 백호군이 떠올랐다.

게임 속에서 백호군은 천신의 시련을 통과하여 ‘천신의 진노’ 디버프를 지우지만, 진명만큼은 되찾지 못한다.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마지막까지 싸운 거구나.’

그럼 백호군의 진명은 대체 어디로 간 건가.

황지호가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혼이 육신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상태를 ‘깊은 잠’이라고 한다.”

황지호의 설명은 끝났지만, 뭐라고 코멘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입을 다문 사이에 미로 정원을 넘어 본채 앞까지 도착했다.

저택 현관이 보이자 황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 진명이라는 쐐기가 있어도 은호처럼 심각한 데미지를 받아 혼이 떠나 깊게 잠드는 진족이 있고, 백호처럼 진명을 분실해도 문제없이 깨어 있는 진족도 있지.”

가벼운 어조와 달리 황지호의 눈에는 수심이 어려 있었다.

“그 떠난 혼은 어떻게 돼?”

“알 수 없다. 깊은 잠에 빠져서 깨어난 진족은 없으니까. 후예가 잠든 경우는 거의 없었고.”

“깨어난 사례가 한 번도 없어?”

“내가 알기로는 없다.”

잠시 말을 멈춘 황지호가 짧게 덧붙였다.

“육신이 현계에 남아 있는 한, 윤회의 굴레를 넘어서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 말을 역으로 말하면 옥토연 같은 가호가 없는 한, 육신도 사라지면 그대로 죽는다는 뜻일 거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깊은 잠이란 인간과 존재 방식이 다른 진족과 후예의 혼이 육신을 떠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더 궁금한 게 있나?”

윤회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려 할 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 멀리에서 적호와 김신록, 두 부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여전히 어색해 보이지만, 어쨌든 대화는 하고 있나 보다.

“황호, 조의신을 초대한 겁니까?”

“안녕하십니까.”

황호에게 인사한 김신록의 시선이 나한테 멎었다.

저번에 김신록의 흑역사를 호족들과 용제건 앞에서 공개하고 나선 한동안 보지 못했었다.

“조의신 군, 지금은 조금 늦은 시간입니다만, 외박계는 내고 왔습니까?”

그 모습은 사람 좋은 지익회 고문의 모습 반, 얼마 전 가족과 친구 앞에서 흑역사를 까발려져 욱한 후예의 모습 반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궁금했던 사항의 대부분을 해결했기 때문에 개기지 않고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답했다.

“아뇨, 외박계를 내지는 않았어요. 이만 돌아가겠습니…….”

“하하하하! 김신록, 저번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거냐? 조의신에게 심술부리지 마라. 은광고 기숙사 규칙 중 외박계 제출은 필수가 아니라 단순한 권장 사항이 아니더냐.”

황지호가 그렇게 내 말을 끊으며 처웃자 김신록이 주뼛주뼛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김신록은 정말 저번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건가?

앞으로는 기숙사 규칙을 어기지 않도록 더 주의해야겠다.

“……오늘은 제가 직접 술안주를 만들어 대접할 생각이었습니다. 조의신 군께 술을 권할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김신록은 날 기숙사로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저 태도를 보니까 찍힌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김신록의 미묘한 태도를 보며 황지호는 또 처웃었다.

다시 기숙사로 가겠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라서 결국 나도 본채까지 가게 되었다.

“의신이 오빠, 안녕하세요!”

“황호 님 말씀이 사실이었구나! 형, 어서 와요.”

“의신이 형이다.”

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지, 매우 졸려 보이는 후예들은 비실거리면서도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올무는 자는 중인 걸까?

아니면 백호군과 산책이라도 하는 중인 건지 둘 다 보이지 않았다.

“신수는 백호와 있습니다. 곧 돌아오겠죠.”

내가 찾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 적호가 말했다.

부엌 쪽으로 향하던 김신록이 물었다.

“조의신 군, 무엇을 드시고 싶습니까? 재료가 있으면 좋아하는 걸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약 30분 후.

“조의신…… 드시고 싶은 걸 말하라 했더니 ‘올무도 먹을 수 있는 걸로요.’라고 말할 줄은 몰랐습니다.”

“조의신과 신수는 정말 사이가 좋군요.”

호랑이들이 뭐라 뭐라 하긴 했지만, 내 신경은 저 멀리서 열리는 현관문에 쏠려 있었다.

왕, 왕왕!

나의 천사가 내 존재를 알아챘는지 멀리서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올무는 천재답게 도움닫기 하여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저 작은 몸으로 이 높은 곳까지 뛰어오르는 게 너무나도 기특했다.

올무는 어서 칭찬해 달라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손에 머리를 비볐고, 나는 전력을 다해 올무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하고 천재적인지 말해 줬다.

“……조의신과 신수는 정말, 아주 사이가 좋군요.”

“신수가 정신 교란 계열 스킬을 사용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적호와 황지호가 그렇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왕!

올무가 짖는 쪽을 보니 백호군이 보였다.

올무와 백호군이 함께 나갔다고 들었는데, 백호군은 한발 늦게 돌아왔나 보다.

“백호,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전히 쓸데없는 소리밖에 하지 않더군.”

“너도 앉아라. 적호의 아이가 요리를 피로할 예정이다. 넉넉하게 만들라 전했으니 너도 반주와 함께 들고 가라.”

김신록이 조리실 밖으로 나온 건 은호의 후예 아이들이 전부 잠들었을 때였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김신록이 오토매틱 메이드의 보조를 받아 순금으로 된 뷔페 서버를 날랐다.

호랑이가 음각으로 새겨진 뷔페 서버의 커버가 눈에 띄었다.

“그럼 열어 볼까.”

오토매틱 메이드가 물러가고 김신록이 자리에 앉자 황지호가 손가락을 튀겼다.

황지호의 이능파가 실체를 가지고 뷔페 서버의 커버를 열고 모두가 그 내용물은 본 순간.

“하,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아들아…….”

“…….”

황지호는 처웃고, 다른 이들은 딱딱하게 굳었다.

굳어 있던 적호와 백호군의 시선이 김신록을 향했다.

“저, 저는 아닙니다! 이번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곶감이 들어간 메뉴는 곶감 수정과뿐이었는데. 제가 만든 요리를 가지러 가겠습니다.”

김신록이 변명을 늘어놓으며 백호군의 눈치를 보다 내뺐다.

한참을 처웃던 황지호가 겨우 진정하고 말했다.

“음, 산령이 오토매틱 메이드에게 조리 오더를 내리고, 음식이 나오기 전 바꿔치기한 것 같군.”

“……산령을 잡으러 가겠다.”

백호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후, 자리를 비웠다.

영문을 알 수 없어 황지호에게 물었다.

“왜 그래?”

“백호는 곶감을 싫어한다.”

뭐?

백호군이 가리는 음식이 있었나!

“호족 중에도 싫어하는 녀석들이 많지. 그저 호불호가 갈리는 기호품 중 하나인 곶감이 우리의 약점인 양 포장된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더군.”

곶감과 호랑이에 그런 연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백호군 성격에 이 정도로 대놓고 극혐한다는 건 좀 이상한데.

내 의문을 알아챘는지 황지호가 비화를 하나 풀었다.

“예전에 김신록이 백호에게 장난을 친 적이 있다. 폐관 수련에 들어간 백호의 식량을 전부 곶감으로 바꿔 버렸지. 1년 동안 곶감만 먹은 백호는 그 이후로 곶감을 더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백호가 산령을 상대로 엄격하게 지도했더니 심통이 났나 보군요. 백호가 싫어하는 음식을 이렇게나 준비하다니요.”

황지호가 곶감 음식으로 가득한 뷔페 서버를 보며 다시 처웃었다.

호족의 사고뭉치 김신록이 그런 사고도 쳤구나.

요약해도 그가 친 장난질을 설명하는 데에 며칠이 걸릴 만했다.

그 와중에 백호군이 머무는 저택에서 곶감 수정과를 만든 김신록의 정신력도 굉장했다.

“제 아들은 곶감을 좋아하니, 곶감의 맛을 백호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역효과가 났지만요.”

적호가 테이블을 가득 채운 곶감 음식을 보다 아들을 대신해 열심히 변명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황지호와 적호는 곶감을 그리 꺼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식탁에 남은 이들이 곶감 호두 말이, 곶감 생채, 곶감 무침, 곶감 카나페를 하나씩 맛보았을 때.

너덜너덜해진 산령과 함께 백호군이 돌아왔다.

김신록도 원래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다시 데우고, 메뉴 몇 개를 새로 만들어서 들고 왔다.

“자, 곶감 요리는 김신록의 앞쪽에 몰아줄까.”

“……정말, 곶감 수정과 외에는 제가 준비한 게 아닙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백호는 놀릴 보람이 있으니 저도 가끔 장난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적호는 아들 실드를 치는 건지, 백호군을 약 올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서툰 진족이니 아들과도 화해를 못 하고 긴 시간 헤맸겠지만.

“네 젊은 시절엔 ‘가끔’ 장난기를 발휘하는 정도가 아니었는데.”

황지호가 그렇게 덧붙였다.

적호도 설마 젊었을 때는 김신록 같은 사고뭉치였던 걸까.

황지호 저 노친네가 그랬다면 모를까 적호가 그랬다니 상상이 안 간다.

“……술이 달군.”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백호군이 한마디 했다.

김신록이 준비한 술병 전부 달큰한 향기가 나는 게 전부 단맛이 나는 술만 준비해 온 것 같았다.

곶감도 그렇고, 김신록은 단 걸 좋아하나 보다.

줄곧 백호군의 눈치를 보던 김신록은 변명하듯 말했다.

“제 술친구는 단맛을 싫어해서요. 혼자 먹자니 흥이 살지 않아서 좋은 술인데도 먹을 기회가 없었죠.”

“용제건이? 친구도 없는 놈이 우리 후예가 놀아 주면 뭐든 감사하게 먹을 것이지, 뭘 가리긴 가려.”

용제건은 친구가 없었나 보다.

그런데 술친구 운운했을 뿐인데 용제건 이름만 나오는 걸 보니 김신록도 친구가 없는 것 같은데.

“청호는 감주를 좋아했죠. 입이 짧은 편이었지만, 단술을 가져가면 남기지 않고 비웠던 게 기억이 납니다.”

“김신록은 스승의 입맛을 닮은 건가.”

청호가 김신록의 스승이라고?

청호는 태호권의 원류라고 들었는데, 그럼 김신록도 태호권을 배운 걸까.

“혹시 김신록 선생님도 태호권을 익히셨나요?”

“아닙니다. 제가 청호 님께 배운 건 역용술입니다. 태호권은 저랑 맞지 않아 몇 번 배워 보려 했지만 실패했죠. 제게 무(武)를 사사한 건 백호 님입니다. 대검술을 배운 건 아니지만요.”

태호권은 골격이 맞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고 들었는데.

호족의 후예여도 골격이 맞지 않으면 극복이 안 되는 모양이다.

김신록은 역용술을 사용하는 장면을 보여 줬다.

김신록이 얼굴을 한 번 쓸어 올리자, 적호와 비탄의 웅녀를 반쯤 섞어 둔 듯한 얼굴이 내가 알던 평범한 교사의 얼굴로 바뀌었다.

이능파의 흔적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게 감쪽같았다.

그걸 본 적호는 아들 칭찬을 한껏 늘어놓았다.

그렇게 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다.

“오늘 말해 두는 게 좋겠군. 다음 주부터 내 본신(本身)은 한반도를 뜰 예정이다.”

황지호가 폭탄선언을 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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