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09화 (209/925)

42. 소원을 이룬 대가 (1)

이틀 전, 한국.

은광고 거주 구역의 1학년 건물.

지이잉……!

손목에 느껴지는 진동에 한이가 눈을 번쩍 떴다.

청력이 완전히 상실된 2급 청각 장애인인 한이는 밴드 타입의 디바이스를 이용해 알람을 맞추곤 했다.

일어날 시간임을 확인한 한이가 한숨을 쉬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또 그 꿈이야.’

은광고에 입학한 후, 정확하게는 학기가 시작된 첫날 함근형과 조의신, 황지호, 김유리와 만난 이후.

한이는 정체불명의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꿈속의 누군가는 눈을 가리고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어도 알아. 나를 보고 있었어.’

그 눈을 가린 누군가는 한이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형체가 떨리는 바람에 입술을 읽을 수 없었다.

‘고민해도 알 수 없는 사항에 매달려 봤자 소용없겠지.’

심호흡한 한이는 스트레칭을 하며 잡념을 털었다.

오늘은 반 아이들이 은광한빛보육원에 봉사 활동을 하러 오기로 한 날이니, 기운 없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이야기가 나온 건 우연이었다.

어제 권레나와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 불쑥 그 화제를 꺼냈다.

“이번 여름 방학에 레슨에 방해될 것 같은 일을 미리 다 해결해 두고 싶어!”

기말고사 기간, 바이올린 레슨과 시험공부 지옥을 헤매던 권레나가 진저리 치며 말했다.

권레나는 학교 커리큘럼 표와 바이올린 스티커가 여기저기에 붙은 계획표 홀로그램을 띄우며 열심히 고민했다.

한이는 은광고 입학 전에 공청훤이 했던 조언을 떠올리며 권레나의 계획표 작성을 도왔다.

권레나는 커리큘럼 표의 어느 항목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권장 봉사 활동 시간 안내’.

말이 권장이지, 대한민국 고교생들이라면 누구나 내신 성적 중 봉사 활동 점수를 받기 위해 반강제로 봉사 활동 시간을 일정 시간 채워야 했다.

“봉사 활동 연간 20시간…… 좀 많네. 하루에 다섯 시간 해도 4일은 걸리겠다. 음, 이것도 미리 해야지! 한이는 어디에서 했어?”

“내가 있던 보육원에서 했어.”

한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보육원에서 일을 도왔기에 이미 올해 권장 봉사 활동 시간은 전부 채운 상태였다.

그래도 방학 동안 시간이 나면 보육원 일을 돕고 있었다.

최근 집값 운운하는 인근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고용한 용역 단체 탓에 자원봉사자들이 줄어 일손이 부족해졌으니, 한이는 이전보다 보육원에서 일하는 시간을 늘렸다.

“아, 한이는 주말마다 보육원에 가서 일을 돕는 중이었지…… 나도 가도 돼?”

한이는 순간 망설였다.

자원봉사자가 한 명이라도 느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그 용역 단체가 마음에 걸렸다.

‘……반 아이들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어.’

권레나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이는 사실을 밝히기로 했다.

한이는 지금 은광한빛보육원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숨김없이 전했다.

“너무하네. 그럼 지금 그 사람들 때문에 보육원에 자원봉사자가 한 명도 안 오고 있는 거야?”

“……응.”

“그렇구나. 그럼 꼭 가야겠다!”

그러나 권레나는 한이의 말을 듣고 오히려 꼭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괜찮아! 우리는 플레이어잖아. 협회의 설립 목적에는 ‘플레이어의 보호’도 포함되어 있어. 나나 한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플레이어 협회에 신고하면 돼!”

“그래도 신고하기 전에 사고라도 생기면…….”

“그럼 우리 반 애들도 부르자. 어차피 다들 봉사 활동 시간 채워야 하니까!”

1학기 동안 친하게 지내던 김유리의 영향을 받은 건지, 권레나의 행동력은 그에 못지않았다.

권레나는 곧바로 1학년 0반 학생들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조의신과 황지호는 취재 여행차 중국으로.

김유리는 아직 황명은광병원 특수 병동에 입원 중.

송대석은 협회에 끌려간 후, 민그린조차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

맹효돈은 ‘도인과 빵셔틀이랑 산으로 간다.’라는 의문의 메시지를 끝으로 연락 두절.

“음, 다들 많이 바쁜가 봐!”

“……효돈이는 계속 연락이 안 되면 협회 측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도인 할아버지도 선생님이잖아. 효돈이는 괜찮을 거야. 윤섭이도 같이 간 거 같고. 아, 그린이도 온대.”

민그린의 경우, 사람도 적고 반 아이들이 같이 간다는 말에 꼭 가고 싶다고 답변했다.

민그린은 최근에 미술부원을 상대로 AR 글래스를 벗고 이야기하는 것에 성공해서 사람들을 대하는 일에 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

‘정말 반 아이들이 와도 괜찮을까?’

한이의 우려 속에서도 보육원 봉사 활동에 참여할 이들이 정해졌다.

한이, 권레나, 사월세음, 민그린.

한이는 반 친구 셋과 약속한 시각을 다시 확인하며 기숙사 방을 나섰다.

‘무사히 봉사 활동이 끝나길…….’

아이들과 만나기로 한 은광한빛보육원 앞.

약속한 시각까지 30분이 넘게 남아 있었는데, 사월세음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일찍 왔네.”

“네! 집에 있기 따분해서요. 또 제가 집 밖에 있어야 삼촌이랑 숙모님이 단둘이 있기 좋거든요.”

삼촌과 숙모?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가족사를 묻는 건 실례라고 여긴 한이가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와 줘서 고마워.”

“어차피 내신을 위해서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했는걸요! 반 친구들이랑 같이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아, 오는 길에 ‘MITRON’을 잠깐 구경하다 왔는데요, 이번에 신상품으로 나온 아이스 슈 드셔 봤나요?”

“아니. 끝나면 먹으러 가자.”

“네! 레나랑 그린이랑도 같이 가고 싶어요!”

두 사람이 디저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반 아이들과 약속한 시각에서 10분이 지났을 때.

초보자 체스 강습에서 배웠던 룰을 복습하던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나랑 그린이가 늦네요. 늦으면 연락을 해 주셨을 텐데…….”

성실한 두 사람이 늦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늦었는데도 연락이 없다는 게 이상했다.

디바이스에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기독 처리가 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동아리 활동이 길어졌나 해서 학교에도 연락해 봤지만, 두 사람은 일찍 돌아갔다는 확인을 받았다.

결국, 한이와 사월세음은 직접 둘을 찾기로 했다.

“여기 오는 길이 좀 복잡해서 처음 올 땐 헤맬 수도 있어. 찾아보자.”

“네! 아, 사실 저도 올 때 비행 스킬 써서 왔어요.”

은광한빛보육원은 은광구의 시가지에서 다소 떨어진, 낙후된 주거 환경의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길 자체도 복잡하고 골목길도 많은 편이라 사월세음이 비행 스킬을 사용하고 한이가 디바이스로 위치를 지정하며 수색을 시작했다.

곧 사월세음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하강해서 외쳤다.

“아! 저기……! 레나랑 그린이가 있어요!”

“왜 그래?”

“이상한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어요!”

사월세음이 당황한 얼굴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월세음을 따라 달리기 시작한 한이도 곧 권레나와 민그린, 두 사람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어림잡아 10명이 넘는 성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떼를 지어 몰려 있는 이들은 함근형 정도는 아니지만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이는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보육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야!’

봉사 활동을 위해 보육원을 찾아온 사람들을 쫓아낸 용역 업체의 사람들이었다.

말이 용역 업체의 사람들이지 그 지역 사회의 높으신 분들과 유착 관계에 있는 조직 폭력배, 흔히 조폭이라고 불리는 집단의 피라미들이었다.

그들의 수법이 어찌나 능란한지 아무리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이 없었다.

위협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작들이 현행법상 처벌하기 힘들었고, 선을 넘은 행동도 기록기기를 피해 행하기에 증거를 남기지 않은 탓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권레나가 민그린을 품에 폭 안고 한쪽 손으로 이능파를 띈 채찍을 쥐고 있었다.

플레이어라고는 하나 두 사람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민그린은 낯선 사람들 다수가 적의를 드러내자 패닉 상태에 빠졌고, 권레나는 침착하게 대항했지만 민그린을 보호하며 10명이 넘는 성인 남성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두 사람 다 키가 150을 겨우 넘기는 데다 왜소한 체구를 하고 있으니 용역 업체에서 나온 남자들이 더더욱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두 사람한테서 떨어지세요!”

“세음아……!”

사월세음이 비행 스킬을 사용해 두 사람 앞으로 날아갔다.

바람술이 발동한 탓에 사월세음의 주변으로 옅은 빛을 띤 바람이 넘실거렸다.

“쳇, 플레이어 친구가 오셨네.”

“자연계 능력자다. 거기에 저기 단발 언니는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낄낄거리는 소리가 섞였다.

‘플레이어가 있구나……!’

한이가 그렇게 판단했을 때, 일행과 혼자 떨어져 태호권 준비 자세를 취한 한이를 두고 누군가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월세음, 권레나, 민그린은 떨어져 있는 탓에 듣지 못하고, 서로 귓속말을 하는 통에 한이가 입 모양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한 남자가 한이에게 기습 공격을 가했고, 한이는 반사적으로 이에 응전했다.

한이가 공격을 피해 각목을 든 남자의 손을 주먹으로 쳐 낸 순간.

찰칵.

위잉!

의도적으로 낸 셔터음과 동영상 촬영 시작 알림음이 들렸다.

누군가가 기록기기로 이 상황을 찍고 있었다.

타이밍상, 한이가 공격을 가한 순간만이 포착되어 있었다.

“단발 아가씨는 보육원 출신이던데, 플레이어가 일반인을 공격하면 어떤 벌을 받는지 알고는 있나?”

1학년 네 명은 아직 플레이어 특별법 과목을 수강하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말을 듣자 얼굴색을 바꿨다.

플레이어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격할 시, 협회 규정으로도 현행법으로도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이를 이용한 사기, 협박죄도 기승을 부리고 있어 플레이어들은 항상 기록기기를 끼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 이 넷 중에 기록기기를 가동 중인 이들은 없었고, 이 골목길 어디에도 CCTV 같은 건 없었다.

‘휘말린 순간 바로 기록기기를 켰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한이를 포함해 누구도 기록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너무나도 뻔하고 어이없는 수에 걸려든 게 분하면서도 대응할 수단이 떠오르지 않아 네 사람은 크게 당황했다.

사회 경험이 전무한 넷에 비해 용역 업체의 직원들은 비열한 짓을 하는 데에 몹시 능숙했다.

“그건 그쪽이 먼저 공격을 해서……!”

“증인은 이쪽이 많고, 여기에 확실한 증거도 있지.”

권레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자가 말을 끊었다.

리더 격의 남자가 띄운 영상에는 정확히 한이가 주먹을 날리고, 남자가 날아가는 광경만이 찍혀 있었다.

한이의 얼굴에서 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플레이어 대 일반인의 싸움에서 보통 여론과 법은 일반인의 손을 들어 줬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였고, 전국민의 85%에 해당하는 일반인, 절대다수의 힘은 막강했다.

“거기 단발 아가씨…… 보육원 출신의 ‘한이’ 맞지? 좀 따라와 줘야겠는데.”

“한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한이야, 가면 안 돼요!”

“경찰에 신고한 지 30분이 넘었는데, 왜 안 오지……!”

사월세음과 권레나의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딱딱하게 굳은 한이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때.

“어떤 새끼들이 뒤질려고 내 구역에서 삥을 뜯어?”

작은 공터를 둘러싼 담벼락 위.

못이 여기저기에 박힌 야구 배트를 든 소녀가 등장했다.

후드 티에 마스크를 쓴 바람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철두철미하게 얼굴을 감춘 소녀는 옷 밑에 음성 변조기까지 착용했는지 체구와 맞지 않는 굵직한 기계음으로 말했다.

“하, 이 씹새들 또 왔네. 그렇게 처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패기를 뿜는 소녀를 본 용역 업체의 남자들이 기함했다.

“이 구역 미친년이다!”

“……철수해라!”

기고만장했던 이들이 기겁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소녀는 고작 한 명이었지만, ‘이 구역 미친년’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미치광이였다.

그녀는 매번 등장할 때마다 ‘한 새끼의 코뼈를 박살 내겠다.’, ‘한 새끼의 손톱을 다 부수겠다.’ 등의 선언을 했고, 그 모든 발언을 실현했다.

숫자로 밀어붙이면 제압할 수 있겠지만, 남자들은 미치광이 하나 잡자고 리스크를 감수하고 의뢰받지도 않은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복잡한 골목길을 타고 다들 갈라져서 뛰기 시작했는데, 소녀는 리더 격의 인물을 정확하게 노려 추적하기 시작했다.

“새끼들아, 어딜 가! 내가 오늘 한 놈 머리는 무조건 깬다!”

남자들과 소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멀리서 ‘철퍽!’하고 수박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거의 혼이 빠진 1학년 0반 네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위기에서는 벗어났지만, 다들 표정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여전히 한이가 찍힌 영상이 저들의 손에 있다는 걸 알고 있던 탓이었다.

*    *    *

[사월세음] 레나랑 그린이가 보육원으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갑자기 누가 사람을 부르더니 둘러싸고 위협했대요!

[사월세음] 저랑 한이가 그걸 뒤늦게 발견했고, 한이가 공격당하고…….

[사월세음] 한이가 그런 영상을 찍히긴 했지만, 한이는 절대로 잘못하지 않았어요!

사월세음은 여전히 놀라고 당황한 듯했지만 열심히 설명했다.

평소와 달리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채팅을 집중해서 해석했다.

‘신고해도 오지 않은 경찰, 기록기기가 없는 낙후된 주거 환경, 보육원과 한이를 노리는 용역 업체, 그것도 고급 인력인 플레이어가 둘 이상 포함된 조직 폭력배라…….’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갑자기 등장해 조폭들을 쫓아낸 패기를 두른 그 구역 미친년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즉시 방 밖으로 나가 황지호 방으로 쳐들어갔다.

노크를 하지도 않았는데 기척을 감지한 황지호가 ‘들어오도록.’이라고 답변해 사양하지 않고 바로 들어갔다.

“야.”

“무슨 일이지? 벌써 생각을 정리한 건가.”

내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방에 틀어박힌 걸 눈치챘나 보다.

나는 바로 본론을 말했다.

“나 지금 한국으로 갈 거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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