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국경의 밖 (9)
“삿된 것이 감히 내 눈앞에서 호족의 은인이기도 한 신역의 학생에게 수작을 부려?”
“너무하네요, 황호. 삿된 것이라니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요.”
서돌은 당당하게 스스로를 ‘삿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지호는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불길한 존댓말을 삼가라. 네놈이 그렇게 입을 놀릴 때마다 높은 빈도로 재액(災厄)이 닥쳤으니까.”
“네? 재액이라니요?”
“가장 심각했던 건 산천초목을 다 말려 죽인 그 돌림병…….”
“아, 그거요? 잠깐, 황호! 조의신 앞에서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당황스럽네요!”
서돌이 잘 세팅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네 놈이 뭔 짓을 했는지 자각이 있긴 한가 보군. 아직 네게 수치심이라는 게 남아 있었나?”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디에서 수치심을 느껴야 하죠?”
황호의 핀잔에 서돌은 한없이 떳떳한 태도였다.
“방금 가호를 준다고 제안했던 저의 너무나도 큰 위업을 갑작스레 말하면 조의신도 당황할 거 아니에요. 수치심이 아니라 겸허함이라고 표현해 주실래요?”
“……쥐구멍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언어 기능이 퇴화한 거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아직 정보는 적었지만 확실해진 게 있었다.
서돌은 돌아이었다.
황지호와는 다른 방향으로 맛이 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12지 동맹 회담에서 봤을 땐 다른 수장에 비해선 비교적 인간의 상식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잘 생각해 보면 스스로를 꾀돌이라 칭하며 마음에 드는 이를 스토킹하는 서족의 수장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첫인상으로만 상대를 판단해선 안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홍규빈과 2학년 0반 수준의 말씨름을 하는 두 12지 수장을 내버려 두고 전용 메뉴를 통해 허공에 내 상태창을 띄웠다.
〈‘조의신’의 인물정보를 열람합니다.〉
[이름] 조의신
[칭호]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무명의 초신성, 적벽괴도(赤壁怪盜)
[가호] (일부 로드에 실패하였습니다.)
[광림] (비활성화 중)
[상태] 정상
[종합 능력치] Lv.31
[스킬]
만물 사용 Lv.5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 Lv.4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 Lv.2
운명력 Lv.3
(일부 로드에 실패하였습니다.)
백호군과의 훈련을 전후로 크게 상승한 종합 능력치 레벨이 눈에 띄었지만,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가호 부분이었다.
플마고 게임 시절부터 유저를 괴롭혔던 ‘일부 로드에 실패하였습니다.’라는 로드 실패 안내문, 일명 일로실 버그 메시지.
게임 시절에는 시간이 흐르면 제멋대로 일로실 버그가 해결되는 경우도 있어서 방치해 뒀지만, 내 상태창의 일로실 메시지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조의신의 의사입니다. 황호가 뭐라 할 문제가 아니에요. 가호는 받아서 손해 볼 게 없잖아요?”
“가호의 부작용이 없는 게 아닌데.”
“조의신은 그릇이 커 보이니 큰 가호를 내려도 소화할 것 같은데…… 그래도 정신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범위는 제가 잘 조정할게요. 네? 저 가호 잘 줘요. 제 가호 때문에 미친 인간은 없어요!”
황지호와 서돌이 내 쪽을 봤다.
내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사양할게요.”
가호로 인해 정신이 공유되는 현상을 막고 싶은 것도 있지만, 가호란이 이런 상태에서 누군가의 가호를 받을 수는 없었다.
내 대답에 두 수장의 희비가 극명히 갈렸다.
황지호는 흡족한 얼굴로 서돌을 비웃었고 서돌은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을 하다가 매달릴 기세로 말했다.
“네?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주세요!”
“끈질기군. 그만 질척거리고 물러가라.”
“……뭐, 오늘만 날이 아니죠.”
서돌은 여전히 미련이 철철 넘쳐 보였다.
“그래서, 넌 여기까지 와서 뭘 할 생각이지? 조의신에게 가호를 내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네? 그거야…….”
서돌이 나와 황지호를 보며 환히 웃었다.
“밤 말고도 낮에도 여러분을 관찰하려고요.”
“꺼져.”
황지호의 엄포에도 서돌은 꺼지지 않았다.
* * *
플레이어 협회 중국 지부, 청두 사무소.
홍규빈은 중국에 도착한 이후, 몇 번이나 말을 바꾸는 현지 공무원, 공안과 교섭해 왔다.
제갈재걸까지 대동하니 남옥시인(藍玉詩人)을 알아본 일부 플레이어가 유한 태도를 취했으나 그뿐이었다.
‘뭔가 이상해. 10대 플레이어의 임시 신분증 발급 절차가 이 정도로 까다로울 리가 없는데.’
걸리는 게 많았지만, 홍규빈은 내색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웃으며 중국의 플레이어들을 상대했다.
해결의 실마리가 좀처럼 보이지 않아 홍규빈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 사람들한테 연락할까.’
금방 끝날 줄 알고 제갈재걸에게 도움을 청한 건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이 부른 탓에 제갈재걸의 해외 일정이 망쳐지는 건 마음에 걸렸다.
그때, 의외의 인물들이 교착 상태를 끝내 버렸다.
“제갈 쌤, 저희가 높으신 분들 불렀으니까 괜찮음요.”
“넵넵. 저희만 믿어요.”
“빨리 해치우고 놀러 가요.”
금찬솔과 왕찬솔이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홍규빈과 제갈재걸은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지만, 이미 2학년 0반 전원 두 콤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2학년 0반 학생들은 악동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질에는 갑질로 후려치는 게 강호의 도리잖아요.”
“마침 쟤 아빠 친구 중에 국무원(国务院)의 높으신 분이 있답니다.”
금찬솔이 왕찬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인대의 국무원이라 하면 중국의 실질적인 행정부가 아닌가.
국무원 산하의 부서가 아니라 굳이 국무원 자체를 언급한 걸 보면 상무회의에 아는 이가 있는 것 같았다.
‘왕찬솔의 집안이라면 이상하지는 않군.’
홍규빈이 그렇게 판단했을 때, 인맥 갑질을 한 학생은 하나 더 있었는지 이번엔 왕찬솔이 금찬솔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쟤 친척 중에 주췌(Zhuque) 콘체른의 이사회에 재직 중인 분이 있답니다.”
중국 이계 산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초대형 기업 연대, 주췌 콘체른.
주췌 콘체른은 이계에서 발굴되고 에너미가 드랍하는 광물과 직물을 비롯한 각종 소재의 가공, 희귀 아이템의 판매와 플레이어 장비 제작 등 중국의 이계 관련 사업 일체를 다루었다.
정부와의 끈끈한 관계를 바탕으로 중국의 이계 사업을 전부 독점 중인 주췌 콘체른의 존재는 플레이어 협회가 중국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금찬솔의 집안의 인맥을 고려하면 거기에 아는 사람이 하나둘 있어도 이상하지 않긴 한데, 친척이 있다고?’
홍규빈은 저 악동들이 전 세계 갑질 프리패스나 다름없는 수준의 인맥을 갖췄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저 인맥을 제갈재걸을 위해 휘두를 것이라는 확신과 자신이 나서서 갑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역시 우리는 최고인 듯.”
“최고인 우리 옆에 제갈 쌤이 있어서 완벽하기까지 한 듯.”
금찬솔과 왕찬솔이 하이파이브를 했을 때, 창구 너머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바로 태도를 바꾼 플레이어 출입국 담당관은 곧바로 목우람의 임시 신분증을 발급했다.
“제갈 쌤! 저희 잘 따라왔죠?”
“역시 갑질엔 갑질로 받아치는 게 짜릿하다니까.”
제갈재걸이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와중, 홍규빈은 임시 신분증을 받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일이 까다롭게 진행된 건 출입국 담당관의 변덕일까, 아니면 플레이어계의 국제 경향이 반영된 결과일까, 그것도 아니면…….’
홍규빈은 플레이어 협회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목우람의 사진을 봤다.
‘목우람 학생이 얽힌 탓일까.’
* * *
예상보다 늦긴 했지만, 제갈재걸과 그 처돌이들은 무사히 목우람의 임시 신분증을 받아 왔다.
2학년 0반은 홍규빈과 목우람을 당장 한반도로 보내고 싶어 한 것 같지만, 홍규빈은 고개를 저었다.
“우람이는 아직 눈을 못 뜨고 있어. 은광고 학생 수준의 잠재력을 갖춘 10대 청소년 플레이어야. 인사불성에다 이렇게 이능파 상태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국경을 넘는 건 위험해. 국경을 넘다가 사고가 나면 국제 문제로 번져.”
제갈재걸도 홍규빈의 말에 동의해 2학년 0반은 입을 다물었다.
그걸 지켜보는 호족과 서족의 수장들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홍규빈은 뭔가 생각이 있나 보군. 임시 신분증 발급이 늦어진 것과 관계가 있겠지.”
“그렇네요. 규빈이는 규정 집행부의 일로 ‘사람을 나르는’ 걸 많이 했거든요. 웬만한 상황은 혼자 제압하고 국경을 넘을 수 있을걸요.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
홍규빈이 나와 수장들 쪽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같이 움직이자는 거구나. 신문부의 일정이 끝날 때 같이 가는 게 좋겠지.’
홍규빈은 그저 제갈재걸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수장 둘도 같은 의견인 것 같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신문부는 오늘 낮부터 청두시의 플레이어 양성소를 방문하여 취재할 예정입니다. 맡기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네, 다녀오세요.”
“제갈 쌤! 저희는 같이 가도 되죠?”
홍규빈을 두고 간다는 말에 2학년 0반 놈들이 신나게 말했지만 제갈재걸은 고개를 저었다.
“중국의 플레이어 양성소는 출입 절차가 복잡해. 가볍게 방문하는 인원수를 늘리기 어려워.”
“그건 우리가 또 갑질을 하면 바로 해결할 수 있는데요!”
또 갑질?
신분증 발급 과정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지인분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렴.”
“어차피 오늘 한 번 지른 거 두 번 질러도 그게 그건데요!”
“제갈 쌤이랑 같이 가고 싶은데요!”
제갈재걸은 아우성치는 2학년 0반 선배놈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하며 조곤조곤 타일렀다.
“누군가의 힘을 빌리는 건 늘 대가가 따른단다. 호의로 한두 번, 그것도 너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배들을 위해 사용한 힘이라면 넘어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건 그렇지 않잖니. 너희가 나중에 곤란해질까 봐 늘 걱정이란다.”
제갈재걸의 말에 2학년 0반 놈들이 입을 다물었다.
제갈재걸에게는 거짓을 고할 수 없도록 토트의 가호가 걸려 있다.
그런 그의 ‘늘 걱정한다’는 말은 꾸밈없는 본심이니,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제자된 입장으로서 스승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닥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홍규빈 팀장님과 잘 지내고 있으렴.”
“네에…….”
“넵…….”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기운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홍규빈은 어딘가 감동한 얼굴로 제갈재걸을 보고 있었다.
2학년 0반을 다루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성품에 감동하는 건 당연하긴 했다.
“어…… 무슨 일 있었어? 사람이 늘었네?”
뻘쭘한 얼굴로 등장한 문새론을 시작으로 신문부원들이 뒤늦게 로비에 등장하고, 낮 일정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 * *
신문부의 낮 일정인 플레이어 양성소 방문이 시작되었다.
에어 버스에서 내린 황지호의 기분은 상당히 나빠 보였다.
묻지 않아도 이유는 짐작이 갔다.
염치없이 이 자리에 따라온 서돌 때문일 것이다.
“넌 왜 온 거냐?”
“전 남의 힘 빌리지 않아도 내 힘만으로 방문권을 따낼 수 있거든요.”
“자랑이다.”
“자랑이에요.”
대부분의 신문부원들은 ‘돌아이가 하나 추가되었나?’, ‘어디에서 본 얼굴 같은데…….’ 하며 반응했다.
예외는 둘 있었다.
문새론과 제갈재걸.
정보통 문새론은 서돌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았으나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제갈재걸은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일정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라고 말만 던지고 서돌의 동행을 허락했다.
‘첫 제자에게 가호를 내린 상대를 모를 리가 없겠구나.’
서돌은 홍규빈과 제갈재걸 사이에 얽힌 비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갈재걸을 선두로 플레이어 양성소 입구로 향할 때였다.
“물러나라!”
파아아아아……!
황지호가 제갈재걸 옆으로 달려가 결계를 펼쳤다.
의문을 표하기 전에 이능파의 격류가 느껴져 반사적으로 몸 전체에 이능파를 둘렀을 때.
폭음과 연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