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국경의 밖 (11)
몇 분 전, 서돌이 황호의 결계를 파괴하고 뛰어나갔을 때.
기세 좋게 뛰어나간 서돌은 보기와는 달리 망설이고 있었다.
여전히 휘몰아치는 이능파의 격류 속, 청두시 플레이어 양성소 본관과 제1훈련소, 후문으로 이어지는 샛길로 나뉘는 갈림길 앞.
서돌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 소동의 근원은 이능압이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제1훈련소 쪽이긴 한데…… 후문 쪽이 신경 쓰여. 어쩌지?’
서족의 수장이자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린 서돌이지만, 근본은 어디까지나 ‘쥐’였다.
그것도 그냥 쥐가 아니라 서돌은 미륵에게 불과 물의 근원의 실마리를 전한 지혜로운 쥐이자 오랜 세월 밤말을 모은 쥐였다.
서돌은 무수한 밤말을 모아 온 쥐답게 이 혼란 속에서도 쥐 죽은 듯 기척을 숨기고 은밀히 행동하는 자의 움직임을 잡아냈다.
‘왜 이 구역에서 쥐라도 된 것처럼 살금살금 이탈하는 새끼가 있는 걸까?’
이 정도로 강력한 이능파의 격류 속에서 대피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서돌의 감각에 포착된 이는 뭔가 이상했다.
대피 중이라고 하기에는 움직임이 지나치게 은밀했다.
쉬이익! 콰쾅! 쾅!
충격파를 피해 서돌이 신형을 날렸다.
서돌이 생각하는 중에도 주변은 점점 쑥대밭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침 몸을 날린 쪽은 후문 방향이었다.
‘뭐, 미륵님이 인도한 길이라 생각하고 가 볼까!’
서돌은 그렇게 합리화하며 다시 스킬을 이용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은밀히 행동하는 상대와 달리 꾀돌이는 제 존재를 숨기지 않고 힘을 발휘했기에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서돌은 은신 아이템을 써 모습을 감춘 인물 앞에 착지하며 물었다.
“안녕?”
서돌이 그렇게 인사를 던지고 쥐색의 구슬을 허공 위로 들어 올렸다.
스스슷…….
구슬로부터 쥐색의 이능파가 흘러나와 은신 아이템을 뒤덮었다.
“……!”
파앗!
쥐색으로 변해 썩기 시작한 아이템을 급히 내던진 정체불명의 인물이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밋밋한 실루엣의 인물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은신 아이템과 함께 착용 중인 후드의 일부가 썩은 탓에 금색의 머리카락이 공기 중에 드러났다.
“뭐 하고 있었어? 왜 은신 아이템을 써서 도망쳐? 왜 숨어 다니는 바람에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해? 왜 내 휴일을 방해해?”
서돌은 뒤로 갈수록 매우 불합리한 의문을 표했지만, 그는 아주 당당하게 행동했다.
금발의 인물은 입을 다물고 몸을 날렸다.
그러나.
파앗!
서돌도 동시에 몸을 날려 금발의 인물 앞에 다시 멈춰 섰다.
“내가 말하는 중인데 왜 도망쳐? 아, 혹시 한국말 몰라? 중국어나 영어도 할 수 있긴 한데, 딱히 너를 배려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대로 말할래.”
금발의 인물은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걸 본 서돌은 한숨을 푹 쉬었다.
“대화할 생각이 없나 보네? 행동은 쥐 같아도 우리와 달리 지혜롭지 못하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돌이 허공에 띄운 쥐색의 구슬에서 불길한 기운을 띈 이능파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 * *
플레이어 협회에서는 프로 플레이어 팀들의 적극적인 이계 공략을 장려하기 위해 매년 이계 공략 실적에 따른 팀 랭킹을 공개한다.
순위 변동은 자주 일어났지만, 10위 안에 드는 프로 플레이어 팀의 명단은 거의 고정된 상태였고 대중은 이들을 세계 10대 이계 공략 팀으로 불렀다.
그 10대 이계 공략 팀에 속하는 팀 중에 대표적으로 알려진 건 홍염의 제왕 염방열이 이끄는 ‘붉은 사자’.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을 따르는 이들이 모인 ‘영원의 호수’.
또 기사 작위를 가진 세 명의 팀 마스터가 존재하는 ‘세 기사의 맹세’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꾀돌이가 내민 천 쪼가리에 그 세 기사의 맹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난 거냐.”
세 기사의 맹세 초대 팀 마스터들의 가문 문양이 얽힌 형태의 팀 마크를 보며 황지호가 물었다.
황지호도 세 기사의 맹세의 문양을 알아본 것 같았다.
“으음…….”
하지만 서돌은 황지호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서돌은 문양을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 대답을 못 하는 거지? 입수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황지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서돌이 황지호보다 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좀 기다려 봐요. 어떻게 하면 조의신이 부담 갖지 않게 하면서 제 멋진 활약상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니까요. 표현을 고르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 줄래요?”
“미쳤군. 그사이에 상태 이상에라도 걸렸느냐. 아니, 상시 광증을 보이는 중이니 그건 아닌가.”
이번만큼은 황지호와 같은 의견이었다.
서돌은 1분간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하다 입을 열었다.
서돌은 소동의 근원을 찾아 움직이다가 은밀 행동을 하는 의문의 인물을 발견해 대치하였다고 한다.
서돌이 금발의 플레이어와 대치한 결과, 그자가 흔적을 지우기 전 품에 품고 있던 문양을 갈취하는 데에 성공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 금발의 플레이어는 어떻게 됐지?”
“도주가 불가능하지만, 저를 제압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살했어요.”
서돌은 눈과 입을 살며시 움직이며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상당히 독특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더군요. 아이템에 담긴 효과가 발동한 순간 그 금발의 몸은 물론이고 착용 중인 모든 것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어요. 그전에 이걸 건져 왔답니다.”
칭찬해 줬으면 하는지 서돌이 내 눈치를 살짝 보고 있었다.
나한테 칭찬도 받고 가호도 주고받았으면 하는 모양이다.
“멍청한 것. 살려서 데려와야지.”
“일반적인 상황이면 어렵지 않았겠죠. 하지만 제가 있던 곳은 이곳보다 충격파가 더 빈번하게 날아왔거든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한 황호한테는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
“하? 난 조의신의 일행을 지키고 있었다. 넌 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를 떴지. 조의신에게 가호를 받아 달라며 애걸복걸하는 주제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그건 당신이 알아서 지켰잖아요. 토트가 아끼는 저 언령술사도 보통 인물이 아닌 걸 알고 있는데요?”
방금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도 두 수장은 아무렇지 않게 말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황지호가 서돌로부터 거의 빼앗아 가듯 세 기사의 맹세 팀 마크를 받아 들었을 때였다.
“연락이 왔다. 오늘은 호텔로 철수해야 할 것 같구나.”
제갈재걸이 말을 걸어왔다.
홀로그램을 띄우고 있는 걸 보니, 방금까지 연락 중이었나 보다.
제갈재걸은 결계를 치고 뭐라 뭐라 말싸움을 하고 있는 수장 둘을 보며 말했다.
“의신아, 혹시 새로 합류한 분이 곤란하게 굴지 않니?”
“네?”
“그러니까…… 원치 않는 가호를 받아 달라고 요구한다거나, 처음 듣는 회사나 팀으로의 스카웃을 제안한다거나…….”
제갈재걸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나를 염려하고 있었나 보다.
“가호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어요. 괜찮아요.”
“그래…… 저분은 가호를 주겠다고 선언한 대상에게는 해를 입히지 않는단다. 그래도 너무 집요하게 군다 싶으면 바로 말하렴.”
이미 너무 집요하게 구는 것 같긴 했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번거롭게 하기는 싫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제갈재걸은 무려 황지호도 걱정해 줬다.
“지호도 걱정이지만, 저분은 황명호 이사장님의 친척을 건드리지는 않을 거야. 저렇게 말로 하는 걸 보니 해할 것 같진 않구나.”
서돌이 이사장의 친척은 건드리지 않아도 이사장 본인은 건드릴 것 같은데.
그 후, 우리 일행은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현장 사진을 있는 대로 다 찍은 문새론은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제갈재걸의 말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이번 건 기사가 하나도 안 나고 있네요…….”
“우리가 기사를 쓸까?”
“기사를 쓰고 싶어도 취재한 게 없잖아. 그냥 플레이어 양성소에서 정체불명의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끝.”
“……그것만으로는 내용 없는 어그로성 기사밖에 안 되겠네. 괜히 이렇게 입 털었다가 다른 취재도 못 하게 되면 우리 손해야.”
“그건 그렇네. 나중에라도 이곳의 내부를 견학할 수 있다면 모를까.”
호텔에 도착한 후에도 신문부원들이 이번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제갈재걸은 여전히 청두시 플레이어 양성소 측과 연락을 하기에 바빴고, 제갈재걸 처돌이들은 신문부 부장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눈치껏 제갈재걸을 귀찮게 굴지 않았다.
황지호와 서돌은 말싸움이 일단락되었는지 각자 다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황지호 쪽 테이블로 가서 물었다.
“야.”
“무슨 일이지? 계속 생각에 잠겨 있던 것 같던데.”
황지호의 말대로 이동 중에 계속 중국에서 연달아 터지는 사건에 대해 생각했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계 충돌이 일어난 시대에 이 거대한 대륙에서 사건 몇 개가 단기간에 터진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황지호가 따라 준 벽라춘(碧螺春)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차는 아닌 것 같은데, 언제 또 이렇게 향기도 빛깔도 남다른 찻잎을 구해 온 건지 모르겠다.
“목우람과 만나고 싶어. 어디에 있어?”
“여기에서 가까운 호텔에 내 부하가 보호 중이다. 홍규빈과 접선하기 위해 위치를 한 번 옮겼지.”
황지호가 홀로그램으로 주변 지도를 띄우고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 정도면 도보로 이동해도 문제없을 거리였다.
“아직 안 일어났지?”
“그래. 하지만 곧 일어날 것 같더군. 차를 다 마시면 가 볼까.”
황지호는 당연히 같이 갈 생각인 모양이다.
그때, 어느 사이엔가 이쪽 테이블에 앉아서 멋대로 차를 마시던 서돌도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도 갈래요.”
* * *
돌아이 둘을 데리고 쇼핑을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하니 의외로 바로 허락해 줬다.
저 둘이 떼를 썼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홍규빈도 불러서 함께 갈 생각이었지만, 홍규빈은 제갈재걸을 도와 방금 전 있던 폭주 사건에 대해 알아보느라 바빠 보였다.
결국 돌아이 둘은 내가 혼자 책임지게 되었다.
“나쁘진 않네요. 여기 회원권을 샀나 봐요?”
“예약하기 편하니까.”
호텔 입구에서 황지호가 카드를 내밀자 금뱃지를 단 호텔리어 세 명이 인사하러 왔었다.
황지호가 손을 젓자 허리를 숙이고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물러났는데, 묻지 않아도 최고 레벨의 VIP로 대우받는 걸 알 수 있었다.
황지호는 곧바로 가드가 서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고, 카드키를 대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비상용 버튼을 제외하면 입력기기라곤 카드 인식기밖에 없어, 층수를 누르는 대신 카드를 인식하는 것으로 끝났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딱히 없는데요.”
“네놈한테 한 소리가 아니다.”
최상층에 도착한 후에도 두 수장은 여전히 티격태격했다.
대기 중이던 슈트 차림을 한 부하의 안내를 받아 스위트룸의 침실로 가니,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목우람이 보였다.
“일어난 적은 없나?”
“한번도 없습니다.”
목우람은 일어나기는커녕 뒤척이지도 않았는지 걸치고 있는 무명옷은 주름 하나 없었다.
‘깨운다고 해서 일어날까? 한 번 어깨라도 흔들어 볼까.’
목우람 쪽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덥석.
눈을 뜬 목우람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