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국경의 밖 (10)
“‘그분’이 또 네게 명령을 내렸다더군.”
긴 회랑을 걷던 나비령이 멈춰 섰다.
석모도 사건 이후 거의 보지 못했던 남자였다.
남자는 예전 ‘그분’으로부터 제물에 관련한 명령을 받았었다.
하지만 제물 조달은 실패로 끝났고, ‘그분’에 대한 경의와 예의를 표하는 걸 잊은 웅족들이 예정된 제물을 대신하였다.
‘그분’의 명령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이들이 벌을 받았지만, 제물 조달의 준비 단계에만 관여한 남자는 무사히 넘어간 것 같았다.
‘화를 면한 걸 감사히 여겨야 할 텐데, 저 꼴이라니.’
남자는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가구라도 부순 건지 이능파는 거칠고, 옷 소매는 뜯겨 있었다.
몹시 한심한 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비령은 곱게 웃으며 말했다.
“응, 과분하게도 나 같은 미물(微物)에게도 명을 수행할 영광을 주시고 계셔.”
“…….”
콰아앙!
남자의 주먹이 무겁게 벽을 때려 굉음이 울렸다.
그러나 ‘그분’의 힘이 곳곳에 미쳐 있는 이 건물을 남자가 파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흠집 하나 생기지 않는 벽을 보니 남자가 더 한심해 보였지만, 나비령은 티를 내지 않았다.
‘무서운 힘을 가져도 활용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니 무용지물이구나.’
남자를 한심함을 넘어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나비령은 남자를 달래기로 했다.
“이게 다 영물(靈物)인 네가 많은 가르침을 준 덕인걸.”
나비령은 벽을 때렸던 남자의 주먹을 양손으로 가만히 감싸 쥐었다.
남자는 아직도 제 분을 주체하지 못하는지 주먹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비령이 다정하게 손을 놀리자 곧 그 떨림이 가라앉았다.
“주제넘게 굴어서 미안해. 너희 영물이 미물인 나와 달리 강하다는 건 잘 알아. 그래도 네 몸을 소중히 여겨 줬으면 좋겠어.”
남자가 나비령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비령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척, 오로지 남자의 손을 쓸어 주는 것만을 반복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면…….”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비령은 말꼬리를 흐리는 남자의 품 안으로 조용히 걸어가 그의 어깨에 기댔다.
남자가 완전히 진정했을 때쯤, 나비령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분’의 말씀이 끝나면 만나러 가도 될까?”
남자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나비령은 입꼬리를 크게 올려 미소 지었다.
‘화가 날 때는 항상 혼자 있고 싶다며 축객령을 내렸지. 이제는 달라. 보기와는 다르게 경계심이 커서 오래 걸려 버렸네.’
얼핏 봤을 때는 나비령이 남자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남자는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나비령에게 정신적으로 기대고 있었다.
나비령은 남자의 변한 태도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나비령은 거짓된 아쉬움을 표현하기 위해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기댄 어깨에 힘을 잠시 주다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중에 봐.”
“…….”
무언의 배웅을 받으며 나비령은 ‘그분’이 계신 곳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멈춰 우뚝 서서 자신을 보는 남자를 돌아보기도 하며 걷기를 한참.
나비령은 거대한 문 앞에 멈췄다.
“기침하셨습니까? 부름을 받아 왔습니다.”
나비령이 그렇게 이르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끼이이…….
문 안은 한 치 너머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무저갱의 입구 같은 광경이었으나 나비령은 주저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팟!
나비령 뒤의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는 나비를 하나 불러냈다.
나비령의 손끝에서 태어난 이능파의 나비가 팔랑거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나비령은 어두운 바닥에 뿌려진 나비의 편린 조각을 밟으며 사뿐사뿐 나비를 따라 걸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점점 느려지다 움직임이 멎고 가루가 되어 산개했을 때, 나비령이 공손히 몸을 낮췄다.
“부르셨습니까. 뭐든지 하명해 주세요.”
나비령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둠 속에 퍼졌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어 보였던 어둠 속에서 권태감이 묻어나는 답변이 들렸다.
“보고를 듣지.”
나비령은 더더욱 몸을 낮추며 보고를 시작했다.
“당신께서 주신 많은 명령 중, 마지막 명령을 최우선하여 수행했습니다. 말씀하신 장소에 진(陳)을 새긴 나비를 배치했습니다.”
“무녀의 눈에 띄지 않았겠지?”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지정한 곳에 마침 영기를 머금은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진(陳)을 새긴 제 나비보다 무겁게 움직이는 나비도 많았습니다.”
나비령의 보고를 들은 이가 재차 물었다.
“전에 내린 명령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1년 전에 잡았던 타깃에 비해 훨씬 자아가 약합니다.”
“1년을 낭비했다. 서두르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나비령은 그 후로도 보고를 몇 개 더 올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올리고 물러간 후.
“전 나비령이 어쩐지 마음에 안 들어요.”
“웃는 게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에 안 들어요.”
“일 잘하고, 유용하고, 제 주제를 아는 건 마음에 들지만요.”
“저희한테 함부로 말을 걸지도 않고 우습게 보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긴 해요.”
숨소리를 죽이고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쌍둥이가 밝게 종알거렸다.
쌍둥이의 투정에 그는 답하지 않고 긴 손가락을 들어 들고 있는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요, 새로운 이름이 나왔다면서요? 왜 바로 처리하지 않죠?”
페이지를 넘기는 긴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대답을 해 줄 기색이 보이자 쌍둥이 소년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남자를 올려 봤다.
곧 나른하게 들리는 답변이 들렸다.
“여기에 있는 이름을 모두 내가 지울 필요는 없다.”
“네? 왜요?”
“여기에 나와 있는 이름의 주인들은 죽이거나 깊은 잠에 빠뜨려야 하지 않나요?”
쌍둥이 소년들이 납득하지 못하자, 남자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간혹 내 뜻과는 관계없이, 다른 연유로 그 이름을 지우려 드는 이들이 존재하니까.”
* * *
먼지구름 사이로 신문부 아이들이 우왕좌왕했다.
문새론과 2, 3학년들은 곧바로 급소를 중심으로 이능파를 둘러 대처한 것 같지만, 이능파 컨트롤에 미숙한 1학년생은 크게 동요했다.
콰콰쾅! 콰앙!
재차 폭음이 귀를 때렸다.
동시에 산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이능파가 황지호가 친 결계를 향해 쏟아졌다.
키이잉……!
이능파의 격류와 충돌한 황금색의 결계에 실금이 갔다.
급하게 쳤다고 하지만 호족의 수장이 직접 작성한 결계에 흠집을 내다니.
황지호가 결계를 치지 않았더라면 누군가는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예상보다 강력하군.”
황지호가 출력을 올리려는 듯 마력을 짜낼 때였다.
서돌이 어느 사이엔가 금이 간 결계 앞에 서 있었다.
“모처럼 휴일에 먼 곳까지 외출했는데, 짜증 나네. 어떤 새끼야?”
서돌의 목소리에는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툭 던진 반말에는 위기감 대신 숨기지 못한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서돌은 쥐색의 구슬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비어 있는 손을 살랑이며 우리 쪽에 인사하는 서돌을 본 황지호가 인상을 구겼다.
“너, 설마…….”
파스스스…….
쥐색의 구슬이 닿자 황금빛 결계의 색이 변하며 무너져 내렸다.
황지호가 혀를 차며 곧장 결계를 새로 짰지만, 그 틈을 타 서돌은 결계 밖으로 뛰쳐나가 먼지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제갈재걸 선생님! 저 사람 미쳤나 봐요! 이능압이 강한 쪽으로 뛰어가고 있어요!”
통찰계 스킬을 발동하고 주변을 살피던 신문부 부장이 서돌의 미친 행각에 깜짝 놀라서 외쳤다.
“저자는 그냥 못 본 척하렴. 지호야, 나도 도우마.”
“아, 부장 선배! 저기 넘어진 애 있어요!”
“어? 어…… 야, 괜찮아? 다친 애들은 없지? 무기 아이템 카드 꺼내!”
서돌의 정체를 아는 제갈재걸과 문새론이 말을 돌렸다.
우리 부장도 오늘 처음 보는 돌아이보다는 후배들이 걱정되었는지 넘어가 줬다.
잘 보이지 않는 저편에선 여전히 폭음이 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쪽의 전력은 차고 넘치니 문제없을 것 같지만 만약을 대비하기로 했다.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SR급 아이템 ‘선지자가 남긴 빛을 담은 롯드’를 실체화하고 스킬을 추가로 발동시켜 주변을 둘러봤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아직 낮인 탓에 밤에 비해 출력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이 주변은 훤히 보였다.
안정적으로 황금의 결계를 유지하는 황지호.
결계 위에 이능파가 어린 손을 뻗어 반듯한 한글 정자체로 ‘보호’라는 글씨를 쓰는 제갈재걸.
동요한 신문부원들을 다독이며 무기 아이템 카드를 쥔 부장과 문새론.
이들의 모습을 보니 긴장이 풀렸다.
‘큰 위험은 없는 것 같네.’
여차하면 내 힘이 드러나는 걸 감수하고 광림을 발동하고 롯드 대신 상보심금파를 실체화하려 했는데.
안광 스킬을 해제하고 상보심금파 카드를 아이템창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콰쾅! 퍼엉! 키이잉……!
서돌이 결계 밖으로 탈주한 이후에도 고밀도의 이능파가 몇 차례 충돌했다.
그러나 황지호가 결계를 단단히 굳히고, 제갈재걸이 수시로 언령 스킬로 결계를 강화한 덕에 위협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몇 분이 지나자 가깝게 들리던 폭음이 점점 멀어졌다.
“고생 많았다. 이사장님처럼 결계술에 능하구나.”
제갈재걸이 황지호를 칭찬했다.
제갈재걸이 혼자였어도 결국 학생들을 다 지켜 냈겠지만, 기습적으로 쏟아진 첫 발은 황지호가 아니면 막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황지호가 없었으면 첫 발에 누군가가 다쳤을지도 몰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부원들을 지켜 줬으니 나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잘했어.”
“이 정도쯤이야 별것 아니다.”
황지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결계를 거뒀다.
결계가 사라지자 이능파의 폭격이 휩쓸고 간 광경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여긴 괜찮지만, 아직 상황이 끝난 게 아냐.’
우리가 있는 정문 근처는 괜찮지만, 플레이어 양성소 주변에 설치된 사이렌이 일제히 울리는 중인 게 내부에서는 아직 상황이 종료되지 않은 듯했다.
입구 쪽 사무소 안으로 피신해 있던 양성소 소속 중국인 플레이어들이 연락을 취하거나 양성소 안으로 뛰어나가는 게 보였다.
“플레이어 양성소 안에서 누군가가 폭주를 일으킨 것 같구나.”
신문부원들이 전원 무사한지 하나하나 체크한 제갈재걸이 플레이어 양성소 문 저편을 보며 말했다.
“폭주요? 헐. 혹시 걔 아니에요? 작년 ‘총라이 산맥 사태’의 그…….”
문새론이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총라이 산맥 사태라면 나도 알고 있다.
먼 옛날, 촉나라의 방패라고도 불렸던 쓰촨성 북서쪽에 위치한 험한 산세의 총라이 산맥.
작년 이곳에서 일반 위성으로도 관측이 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폭주가 일어났다.
중국 공안이 대외적,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자연재해’였지만, 전 세계인 중에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어마어마한 잠재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의 존재를 공안이 은폐하기 위한 거짓 발표라는 추측을 필두로 지금도 온갖 루머가 도는 중이다.
“……어떡하죠? 일단 호텔로 돌아가는 게 좋을까요?”
신문부 부장이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문새론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일단 출입 허가도 받았겠다 당장 저 안으로 들어가 취재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인솔자의 입장인 제갈재걸은 고민이 깊어 보였다.
그의 성격을 고려하면 당장 달려가 구조 활동에 조력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인솔자로서 겁에 질린 신문부원을 두고 갈 수 없을 거다.
제갈재걸과 신문부원들이 의견을 나누던 중.
쉬익!
파공음이 들려 뒤를 돌아보니 서돌이 있었다.
“다녀왔어요.”
서돌은 좋은 일이라도 있던 것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황지호가 크게 인상을 썼지만 서돌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뭘 하다 온 거냐.”
서돌은 나와 황지호만 보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선물이에요.”
서돌이 내민 건 여기저기 탄 흔적이 있는 프로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팀 마크였다.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이 문양이 어느 팀의 것인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서돌이 내민 것은 세계 10대 팀 중 하나, ‘세 기사의 맹세’의 문양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