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99화 (199/925)

41. 국경의 밖 (3)

은광고 중앙 구역 총동아리회관, 미술부실 중 한국화 전용 화실.

민그린은 천연 안료를 조합해 색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미술부 비품으로 최상급 등황(藤黃)이 들어왔으니까 하엽(荷葉)색을 만들고 싶은데.’

민그린의 손에 곱게 개인 안료가 연잎의 색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녀의 머릿속에서 영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청랑호의 정경.

우산 너머로 보던 어두운 하늘과 빗물을 머금은 나뭇잎들.

감은 눈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 중 무엇부터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민그린 화백님.”

“…….”

밑그림은 무엇으로 그릴까.

붉은 나무 줄기의 적송(赤松)에서 떨어진 나뭇가지를 태운 그을음을 모아 만든 송연묵이 어떨까.

기름먹과 아교를 섞은 먹물도 괜찮을 것 같은데…….

“민그린 화백님!”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자 민그린이 공상 속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어……?”

“전화 왔습니다! 홍경복 화백님께서 말씀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민그린의 팬이었다는 2학년 미술부원이 밝게 말했다.

AR 글래스를 벗고 있던 탓에 솜인형이 아닌 사람의 모습이 보여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상대는 한 명뿐이었고, 잘 아는 목소리였다.

예전처럼 식은땀이 나거나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지도 않았다.

민그린은 금방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아, 사부님이 전화하셨다고 했지…….’

미술부원 쪽에서 시선을 돌려 앞쪽을 보니, 전화 수신을 알리는 홀로그램이 보였다.

민그린은 당황하여 고개를 꾸벅거렸다.

“저기, 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민그린과 한마디 주고받은 게 좋은지 미술부원은 방방 뛰다 밖으로 나갔다.

미술부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민그린은 전화를 받았다.

“사부님, 늦게 받아서 죄송해요.”

[아니다. 작업을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홍경복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전, 두 사제의 작품 30점 이상이 국립 현대 한국화 미술관의 리모델링 과정에서 바꿔치기당하였다.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져 작품의 회수가 진행되고 있었고, 홍경복은 그 정황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이번에 회수한 작품 목록을 알려 주마.]

비단잉어가 튀어 오르는 연못을 보고 그렸던 ‘꽃 비늘’.

송대석의 가족들과 함께 간 홍천에서 본 노을을 그린 ‘해거름녘’.

그 외에도 민그린의 열정과 추억의 결정체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기뻤다.

하지만 애타게 기다려도 홍경복과 민그린의 첫 작품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사부님, ‘이무기의 귀천’은요?”

[…….]

홍경복의 답을 기다리며 민그린은 회수한 작품의 수를 헤아리며 손가락을 꼽았다.

손가락을 몇 번 접었다 폈다 해 보니 계산이 끝났다.

두 사제의 모든 작품이 돌아왔는데, ‘이무기의 귀천’만이 없었다.

[아직 찾는 중이다. 곧 찾아 줄 테니 심려 말고 기다려라.]

“네…….”

[그럼 나도 곧 부실로 가마. 부원 아이들을 모아서 같이 저녁이나 먹자꾸나.]

민그린은 통화를 끊고 참았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행방을 알 수 없는 첫작품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민그린은 그럭저럭 견뎌 내고 있었다.

‘학교 다니기 전에 알았으면 계속 울었을 것 같은데.’

등교를 시작하면서 민그린의 세계는 크게 변화하였다.

‘이무기의 귀천’도 소중하지만, 그 외에도 소중한 게 늘었다.

미술부원들이 건네주는 인사, 아직 병원에 있다는 김유리, 퇴원 후 부쩍 바빠진 송대석…….

민그린의 머릿속에는 이제 그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젠 AR 글래스가 없어도 다닐 수 있는 곳도 늘었어.’

청소년 수련회 날을 경계로 민그린은 AR 글래스 없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갈 수 있는 곳이 늘어났다.

여전히 낯선 사람들의 악의가 두려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상대적으로 무서움이 덜했다.

‘대석이한테, 함근형 선생님께, 우리 반 아이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무서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뭔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민그린은 벼루 옆에 가지런히 놓인 AR 글래스를 바라보며 좀 더 용기를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부님과 미술부 사람들하고 저녁 먹을 때…… 안경 벗고 먹어 봐야지.’

후드를 벗는 거까지는 어렵겠지만, 오늘은 AR 글래스가 보여 주는 솜인형 대신 미술부원들의 맨얼굴을 봐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대체 어떻게 온 거예요?”

설마 모든 노선의 비행기 티켓을 사 둔 건 아니겠지.

제갈재걸이 2학년 0반 선배놈들에게 둘러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맨 뒤에 서 있던 금찬솔과 왕찬솔이 턱을 쳐들며 말했다.

“전세기를 수배해서 따라갔다.”

“신문부 부장이 어찌나 유난을 떨었는지, 일정 확보하기 너무 어렵더라!”

비행기 티켓을 전부 사는 것보다 비현실적인 말이 나왔다.

학생이 전세기를 수배했다고?

이카로스 오너의 딸 금찬솔과 세계 5대 명품 브랜드 ‘느루’를 산하에 둔 기업가의 아들 왕찬솔의 재력을 생각하면 어렵지는 않겠지만.

“그래, 금액 맞추느라 힘들었어. 생각보다 비싸더라. 그 돈 벌려고 계속 이계 공략했어.”

“학급 운영비가 생각보다 짠 것 같음. 황명 재단은 돈을 더 풀 필요가 있음요!”

아무리 황명 재단이 학생에게 돈을 퍼 줘도 교사 따라다닐 용도의 전세기 대여 비용은 안 대 줄 텐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저 두 선배놈은 집안의 힘도 빌리지 않고 전세기를 빌렸나 보다.

자신들만의 힘으로 제갈재걸과 여행을 가겠다는 엄청난 집념이 느껴졌다.

좌절한 얼굴의 부장과 부부장을 보며 1학년 부원이 물었다.

“왜 2학년 0반 선배님들은 신문부에 들어오지 않은 거예요?”

“저 미친 자들은 1학년 때 그러려고 했어.”

2학년 선배가 0반 선배놈들의 과거사를 들려 줬다.

1학년 0반 입학 시절부터 저들은 비범하게 맛이 가 있었다고 한다.

덤으로 ‘교사는 모두 적’이라는 지극히 문제아스러운 인식도 갖고 있어 제갈재걸에게도 무지막지하게 개겼다고 한다.

지금 저 꼴을 보면 대체 어떤 식으로 개겼는지 짐작도 안 간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1학년 부원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저 선배들이 제갈 쌤한테요?”

“어마어마했지.”

“제갈 쌤이 얼마나 강한 분인지 실감했어.”

“0반 담임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싶더라.”

신문부 선배들이 제갈재걸과 기념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빠진 0반 선배놈들을 보며 아련하게 말했다.

은광고의 혁혁한 0반의 전설 속에서 최강 최악의 악동이라는 타이틀은 괜히 차지한 게 아니구나.

갑자기 선배들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 참고로 그 ‘지옥의 한 달’은 쟤들 앞에서 말하면 안 돼.”

“그래. 그 얘기하면 쟤들 진짜 찐으로 처우니까 앞에서 말하지 마. 저것들도 제자라고 쟤들이 처울면 우리 제갈 쌤 마음이 아프잖아.”

‘지옥의 한 달’이라고 표현하지만 2학년 0반 놈들은 개학한 지 4주가 좀 안 됐을 때 함락된 모양이다.

제갈재걸의 참된 인성에 넘어간 0반 선배놈들은 4월 1일 만우절에 제갈재걸 모아이를 만들기까지 했으니까.

“그렇게 제갈 쌤을 따르면서 덜 지랄스러워지긴 했는데, 갑자기 신문부에 들어오겠다고 개난리를 친 게 문제였어.”

“담임으로 모시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봐. 작년 부장 선배가 걔들이 입부 신청서 내민 거 보고 스트레스받아서 탈모 올 뻔했대.”

다행히 신문부에 닥칠 비극은 제갈재걸이 막았다.

제갈재걸은 ‘진지하게 신문부 활동에 임하는 아이들에게 민폐다.’라면서 혼냈고, 그간 지은 죄가 많은 0반 선배놈들이 알아서 기며 사건이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거래를 하러 왔다. 신문부 부장!”

실컷 사진을 찍은 2학년 0반을 대표하여 금찬왕찬이 이쪽으로 왔다.

“아, 거래는 무슨 거래야! 너희들은 한국으로 좀 가!”

“싫다!”

“거절한다!”

그 이후로 금찬왕찬과 신문부의 부장과 부부장이 옥신각신했다.

말싸움이 5분이 넘도록 끝나질 않자 제갈재걸이 한마디 했다.

“……미안하구나.”

“제갈 쌤 잘못이 아니에요!”

“제갈 쌤 잘못이 아닌데요?”

이 말에 부장과 금찬솔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제갈재걸은 2학년 0반 쪽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난입해 온 너희들을 대신해서 신문부 아이들에게 사과한 거란다.”

“네?”

“헐…….”

제갈재걸의 말에 전원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정은 신문부가 몇 달 전부터 기획해 온 취재 여행이야. 여태까지 전례가 없었던 한중일 청소년 교류회의 전초이기도 하고. 아무리 우연히 마주쳤다고 해도 중요한 취재 일정을 바꿀 수는 없어.”

제갈재걸의 말에 저마다 찔리는 게 하나씩은 있는 이들이 뻘쭘한 얼굴을 했다.

신문부원들은 취재 외에도 제갈재걸과 해외여행을 즐기겠다는 사심이 있었고,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말한 ‘우연히 마주쳤다’는 말은 그냥 대놓고 하는 개소리니까.

양심에 찔린 두 집단은 민첩하게 태세 변환을 하여 협상에 들어갔다.

어쨌든 2학년 0반이 갑자기 치고 들어 온 데다 제갈재걸이 사과까지 했으니 협상전에서는 신문부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협상의 결과, 2학년 0반은 ‘다음 취재 여행은 방해하지 않겠다.’라는 내용의 각서와 이카로스 숙박권을 또 내놓고, 신문부는 2학년 0반의 취재 여행 합류를 허락하고 제갈재걸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양해를 해 주기로 했다.

“이제야 마음 놓고 관광을 하겠네.”

“갑자기 사람이 늘긴 했지만, 뭐…… 어제 이카로스에서 공짜로 잘 놀기도 했고.”

“시간 여유 두길 잘했다. 오늘 취재 일정을 잡았으면 좀 늦었을 수도 있어.”

“제갈 쌤! 저기 가 봐요!”

2학년 0반의 깽판이 끝나자 오늘은 예정대로 청두 관광을 즐기기로 했다.

판다의 고향으로 유명한 청두는 삼성삼도(三城三都)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삼성이 의미하는 것은 문화, 여행, 대회.

삼도가 상징하는 것은 맛, 음악, 전시.

전부 문화와 예술을 나타내는 만큼, 청두시 대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눈과 귀가 즐거웠다.

“청두의 다관은 나쁘지 않아. 들렸다 가 볼까.”

단체로 움직이는 일정이 끝나고, 자유 시간이 되자 황지호가 제안했다.

이동하는 사이에 다관을 몇 개 봐 두었는지 주저 없이 이동해 찻잎을 구매하고 가장 말끔한 좌석에 자리 잡았다.

황지호는 이 과정에서 디바이스의 통역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능숙하게 중국어를 구사했는데 과연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닌 것 같았다.

‘진짜 괜찮네.’

황지호가 눈여겨본 만큼 다관의 찻잎 라인업은 훌륭했다.

특히 철관음의 맛이 뛰어났다.

안시현에서 생산된 봄 철관음이었는데 향과 맛이 혀 위에서 은은하게 번져 여독이 절로 풀리는 기분이었다.

금황색의 탕색과 이국의 경치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시선이 느껴져 테이블 건너편을 보니 황지호가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조의신, 너는 차를 좋아한다고 했었지.”

“어, 왜?”

예전에 내 테이블 매너를 수상하게 여겼던 황지호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 관찰 결과를 말하자면, 미묘하군.”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미묘하다니.

“차를 싫어하지는 않아. 차에 대한 조예는 깊긴 해. 하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

“무슨 소리야?”

“네가 자진하여 차를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그랬는데 기내에서도 차 종류를 고르지 않더군.”

노친네의 관찰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걸 다 보고 있었나.’

예전에 체스 대회 뒤풀이 때나 기말고사가 끝난 기념으로 반 아이들과 음료 이벤트를 할 때처럼 마실 것을 고를 기회가 오면 나는 보통 탄산음료나 주스를 택했다.

캔 커피나 믹스 커피는 가끔 마시긴 했지만 차를 좋아하는 사람의 선택이라고 보긴 힘들 거다.

황지호가 없는 자리긴 했지만, 야구장에서나 에어 택시 안,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서도 그랬다.

솔직히 말하면 차보다 주스가 입에 잘 맞았고, 천성헌이 입학하기 전까지는 다도를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 밤에 시간을 비워 둬라. 만나러 갈 녀석이 있는데 너도 동행하도록. 가면을 써도 좋다.”

상대하지 않고 차를 마셨더니, 황지호가 알아서 화제를 바꿨다.

“누군데?”

“‘염제 신농’의 광림을 쓰는 인물이다.”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언급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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