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04화 (204/925)

41. 국경의 밖 (8)

신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나라의 기원, 시조의 탄생과 건국 과정을 신성화한 ‘건국 신화(建國神話)’.

영웅의 탄생과 성장, 성취를 그리는 ‘영웅 신화(英雄神話)’.

자연물이나, 문화적 현상의 기원과 유래를 설명하는 ‘해명 신화(解明神話)’.

사람들은 자연 신화, 천연 신화, 기술 신화로도 불리는 해명 신화를 통해 왜 하늘과 땅이 나누어져 있고, 왜 하늘에는 태양과 달이 있고, 인류는 어떻게 등장했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해명 신화 중 가장 많이 존재하는 것은 우주와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창세 신화(創世神話)’였다.

한반도에도 옛사람들의 고찰과 상상 속에서 탄생한 창세 신화가 무수히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창세 신화가 ‘창세가(創世歌)’였다.

창세가 속에서 천지를 분리하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든 미륵은 어느 지혜로운 쥐에게 불과 물의 근본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지혜로운 쥐가 말하길.

—미륵께서는 불과 물의 근본이 궁금하신가요? 제가 미륵께 그 근본을 알려 주면 제게 무엇을 주실 건가요?

지혜로운 쥐의 말에 미륵이 답하였다.

—이 세계의 뒤주를 내어 주마.

미륵의 제안에 응한 지혜로운 쥐는 금덩산과 소하산에 있던 불과 물의 근본에 관해 알려 주었다.

훗날, 창세가가 서사무가로서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이 지혜로운 쥐는 진족으로서 생을 부여받아 서족의 수장이 되었다.

오랜 시간 뒤주 속 낟알을 모으고, 밤말을 들으며 살아온 지혜로운 쥐는 스스로를 꾀돌이라 칭하며 인간 세계에 섞여 살고 있었다.

꾀돌이는 극단적인 인간 찬가론자로, 불완전한 인간이 품은 잠재 능력과 그들이 만드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사랑했다.

그는 자신의 밝은 귀를 이용해 극적인 삶을 살아 온 인간을 찾아 가호를 내리며 진족의 수명에 비하면 찰나같이 짧은 인간의 삶에 관여해 왔다.

그런 꾀돌이가 최근 빠져 있는 건 인간의 사상과 감성의 발현 형태 중 하나인 ‘패션’이었다.

꾀돌이의 우수함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유감없이 발현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수장님. 오너의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세계 5대 하이엔드 명품 패션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히는 ‘느루’의 한국 본사.

꾀돌이는 이곳에 오로지 제 디자인이 받는 평가를 통해서 입성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다가 올해 느루 전속 수석 디자이너로 부임한 ‘서돌’로서.

“꾀돌이 형! 사무실 들렀다는 말 듣고 왔어요!”

문이 열리자 왕찬솔이 기운차게 등장했다.

지금 등장한 왕찬솔은 한국 최고 명문고의 최강최악의 악동으로 유명한 학생으로, 새로 가호를 내릴 인물의 후보 중 하나였다.

현재 은광구를 지켜보는 ‘눈’의 연구로 연구실에 처박혔던 서돌은 한동안 디자인 쪽 업무량을 줄이며 사무실의 출입 빈도도 크게 줄인 상태였다.

비록 업무가 밀려 있었지만, 부와 재능 모든 것을 타고 났음에도 괴짜의 삶을 사는 왕찬솔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었다.

서돌은 웃으며 왕찬솔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야?”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왕찬솔의 말에 서돌의 마음이 크게 들뜨기 시작했다.

여태껏 왕찬솔이 청한 부탁들은 하나같이 재미있는 것들뿐이었다.

2학년 0반 사이에서 펼쳐진 배틀 로얄을 헤쳐 나갈 조언이라거나, 자신이 아끼는 인간 중 하나인 홍규빈의 은사가 입을 정장을 디자인하는 것 등이 그러했다.

왕찬솔의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서돌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부의 해외 취재 계획을 캐고 싶은데, 1학년 0반의 돌아이 황 씨라는 아이의 눈을 속이기 어려울 것 같으니 대신 정찰을 해 달라는 거구나.”

“넵! 예전에 태그 매치로 싸워 봤는데 그렇게 센 돌아이는 처음 봤어요! 저랑 금찬이를 처웃으면서 한 손으로 갖고 놀더라고요.”

왕찬솔은 황지호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서돌은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생각했다.

‘두 찬솔이를 한 손으로 꺾기는 쉽지 않을 텐데. 1학년 0반의 돌아이 황지호라고? 또 황명호 이사장의 친척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황명 그룹의 황씨 일가는 대부분 황호의 최측근과 그의 분신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드물게 인간을 입적시키는 경우도 존재했다.

몹시 재능 있는 아이를 입양했을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서돌의 생각은 달랐다.

‘황호가 올해 들어 의욕을 내기 시작한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행동이 활발해진 건 3월 이후였어. 한국의 학교 개학 시기, 1학년이라는 황지호의 입학 시기와 일치해.’

서돌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왕찬솔은 홀로그램을 몇 개 띄우며 말했다.

“금찬한테 부탁해서 이카로스 이스트 윙 최상층 주요 정찰 포인트는 확보해 놨음요! 아, 이게 그 돌아이 사진인데 얘는 조심해 주세요. 덤으로 이 후배님도요! 얘도 행적을 보면 보통이 아니에요.”

왕찬솔이 띄운 인물 사진은 황지호와 조의신의 것이었다.

두 사진을 본 서돌은 눈이 번쩍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둘 다 서돌이 주목하는 존재들이었던 탓이다.

‘황호! 무명의 초신성!’

서돌이 살살 웃기 시작하자 왕찬솔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꾀돌이가 살살 웃은 데에 이어 존댓말까지 썼다!

왕찬솔은 제 제안이 먹혔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대가로 준비해 온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금찬솔이의 초등학생 시절 비화를 풀겠습니다! 금찬솔이 비뚤어졌던 시절, 은광구의 모든 초등학교를 제패한 뒷골목의 패왕을 만난 적이 있는데…….”

서돌은 금찬솔과 이름 모를 패왕의 대격전을 들으며 존댓말로 말대꾸를 했다.

즐거운 계획을 세우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덕인지 머릿속에는 벌써 내년 봄 컬렉션에 내놓을 디자인과 영감이 넘쳐 났다.

‘모처럼이니 그 아이들에게도 새 옷을 보내 볼까요?’

서돌은 가호를 내릴 정도로 제가 아끼는 이들에게 좋은 옷, 특히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히는 걸 좋아했다.

권제인이야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잘 챙긴다지만, 주변에 챙겨 줄 인간이 없는 인물이 문제였다.

홍규빈의 경우, 몇 번 귀찮게 굴면서 ‘언제 네 은사를 볼지 모르니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라고 충고를 했더니 항상 잘 꾸미고 다니게 되었지만.

그러나 서돌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대충 입고 다니는 이들이 있어 늘 불만이었다.

‘왕찬솔이 부탁한 일을 마치고 나면 여름옷 몇 벌을 새로 만들어서 보낼까요? 내가 직접 찾아가면 다들 놀라고 짜증 나겠죠?’

서돌은 웃으면서 그의 가호를 받은 이들이 알면 기함을 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긴 결과.

한밤중 출국하려던 홍규빈이 걸려들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

홍규빈의 티켓을 본 서돌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티켓이 가리키는 행선지는 쓰촨성 청두시.

서돌이 이카로스의 이스트윙 외벽에 몸소 매달려서 확인한 신문부의 이동 경로 중 하나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은광고 신문부가 간 곳이네요?”

황호, 무명의 초신성, 금찬솔과 왕찬솔, 거기에 홍규빈까지 모인다니!

과중한 업무 탓에 스트레스가 한계에 달해 있던 서돌은 냉큼 말했다.

“저도 갈래요.”

*    *    *

호텔 로비에 서 있는 이들이 대부분 정색하고 있는 가운데.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건 왕찬솔이었다.

“꾀돌이 형! ……형이 저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 첫 제자를 데려온 거예요?”

왕찬솔이 말을 건, 황지호도 꾀돌이라고 부른 남자는 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왕찬솔이 준 예약 우선권을 사용해 주수혁, 맹효돈과 방문한 느루의 VIP 매장.

두 번째는 체스 대회에 우승한 후 2차로 황명타워에 입점한 케이크 뷔페에 들렀을 때였다.

“아뇨. 제가 따라왔답니다.”

“헉.”

“잠깐, 지금 존댓말 쓰신 거예요?”

꾀돌이가 살살 웃으면서 답하자 금찬왕찬이 더더욱 질색했다.

느루의 수석 디자이너, 서족의 수장 꾀돌이가 살살 웃으며 존댓말을 할 때는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저들도 잘 알고 있나 보다.

“안녕하세요, 제갈 선생님.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언론 홍보실 언론 1팀 팀장 홍규빈입니다.”

한편, 홍규빈은 정색한 얼굴을 어떻게 잘 펴고 평소대로 능글맞게 제갈재걸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 사건 이후로도 매번 만날 때마다 제갈재걸에게 저 소리를 하나 보다.

“압니다. 여기에는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제 제자들과 나갈 예정입니다만.”

제갈재걸은 엄한 표정으로 선을 그었다.

홍규빈에게 시간을 쓸 생각이 없다는 걸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으나, 제갈재걸의 태도에 굴하지 않고 홍규빈은 열심히 들이댔다.

“마침 우 연 히 제갈 선생님께서 여기에 계시니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우연히’라는 표현에 2학년 0반 전원의 얼굴이 동시에 썩어 들어갔다.

“우우우!”

“뭐래? 지금 우연이라고 한 거야?”

“아무리 한반도 밖에 나와 있더라도 한국어는 똑바로 사용해야지.”

“우연이 뭔 뜻인지 알긴 함? 우리말을 바르게 써라!”

어제 청두 솽류 국제공항에서 우연 어쩌고 하며 신문부원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2학년 0반 선배놈들을 떠올리니 극히 공감되는 말이었다.

2학년 0반의 야유가 쏟아지는 중에도 홍규빈은 생글생글 웃으며 제갈재걸에게 홀로그램 하나를 보여 줬다.

홀로그램의 내용물은 목우람과 관련된 것인지, 제갈재걸의 얼굴색이 걱정스럽게 변해 갔다.

“……이 학생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보호 중입니다. 아시다시피 중국 협회는 공안을 상대로는 힘을 크게 못 써서요. 제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 학생의 신원 보증을 할 플레이어를 둘 이상 요구하는 중입니다.”

“제가 가면 되겠습니까?”

“네. 제갈 선생님의 위명은 중국에서도 알려져 있으니까요. 은광고의 교사라는 직위도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갈재걸이 홍규빈과 함께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 보이자 2학년 0반이 허둥지둥 제갈재걸 옆으로 달라붙었다.

“잠깐!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갈래요!”

“신원 보증을 할 플레이어가 필요한 거죠? 저희도 플레이언데요!”

“이명 있는 애들도 많은데요!”

“어쨌든 플레이어가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우리 학교의 학생이 관련된 거 같으니 저희도 같은 학교 학생으로서 걱정되기도 하고요.”

“맞아요. 공안에서 또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모르잖아요. 스무 명이 넘는 플레이어가 가면 불만 없겠죠.”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상황 해결에 도움이 되는 말들이었다.

제갈재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민하다가 답했다.

“……말썽부리면 안 된다.”

“넵!”

“네에!”

홍규빈이 제갈재걸에게 보이지 않게 인상을 쓰자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보란 듯이 웃으며 홍규빈을 약 올렸다.

제갈재걸 처돌이들이 도긴개긴 기 싸움을 이어 가는 중에도 제갈재걸은 성실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나와 황지호는 호텔에 남기로 한 가운데, 협회로 가기로 한 제갈재걸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1학년 아이들에게 맡기고 가서 미안하구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부르렴.”

“네. 부장 선배님도 곧 일어나실 테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홍규빈과 제갈재걸,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협회로 떠난 후.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로비가 단숨에 조용해졌다.

휑해진 로비에서 꾀돌이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족의 수장, 꾀돌이라고 해요. 느루의 수석 디자이너직에 있어요.”

화려한 장식이 달린 피시마우스 라펠 재킷을 입은 꾀돌이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서돌’이라는 이름이 필기체로 한글과 영어로 멋들어지게 쓰여 있었다.

내가 명함을 받아 들자 서돌이 말했다.

“은광고 입학 실기 시험 때, 무명의 초신성이 보인 활약상은 잘 들었어요. 입학 후에 벌인 토벌들도 인상 깊었습니다. 고1에 벌써 그런 이력을 남기다니! 아, 그래도 당신의 성장 배경을 고려해 보면 가장 놀라운 건 체스 대회 우승 건이에요!”

서돌은 들뜬 얼굴로 붙임성 있게 떠들었다.

‘불길한데.’

계속 이어지는 칭찬 세례 그 자체도 듣기 떨떠름했지만, 꾀돌이의 악명을 생각하니 더 찝찝하게 느껴졌다.

열변을 토하던 서돌이 갑자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저기, 그래서 말인데요. 조의신? 저한테서 가호 받지 않을…….”

“꺼져.”

서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지호가 말을 끊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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