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국경의 밖 (4)
적호가 저강렵의 갈래에 몸이 꿰뚫려서 돌아왔을 때, 황지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황명그룹이 섭외할 수 있는 건 삼황오제 중 농업, 의약, 약초의 신인 ‘염제 신농’의 광림을 쓰는 중국인 플레이어인데…….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고대 신화의 여덟 명의 군주, 세 황(皇)과 다섯 제(帝)를 칭했다.
이들은 하 왕조 이전의 중국 문명의 시초로 불리었으며, 훗날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자신을 칭하는 새로운 호칭으로 정한 황제(皇帝)의 어원이기도 했다.
이 신화 속의 여덟 명의 시조 중, 그리스 신화로 비유하자면 제우스에 해당하는 주신(主神) 황제(黃帝) 헌원 다음으로 중국인의 시조로 꼽히는 것이 염제 신농이었다.
‘게임 속 시나리오에서 삼황오제 중 여와와 복희는 개입을 했는데…….’
염제 신농은 매우 드물게 언급된 정도라서, 그 광림을 빌리는 중국인 플레이어에 관한 정보도 당연히 없었다.
강력한 광림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를 별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만나는 건 조금 걸리는 일이지만, 황지호가 옆에 있으면 위험하진 않을 거다.
“갈게.”
내가 그렇게 답하자 황지호는 만족스러워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그 플레이어를 직접 만난 적은 있어?”
“아니, 내가 한반도 밖으로 나서는 건 오랜만이다. 그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고 연락을 취한 적은 있지만.”
황지호는 한반도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호족의 수장이 한반도 밖으로 자주 나가는 건 그거대로 문제이긴 했다.
“적호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필요한 연줄이었으니, 이 몸도 신경을 썼지.”
적호는 무거운 벌을 짊어지고 있어서 부상을 치료할 방법이 한정된 상태다.
천신이 내린 벌을 상쇄할 수 있는 건 상위 존재의 힘을 빌리는 치유계 광림의 소유자뿐이다.
그러니 호족이 약초의 신이기도 한 염제 신농의 광림을 쓰는 존재와 연을 맺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황지호의 말을 들으니 의문이 더 커졌다.
여태까지 황지호가 보인 행보를 보면 태만한 시절에도 제 친우를 얼마나 아꼈는지 짐작이 갔다.
그런데 왜, 게임 속에서 적호가 죽은 뒤에 황지호는 스토리 상에 잠깐 나오다 만 걸까?
‘황지호 말고도 다른 호족들도 잠잠했어. 왜 백호군에게 협력하지 않은 걸까. 혹시 황지호는 사라진 시점에서 죽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내가 흑막이고, 호족을 제압하고 싶다면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해 보았다.
황지호는 온전한 힘을 가진 신화계 호족인 데다가 한반도 내에서는 분신을 움직일 수 있으니 처리가 매우 곤란할 거다.
그래도 많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황지호를 붙잡을 가치는 있었다.
‘황지호를 무력화시키고 손안에 두면 호족과 은광고를 접수하기 쉬워지겠지.’
황지호의 자리를 사전에 심어 둔 인사로 대체하고, 황지호의 목숨을 담보로 호족의 움직임을 묶는다.
그래, 내가 흑막이라면 황지호부터 노릴 거다.
‘마침 적호의 죽음을 계기로 황지호가 흑막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섰을 거야. 그걸 이용해서…….’
하지만 황지호를 잡을 수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 시기라면 아직 흑막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둘 수 있는 수가 제한되어 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스토리 라인에서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황지호를 잡은 걸까.
황지호가 천신의 가호와 지력을 동원해 싸우기 시작하면 도시 하나는 없어지고도 남을 텐데, 황지호가 사라지기 전후로 그런 조짐은 전혀 없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염제 신농이 그렇게 신경 쓰였나?”
잠시 동안이지만 삼황오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신 황지호를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대놓고 말할 수도 없고 현재 상황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으니,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호족의 수장이 직접 본신(本身)을 끌고 만나러 온 플레이어니까, 어떤 인물인지 신경 쓰여.”
“그자의 능력은 우수하지만, 이 몸이 직접 가야 할 정도로 높으시고 잘난 플레이어라기보다는 단순히 내 개인적인 흥미가 더 크지. 아, 연줄 말고도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확인하고 싶은 것?”
“플레이어의 중국 입국 절차는 비교적 까다로운 편이지. 이유를 아나?”
그 얘기는 나도 알고 있다.
중국에서는 김유리와 유사한 케이스가 몇 번 있었다.
상위 존재들의 과도한 사랑을 받는 플레이어에 의한 광림 폭주 사건이 중국에서만 몇 번이나 일어났었다.
대부분은 중국인 플레이어가 중심에 있었으나 두 번은 국경을 넘던 외국인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외국인에 의한 광림 폭주 사건으로 중국의 입국 심사는 상당히 까다롭게 변했다.
“광림 폭주 사건 말하는 거지?”
“그래. 광림 폭주 사건 중심에 있던 이들은 죽거나 이능을 잃었다. 하지만 단 한 명, 폭주 중에 광림 컨트롤 방법을 완벽히 익힌 플레이어가 있어.”
그런 플레이어가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중국에 오기 전 조사한 주요 이계 사건에 그런 케이스는 없었다.
“중국은 일본보다 더 엄격하게 정보를 통제하는 중이다. 플레이어 협회도 중국에서는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지. 플레이어의 유출을 국력의 유출과 동일시하고 있으니, 이런 정보가 알려지지 않는 것도 당연해.”
한국에서도 이능 관련 사건에 관해선 외부에 알리지 않고 덮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본과 중국은 더한 것 같았다.
“그 플레이어와도 이 몸이 직접 접선해 볼 계획이다. 잘 되면 김유리 건에 관해서 조언을 받을 수도 있겠지.”
황지호가 이렇게까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신경 써 주고 있었다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능력자 반장 김유리에게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자, 그럼 합류해서 저녁을 먹으러 가 볼까. 여기까지 왔으니 현지에서 파는 궁바오지딩을 먹고 싶군.”
“청두에서는 우샹이나 마라로 맛을 낸 토끼 고기가 유명하다는데.”
“먹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망할 달토끼와 연관이 있는 식재료는 입에 대고 싶지 않다.”
그 망할 달토끼가 만든 떡은 잘 먹으면서 토끼 고기는 안 되나?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황지호가 한마디 툭 던졌다.
“토끼 고기를 대체할 식재료는 많지만, 떡은 그렇지 않아.”
그 이후론 떡보 황지호의 미식 지론을 듣게 되었다.
진족의 가치관이 인간과 얼마나 다른지 실컷 느끼다 신문부원과 2학년 0반 선배놈들과 합류하였다.
* * *
황명호 대저택.
야심한 시각, 백호가 신수를 데리고 은영관에서 돌아왔다.
백호가 비릿한 피 냄새를 두른 것을 감지한 적호가 물었다.
“백호, 또 그 흉내꾼을 심문하다 왔습니까?”
“그렇다.”
“당신이 심문에 나서다니…… 그 흉내꾼은 먼 옛날부터 당신을 귀찮게 했었죠. 그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없다.”
백호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했지만, 적호의 의심은 멎지 않았다.
올해 만우절 사건 등을 계기로 웅족들을 잡아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과거 기나긴 반목의 과정에서도 웅족을 사로잡고 고문을 한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백호는 웅족 토벌 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나 그 이후의 일은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이렇게 구는 이유가 있을 텐데.’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끔 이 말 없는 친우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문의 성과는 있었습니까?”
“없다.”
백호는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신수가 백호의 발밑에서 종종거리며 애교를 부리자 표정이 아주 조금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눈이 평소보다 서늘했다.
“또 그자는 쓸데없는 말만 했습니까?”
“그렇다. 너나 그 아이 쪽은 어떻지?”
“저희를 상대로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비명도 지르지 않더군요.”
적호의 대답을 들은 백호는 몇 초간 묵묵히 있었다.
백호는 여느 때처럼 싸늘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오랜 기간 친우로 지낸 적호는 그의 감정을 조금 읽어 낼 수 있었다.
‘뭘 망설이고 있지?’
백호는 과묵했지만, 할 말은 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매우 온화한 범이 되었지만, 광오함으로 겨루면 황호에게 지지 않을 백호였다.
그의 눈에서 미약한 망설임을 읽어 낸 적호가 내심 경악하였다.
“적호,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저러는 건가.
적호는 긴장한 마음을 감추고 백호를 봤다.
“그자의 입에서 ‘진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일말의 망설임을 전부 버리고 마음을 굳힌 듯, 백호는 주저 없이 말했다.
“그자를 죽여 다오.”
* * *
저녁을 먹은 후, 기운이 넘치는 신문부원들과 2학년 0반 놈들이 또 기묘한 대결을 펼쳤다.
대결 종목은 신문부 2학년 선배들이 어제 밤새도록 달렸던 대전 격투 게임이었다.
“어젯밤 켠 김에 왕까지 달린 우리 신문부를 얕보지 마라!”
“그거 완전히 패배의 복선 같은 대사 아님?”
“그것도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 엑스트라 잡몹이 할 법한 대사를 하고 자빠졌네.”
“이거 0반 놈들 말이 맞다. 그냥 닥치고 콘솔 세팅이나 하셈요.”
2학년 0반은 통 크게 호텔 한 층을 빌렸고, 신문부와 협력하여 라운지를 빌려 거대 게임 룸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신문부와 2학년 0반의 구성원 대부분이 게임 대결에 엔트리했지만, 빠지는 소수의 인원도 있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저도욧! 선배님들, 응원합니다!”
내일 전력으로 취재에 임할 예정인 문새론과 어제 너무 달려서 지친 몇 명이 그러했다.
나는 아직 여력이 있긴 했지만, 어제 밤을 지새운 여파도 있고 오늘 밤에는 황지호와 외출을 할 예정이므로 약속한 시각까지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하하하하! 그럼 나는 관전해 볼까.”
“지호는 게임 잘해?”
“구경은 몇 번 해 봤다. 집에 게임을 좋아하는 녀석들이 있어서.”
은호의 후예들과 산령을 말하는 건가?
황지호는 이대로 게임 대결을 구경할 생각인가 보다.
떠들썩한 라운지를 뒤로하고 내가 배정받은 슈페리어 룸 1인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좀 자고, 황지호와 외출하고 돌아오면 게임 대결하는 거 구경해야지.’
짧게 생각을 마치고 눈을 감고 꿈 없이 잠들었을 때.
몽롱한 정신 속에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지르는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아악!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옆 방에 배정받은 문새론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판단한 직후 곧바로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복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만 문새론의 비명을 들은 게 아니었는지 황지호와 제갈재걸이 문새론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새론아? 무슨 일 있니?”
문 안쪽의 기척을 확인한 제갈재걸이 위험이 없는 걸 확인하고 물었다.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푹 자다 일어났는지 꼴은 부스스했지만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문새론은 뻘쭘한 얼굴로 문 앞에 몰려든 이들에게 말했다.
“아하하…… 죄송요. 어제 무서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더니 꿈에 나와서요!”
“악몽을 꾼 거구나. 의사를 부를까?”
무서운 꿈을 꾼 제자가 걱정됐는지 제갈재걸이 다정하게 물었다.
“전 괜찮아요! 그런 건 전혀 무섭지 않은데요. 아, 잠은 다 깼으니까 이제 놀래요. 될 수 있으면 사람 많은 곳에서! 아직 2학년 0반은 다 깨어 있죠? 신문부도 살아 있죠? 와, 다 같이 놀면 재밌겠다. 아침까지 같이 있고 싶다! 선생님도 게임 하실래요?”
무슨 꿈을 꾼 건지 몰라도 문새론이 겁에 질려 있는 티가 났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고 싶은지 헤드기어를 쓰고 게임에 몰두한 폐인들이 넘쳐 나는 라운지 쪽을 흘끗 바라봤다.
“그러자. 뭐 마시고 싶은 건 없고?”
“생수로도 충분해염! 아니, 제갈 쌤, 어디 가세요! 같이 가욧!”
문새론의 개꿈 소동이 진정된 후.
잠이 다 깬 바람에 나도 게임 관전에 합류하기로 했다.
개꿈 해프닝 탓인지 관전하는 이들의 대화 주제는 꿈이었다.
“나도 이계 처음 들어간 다음 날엔 무서운 꿈꿨었어!”
“아, 에너미한테 쫓기는 꿈은 플레이어들이라면 누구나 꾸지.”
“난 무서운 꿈은 별로 안 꾸는데. 이계 클리어 보상으로 초레어 아이템 먹는 꿈은 몇 번 꿨음.”
꿈을 꿔 본 기억이 없는 나는 한마디도 못 하고 듣기만 했다.
꿈 주제가 나오면 늘 할 말이 없어져서 곤란했다.
꿈을 자주 꾸지 않는 사람은 있었지만, 정말 한 번도 꿈을 꿔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성헌이가 나랑 비슷했는데.’
천성헌도 나와 비슷한 과였다.
나처럼 꿈을 아예 안 꾸는 건 아니었지만, 꿈을 꾸는 빈도도 낮았고 항상 같은 꿈만 꾸었다고 했었다.
“시간이 되었다, 조의신.”
다들 꿈 얘기에 질려 다시 게임 얘기를 꺼낼 때쯤, 황지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장하고 따라오도록.”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