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국경의 밖 (2)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언론 홍보실 홍보 1팀 사무실.
사무실은 며칠째 긴장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도 최상석에서 반듯한 자세로 업무를 보는 상사를 본 부하 직원들이 술렁거렸다.
“홍 팀장님, 아직도 집에 안 가신 거예요?”
“세상에…… 대체 며칠을 연속으로 야근하신 거야.”
“임 팀장님도 죽어 나가던데, 요즘 그쪽 일이 많이 바쁜 건가.”
홍보 1팀과 규정 집행부에 동시에 속한 직원들이 안쓰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극히 일부 직원에게 밖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얼마 전 대영웅의 손주이자 위성 공학의 천재 송대석이 퇴원하여 위성 관리팀 산하 연구소에 입성하였다.
가뜩이나 바쁜 홍보 1팀의 업무에 송대석이 웹상에 공개적으로 올렸던 알고리즘과 소스의 흔적 제거와 정보 조작이 추가되었다.
정보를 퍼뜨리는 것보다 지우는 작업에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훨씬 많았기에 언론 홍보실 직원들은 거의 죽어 나갔다.
그리고 죽어 나가는 직원들 중 가장 많은 업무량을 소화 중인 게 홍규빈이었다.
빡!
그때, 사무실 한구석에서 골통이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억! 왜 때려요!”
“일해.”
정 사원과 윤 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 대리에게 딱밤을 맞은 정 사원이 항의했다.
“아, 지금 쉬는 시간인데요? 원래 좀 쉬면서 해야 능률도 오르고 그런 건데요?”
“10분 전에도 쉬었잖아.”
“10분 열심히 일했습니다만. 그리고 권제인 님의 영상을 보는 건 쉰다기보다는 일종의 영접, 신성한 행위, 삶의 기쁨과 일상이라고 분류해야 하는데요?”
말이 안 통한다고 판단한 윤 대리가 정 사원이 보고 있던 영상을 꺼 버렸다.
바다의 벽을 두고 기적을 연주하는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 사원이 아주 불만스러워했다.
“아, 전 여친한테 차인 걸로 아직도 꽁해 있습니까? 그래도 윤 대리님 대학 후배이자 직속 부하한테 풀면 안 됩니다! 하압!”
정 사원은 말하던 중 뒤늦게 본인이 매를 벌었다고 자각하였다.
그는 딱밤을 막기 위해 기합을 지르며 이마를 방어했지만, 그쪽으로는 공격이 오지 않았다.
대신 윤 대리는 정 사원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외근 나가자.”
“악, 싫습니다! 또 어디 이계에다가 처넣으려고 하는 거 다 압니다! 한창 바쁠 때 밖에 싸돌아다니면 안 되죠!”
“밖에서도 할 일이 있다.”
정 사원이 왁왁거리면서 반항했지만, 결국 윤 대리한테 끌려 나갔다.
“윤 대리님 요즘 많이 날카로운 것 같은데요. 정 사원이 워낙 깝죽거린 탓도 있긴 하지만요.”
“확실하지 않지만, 윤 대리를 찼던 전 여친이 홍보 2팀 박 팀장님이랑 사귀는 거 같아요.”
“대박. 윤 대리를 차고 박 팀장님이랑이요? 윤 대리가 좀 뻣뻣하긴 하지만 박 팀장님보다 더 잘 생기고 장래성도 더…….”
“사람 사귀는 건 모르는 일이죠. 박 팀장놈에게도 뭔가 장점이 있을지도 몰라요. 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주제가 바뀌어 홍보 2팀을 신나게 까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일부러 힘을 줘 주의를 끌기 위해 낸 소리 같았다.
“다들 일이 없습니까?”
홍규빈의 정중한 목소리가 플로어를 울리자 팀원들이 전원 입을 다물었다.
홍규빈은 평소처럼 말끔한 차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드레스 셔츠와 정장 바지에는 주름 하나 없었지만,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 밑이 퀭했다.
그 처참한 꼴을 본 홍보팀 직원들이 고개를 처박고 일하기 시작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다시 홍규빈이 자리에 앉았다.
‘휴가, 일정…… 안 맞을지도 몰라…… 선생님…….’
홍규빈은 홀로그램 화면으로 띄운 시계를 보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은광고 신문부의 출국 날짜가 임박하고 있는데 추가되는 업무도 있었고, 홍보 2팀의 박 팀장이 어깃장을 놓는 일이 늘어나 업무 진행 속도가 더뎠다.
그래도 홍규빈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
휴가를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홍규빈은 다시 업무에 임했다.
홀로그램을 노려보는 홍규빈의 모습에서 구질구질한 집념이 넘쳐 부하 직원들이 숨을 죽였다.
* * *
대체 뭐가 내 제자를 고민하게 만드는 걸까.
[나] 말해 봐.
[염준열]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냥 말해 보라고 했을 뿐인데 염준열은 기뻐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염준열] 이번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조 MC로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염준열 정도의 스타 플레이어라면 보조 MC 자리가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태까지 염준열은 시간을 크게 빼앗길 가능성이 있는 고정 출연 자리는 고사해 왔다.
TV에 얼굴을 자주 비추긴 했지만 CF나 인터뷰, 혹은 특별 게스트로 단타성 출연을 했을 뿐이었다.
[염준열] 평소 같았으면 바로 거절했을 텐데 기획 의도가 좋아서 망설여져요.
염준열은 자신이 출연을 제안받은 프로그램의 개요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전체적인 개요는 흔히 있는 공개 오디션으로, 가수로 데뷔한 경력이 없는 일반인들을 모아서 경연을 펼치고, 시청자의 투표를 통해 우승자를 결정하는 서바이벌 방식의 프로그램이었다.
단, 오디션 출연 대상자는 ‘플레이어의 재능을 가진 이’로 한정되어 있었다.
기존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플레이어들은 사전에 서류에서 탈락시키던 풍조와는 정반대의 시도였다.
[염준열] 성인까지 이능을 유지한 정식 플레이어, 전 국민의 15%는 플레이어와 관련이 없는 장래 희망을 이루기 어려워요.
[염준열] 권제인 선배님도 바이올리니스트의 재능이 그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다면 음악계에는 발도 붙이기 어려웠겠죠. 바이올린은 취미로만 연주하셨어야 할 거예요.
염준열의 말대로였다.
이계와 싸우는 플레이어들은 다른 꿈이 있어도 이루기 어려웠다.
장래 희망이 교사라면 플레이어 양성소의 교사가 되면 되었고, 군인, 경찰이 꿈이라면 플레이어 부대나 관련 부서에 지원하면 환영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체능계는 이야기가 달랐다.
플레이어는 법적으로 프로 스포츠 선수가 될 수 없었고, 노래나 연기를 하면 욕을 먹었다.
플레이어가 연예계에 얼굴을 내밀면 에너미와 대항할 수 있는 귀중한 재능을 버리고 딴따라가 됐다며 매국노 취급을 받고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다.
권제인처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리니스트 신동으로서 이름을 떨치고, 주변에서 그녀의 꿈을 지지하기 위해 헌신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권제인은 없었을 것이다.
‘예전 세계에서도 국가 대표급의 재능을 가진 스포츠 선수가 노래나 연기를 하겠다고 말하면 욕을 먹었어. 하물며 여기에는 국방이 걸려 있는 문제니까. 또 플레이어는 부와 명예를 얻기 쉬우니 장래 희망 운운해도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
장래 희망과 꿈을 취미 수준에서 즐기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 없는 플레이어도 많을 거다.
그리고 현대에 이른 지금, 플레이어에 대한 의식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이계 공략 참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고는 하나 플레이어인 성국언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권제인이나 미스터 그리그 같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음악가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인류에게 일상이 돌아오자 플레이어도 꿈을 꿀 기회가 생긴 것이다.
‘게임 속에선 엎어졌던 기획일 거야.’
게임 속 플마고 세계에서는 흑막이 일으킨 사고들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직후였으니 이런 기획이 나올 수 없었다.
비유하자면 초대형 산불이 난 직후에 소방관을 대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찍겠다 하는 꼴일 거고, 그딴 짓을 하면 뼈가 가루가 되도록 까일 거다.
‘잠깐. 2학기 때부터 1학년 0반에 등교하는 NPC 중에 오디션 프로그램을 언급하던 애가 있었는데…….’
아직 1학년 0반에 등교하지 않은 그 아이에 대해서 떠올리던 중, 염준열이 메시지를 더 보내왔다.
[염준열] 이번 오디션의 취지는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프로 팀에 들어가 플레이어가 되는 게 꿈이 아닌 분들도 계실 테니까요.
[염준열] 노래, 춤, 연기에 더 큰 소질이 있는 분들이 꿈을 접어야 하는 게 아쉬웠어요. 그분들의 꿈을 응원하고 싶어요. 이계 공략은 제가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요.
내 제자는 역시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예계 활동도 하는 스타 플레이어 중에 대중에게 호감도가 높은 건 염준열이니까. 그래서 부른 거구나.’
염준열을 보조 MC로 넣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염준열이 고민하는 이유도.
[나]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염준열] 저는…….
염준열의 성격이라면 잠을 줄여서라도 이번 기획에 참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민하다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얼마 전에 화보 사진을 보내며 했던 말 때문일 거다.
—이제 화보 촬영도 마쳤으니까 더 열심히 연습할게요!
그랬는데 갑자기 예능 프로그램의 보조 MC로 가면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가 되겠지.
그 바람에 착한 제자의 마음에 그늘이 생겼나 보다.
[나] 과제는 천천히 해도 돼. 시간이 나면 직접 만나서 과외도 해 줄게.
[염준열] 스승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그래. 응원할게.
[염준열] 보조 MC도 잘 해낼게요!
[염준열] (스탬프)
염준열은 마이크를 들고 기뻐하는 모습을 한 홍룡 이모티콘을 보냈다.
제자의 새로운 도전이 잘되길 바라며 디바이스 창을 닫았다.
곧 조찬 시간에 맞춰 설정한 알람이 울려 신문부원들이 일어나고, 밤을 지새운 용사들도 스트레칭을 하며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 * *
이계 충돌 이후, 한반도는 가장 강력한 지력을 띄게 되었다.
대부분의 진족은 한반도로 이동했지만, 여전히 각지의 전승을 이어 가며 남은 진족도 있다.
중국에 남은 대표적인 진족은 넷.
고대부터 ‘사령(四靈)’, 혹은 ‘사서(四瑞)’라고 불리는 신성한 동물이 그러했다.
첫째,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
용족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이동했으나, 무녀 몇 명과 함께 용궁의 입구를 지키기 위해 황룡이 대륙에 남았다.
‘황룡은 염준열과 그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한반도에 자주 오긴 하지만. 어쨌든 황룡이 남긴 남았지.’
둘째,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인수(仁獸).
사슴의 몸체와 소의 꼬리, 말의 발굽과 갈기를 가진 인수는 기린(麒麟)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셋째는 군주의 힘을 나타내는 봉황.
문헌마다 다르게 묘사된 탓인지 그 모습은 수시로 바뀌곤 했으나, 닭, 제비, 사슴, 학, 물고기, 원앙 등이 섞인 오색의 빛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었다.
‘기린하고 봉황은 암수 각각 한 개체씩만 있었는데.’
개체수가 극도로 적긴 했지만 기린과 봉황은 후반 스토리에 관여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등장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상태라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판단이 안 선다.
‘그리고 네 번째 진족은…….’
마지막은 장수를 상징하며 미래를 예지하는 거북.
거북은 게임 속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스토리와 큰 관계성은 없어 보이지만, 중국에 오게 되었으니 알아 두는 게 좋을 거다.
부장이 배부한 소책자를 읽으며 정보를 정리하는 사이,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놓고 내리는 짐은 없는지 다시 확인하렴.”
“넵!”
“네!”
오늘 오전, 공항에서 합류한 제갈재걸의 말을 착하게 들으며 신문부원들이 이동했을 때였다.
쓰촨성의 청두 솽류 국제공항 앞.
우리가 아주 잘 아는 한국인 집단이 보였다.
“제갈 쌤!”
“우 연 이 네 요.”
“보고 싶었어요!”
금찬솔과 왕찬솔이 우렁차게 외쳤다.
2학년 0반 일당들이 빠짐없이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