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국경의 밖 (12)
목우람은 비쩍 마르긴 했지만, 장인답게 손 여기저기에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었다.
내 손목을 단단히 움켜쥔 목우람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계속 자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속도로 반응한 거지?’
나는 몰라도 황지호와 서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텐데.
황지호는 목우람이 이렇게 눈을 뜰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우람은 나를 빤히 들여다보다 풀 죽은 얼굴로 손을 놨다.
“……이상하다. 나의 뮤즈께서 이곳에 계셨던 것 같은데. 키나 실루엣이 맞지 않아.”
목우람은 일어나자마자 뮤즈 타령을 했다.
‘목우람은 뮤즈를 발견했다고 현무가 말했었지…….’
학업을 버리고 전 세계를 싸돌아다니다가 발견한 뮤즈의 꿈이라도 꾼 걸까.
“안녕.”
목우람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늦게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몸을 급히 일으켰다.
갑자기 몸을 움직인 바람에 근육통을 느낀 건지 목우람이 살짝 인상을 썼다.
“힘들면 누워서 말해도 돼.”
“……여긴 어디입니까?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한국인이십니까?”
목우람은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에 나올 법한 말투로 물었다.
해외 생활이 긴 데다 긴장한 탓에 한국어가 어색하게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긴 쓰촨성의 청두시야. 나는 은광고 1학년 0반 조의신이고, 얘는 같은 반 황지호. 저쪽은…….”
“저놈이 누군지 몰라도 된다.”
“말을 끊다니 너무해요! 조의신이 저를 어떻게 소개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실 나도 서돌의 소개는 생략하고 ‘누군지 몰라도 돼.’라고 말하려 했는데.
목우람은 징징거리는 서돌을 무시하고 나와 황지호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저와 같은 반, 같은 학교군요……!”
목우람의 목소리에서 갑자기 생기가 넘쳤다.
“그래. 몸은 괜찮아?”
“네! 제 몸은 괜찮습니다.”
같은 반 학생을 만나서 안심한 걸까?
한 번도 등교하지 않았던 놈이 갑자기 반 친구가 나타났다고 반가워할 것 같지는 않은데.
목우람이 적극적으로 답변해 주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위화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 가능하면 어쩌다가 다쳤는지 자세히 설명해 줬으면 하는데.”
“그 전에 두 분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목우람은 진중한 태도였다.
목소리를 가다듬는 게 예삿일을 물을 것 같진 않았다.
‘무엇을 물을 생각이지? 현무에 관해서? 아니면 우리가 중국에 있는 이유에 관해서?’
예상되는 질문과 그 답변에 대해 정리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해 봐라.”
“……당신들은 은광고 학생입니다. 맞습니까?”
“그래. 이 몸과 조의신은 명실상부한 은광고 소속이다. 너와 같은 학급, 1학년 0반에 재학 중이지.”
황지호가 자신의 은광고 학생증을 홀로그램으로 띄워 보여 줬다.
나도 디바이스를 가동해 학생증을 보여 주니 목우람의 얼굴이 더 환하게 폈다.
“두 분께서는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 씨를 아십니까?”
“그래. 권제인은 은광고에 재직 중이다.”
“그렇다면, 그러면…… 두 분은 제 뮤즈에 대해서 아시겠군요!”
뭔가 말이 맞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권제인이 뮤즈라는 소리인가?
아니, 만약 그랬다면 목우람은 영원의 호수 팀과 함께 영국에 머물렀을 거다.
둘은 서로 알던 사이였으니 마음먹으면 연락도 가능했을 거고.
나와 같은 의문을 품은 듯 황지호가 물었다.
“뮤즈? 권제인을 말하는 건가.”
“아닙니다. 스승님의 뮤즈인 권제인 씨는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만, 제 뮤즈는 아닙니다.”
“그럼 누구를 말하는 거지?
목우람은 숨을 가다듬다 말했다.
“제 뮤즈는 어둠 속, 거대한 바다의 벽을 두고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와 나란히 협연을 한 분이십니다!”
그 뮤즈라는 게 권레나를 말하는 거였나……!
거의 확실한 것 같았지만 홀로그램으로 문새론이 올렸던 두 사람의 협연 영상을 보여 주며 확인했다.
“혹시 여기에 나온 이 아이 말하는 거야?”
“네! 이분입니다! 저의 뮤즈는 은광고에 계십니까?”
목우람은 홀로그램에 얼굴을 처박을 기세로 들이댔다.
정말 권레나였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누군가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긴 했다.
“그래.”
“그분의 성함과 나이는 무엇입니까? 제가 등교하면 그분과 함께 학교에 다닐 수 있습니까? 아, 그분께서는 제가 만든 이능 바이올린을 연주하실 생각은 없으시답니까?”
현무의 품에서 시체처럼 등장한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목우람은 기운이 넘쳤다.
질문한 내용만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이쪽의 질문에 먼저 답해라.”
“네, 네……! 알겠습니다!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목우람은 기절했다 일어난 직후 힘껏 소리를 낸 탓에 목이 다 쉬었다.
냉장고에서 생수통을 하나 꺼내서 목우람에게 내밀며 물었다.
목우람이 ‘감사합니다!’하고 외친 후, 물을 들이켜는 사이, 황지호가 내게 턱짓하는 게 보였다.
내가 먼저 질문하라는 뜻인 것 같다.
“정신을 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
“네! 올해 초, 제가 뮤즈를 찾아 한반도를 나섰을 때의 일인데…….”
그것도 정신을 잃기 전에 있던 일이긴 하지만 너무 예전 일인데.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하고 범위를 좁혔다.
“정신을 잃었을 때를 기준으로 한 달 전에 있던 일부터 말해 줘.”
목우람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겪은 일을 얘기해 줬다.
전 세계를 헤집고 다니며 영감의 원천을 찾아 헤매던 목우람.
그가 수중에 있는 돈을 여비와 음악회 감상 비용 등으로 거의 다 써 버렸을 때, 권제인과 권레나의 협연 영상을 발견하여 한반도로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었고, 도보로 이동하며 중간중간에 등장한 이계를 공략하며 여비를 벌었다고 한다.
“플레이어 협회에서 긴급 대출을 받으면 되잖아. 학교에 도움을 청하면 귀국을 도와줬을 텐데.”
“……그런 방법이 있었습니까?”
목우람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이 바이올린 장인에게는 상식이 매우 부족한가 보다.
목우람의 이야기 중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하나 더 있었다.
“은광고에 입학할 수준의 플레이어가 에너미 토벌에 나섰는데 비행기 티켓 값도 못 벌었다고?”
“맨손으로는 낮은 희귀도의 에너미를 잡는 게 한계였습니다.”
뭔가 이상했다.
수배 에너미가 아닌 한, 희귀도가 낮은 에너미의 포상금은 그리 크지 않긴 했다.
그래도 비행기도 못 탈 정도로 못 버는 건 말이 안 됐다.
그 점을 지적하자 목우람 답하길.
“네? R급 에너미를 혼자 토벌해도 하루 숙식을 해결하기 힘들었습니다만…….”
세상 물정 모르는 목우람은 호구로 살아왔나 보다.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 일한 몫의 1%도 안 되는 돈을 받은 것 같았다.
“나중에 이동 경로를 전부 체크해 줘. 플레이어 협회 총본부에 신고하게.”
“아, 네!”
중동 쪽 협회가 얼마나 일을 잘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건 해 두기로 했다.
호구 목우람의 눈물겨운 여행기가 계속 이어졌다.
“중동을 지나서 중국 국경 가까이 왔을 때, 스카우트 제안이 왔습니다.”
“스카우트? 어디에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으면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즉시 거절했습니다.”
제안을 거절한 다음 날.
목우람은 누군가에게 쫓기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버티며 도망쳤지만, 추격자가 점점 늘어나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검은 옷자락이 보인 게 제 마지막 기억입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목우람은 현무가 개입하기 직전의 상황까지만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황지호가 물었다.
“습격 첫날, 착용 중이던 디바이스를 정확히 노려 파괴한 것도 그렇고 보통 놈들이 아니군. 습격한 자에 관해 짐작 가는 건 있나?”
“신경 쓰이는 게 있었습니다.”
“말해 봐라.”
“추적자들은 서로 무척 닮아 있었습니다. 세쌍둥이, 네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얼굴을 봤나?”
“전원 은신 아이템을 사용했고, 은신 아이템 밑에는 마스크를 착용 중이었습니다.”
추적자들이 서로 닮아 있다는 설명도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당장 신경 쓰이는 건 마지막 발언이었다.
그 묘사에 기시감을 느낀 게 나 혼자가 아니었는지, 황지호가 서돌을 보자 서돌이 손바닥을 들어 올려 이능파를 뿜었다.
파아아……!
쥐색의 연기가 뚫려 있는 곳이라곤 마름모 모양으로 열린 눈 부분뿐인 마스크 모양으로 변했다.
수석 디자이너의 솜씨가 이런 곳에서도 발현되는지, 이능파로 구현해 낸 마스크의 형태는 몹시 정교했다.
목우람이 감탄하며 서돌이 구현한 이능파 연기를 관찰했다.
“이런 모양이었나요?”
“네! 색을 제외하면 일치합니다.”
목우람의 대답에 황지호와 서돌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스크의 안, 본 적 있나요?”
“없습니다. 운 좋게 은신 아이템을 벗겨 낸 적은 있어 마스크만을 확인했습니다.”
그 안을 확인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세 기사의 맹세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그 팀은 목우람의 습격과 청두시 플레이어 양성소의 폭주 사건, 동시에 관계가 있었다.
그때, 디바이스를 확인한 황지호가 혀를 찼다.
“계획 중 하나가 틀어지게 생겼군.”
“뭔데?”
“폭주 중에 광림 컨트롤 방법을 완벽히 익혔다는 플레이어에 대해 언급한 걸 기억하나?”
“어.”
“오늘 폭주를 일으킨 플레이어들을 심층 관리할 예정이라는군. 당분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오늘 폭주를 일으킨 건 한 명이 아니었나 보다.
습격당한 목우람, 폭주한 플레이어, 금발의 누군가, 세 기사의 맹세.
정보를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을 때, 목우람이 말했다.
“질문은 끝났습니까? 약속하신 대로 뮤즈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입이 바짝 말라 있는 목우람이 텅 빈 생수병을 우그러뜨리며 말했다.
방 안에 비치된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하나 더 꺼내서 건네주며 말했다.
“그 영상 속에 나온 애는 우리 반 아이야.”
“우리 반……! 그럼, 뮤즈는 저와 같은 반입니까? 학교로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그래. 방학 중이라서 학교에 가도 없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렇습니까? 그분의 성함은 무엇입니까?”
목우람은 지나치게 흥분한 탓인지 점점 더 딱딱한 한국말로 말했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스위트룸에 비치된 디바이스로 협주 영상을 재생하고 화면 이곳저곳을 짚어가며 계속 질문을 던져 댔다.
나는 목우람의 질문에 성의껏 답해 주면서도 생각했다.
‘목우람한테 어떤 질문을 던져도 정직하게 답해 줄 것 같은데.’
목우람에게 물어봐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었다.
‘무명의 운명’과 이능 바이올린 아이템 설명문의 유사성.
그러나 황지호와 서돌 앞에서 그걸 물을 수는 없었다.
귀국할 때 다시 보자고 인사를 나눈 후, 그 자리를 떴다.
* * *
쓰촨성, 청두시와 야안시의 경계.
형체가 어그러진 채로 딱딱히 굳은 시신들 수십 구 사이로 흑의 차림의 현무가 곧게 서 있었다.
자박자박…….
현무의 뒤로 살얼음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리웨이가 걸어왔다.
현무는 검은 비단 천으로 눈을 가렸지만, 리웨이가 훤히 보이는 것처럼 몸을 틀어 그의 얼굴과 마주 봤다.
“리웨이, 다친 곳은?”
“없습니다. 상당수는 현무 님께서 맡아 주셨으니까요.”
파앗!
현무가 비단 소매 깃을 가볍게 흔들자 머리의 형태가 멀쩡히 남은 시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렇게까지 개입할 생각은 없었거늘. 그 새벽의 별이 예상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탓에…….”
현무는 시체들이 공통적으로 착용 중인 마스크를 검은 비단으로 감았다.
마스크는 전부 같은 모양으로, 눈 부분에는 마름모꼴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배웅은 못 하지만, 남은 여정은 평온하게 보내도록 도와주고 싶구나.”
* * *
신문부원들이 있는 호텔에 도착한 후.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혼자 방에 틀어박혀 생각을 정리하려 할 때였다.
딩동.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사월세음이었다.
[사월세음] 의신아! 지금 어디세요? 중국이에요? 언제 와요?
우리 반 아이들은 나와 황지호가 신문부 취재 여행 중인 걸 알고 있을 텐데, 갑자기 무슨 일인 걸까.
무슨 일이 있는지 묻기 전에, 사월세음이 추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사월세음] 한이를 도와주세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