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소원을 이룬 대가 (2)
우리 반 아이가 위기에 처하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도와달라고 하는데 한반도 밖에서 관광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취재를 위해 오긴 했지만, 신문부에서 취재를 진행하는 주역은 고학년 신문부원이니 나 하나가 빠져도 신문부에 폐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또 중국에 온 목적은 이미 다 달성한 상태였다.
‘염제 신농의 광림을 사용하는 플레이어 리웨이와 만났고, 상위 존재의 광림을 제어한다는 플레이어는 사고 탓에 만날 수 없게 되었어. 여기에 남아서 얻을 수 있는 건…….’
제갈재걸과 신문부원, 2학년 0반 선배놈들과 함께하는 취재 여행은 상당히 재미있을 거다.
취재 예정지인 베이징과 모스크바에 들르고 싶었던 관광지도 많았다.
몸은 피곤할지 몰라도 얼마나 즐거울지 예상이 갔다.
‘그래도 가야 해.’
예전 세계에서 가족을 잃기 직전, 중학교 3학년 가을.
내가 마지막으로 한 해외여행인 세계주니어체스선수권대회 일정도 고단했지만 즐거웠다.
그러나 돌아온 직후 알게 된 사실 탓에 그 즐거웠던 기억은 전부 퇴색되었다.
이번 여행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 귀국하겠다는 내 말에 황지호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이라고 했나?”
“어.”
내 대답을 들은 황지호가 잠시 뜸을 들여 생각하다 말했다.
“그래. 진정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나 보군. 조의신 네가 기특하게 나한테 먼저 보고할 리는 없겠고…… 나에게 뭔가 부탁할 일이 있겠지?”
노친네의 눈치가 귀신같았다.
황지호의 말 대로였다.
“하하하! 부정하지 않는군. 일단 앉아서 말해라.”
뭐가 웃긴 건지 한 번 크게 처웃은 황지호가 앉으라고 권하며 말했다.
바로 용건만 말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부탁하러 온 입장에서 거절하기도 뭣해서 황지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목우람을 데리고 귀국해 줘. 홍규빈 팀장님이 계시긴 하지만 네가 같이 가는 게 확실할 거야.”
“그래, 알았다. 그럼 이유를 묻지.”
이유?
목우람을 왜 황지호가 데리고 귀국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인가.
“목우람은 ‘세 기사의 맹세’에서 노리는 중인 것 같으니까. 현무의 영역을 벗어나면 다시 목우람을 공격할지도 몰라.”
정확한 목적은 모른다.
목우람을 납치하는 게 목표인지, 죽이는 게 목표인지 모르겠지만 노리는 건 확실하니 막아야 했다.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황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를 물은 게 아니다.”
“그러면?”
“네가 귀국하려는 이유를 물은 거다.”
그걸 물은 건가.
황지호가 앞뒤 묻지 않고 내 부탁은 들어주겠다는 뉘앙스로 말하기에 내가 귀국하는 이유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광한빛보육원이라고 알아?”
“그래. 우리 반의 한이가 있던 보육원이지. 황명재단에서 기부하고 있는 보육원 중 하나기도 하고.”
황명재단이 은광한빛보육원에 기부를 해?
게임 속에서는 없던 설정이었다.
황명재단이 뒤에 있었다면 은광한빛보육원에 재정난이 닥쳤을 때 공청훤이 하루에 몇 번씩이나 이계 공략을 뛰며 기부를 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혹시 한이가 마음에 들어서 기부도 결정한 걸까.’
태호권의 계승자라서 그런 건지, 그냥 저 노친네 변덕인지 몰라도 황지호는 한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
1학년 0반 아이 중 황지호가 가장 귀찮게 장난질을 쳐 대는 상위 셋을 꼽자면 나, 한이, 사월세음 이렇게 셋이었다.
한이는 황지호가 처웃으며 장난질을 하면 질색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저놈은 일방적으로 한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오늘 사월세음에게 연락이 왔어. 근래에 들어 용역 업체의 업자들이 은광한빛보육원 주변에 얼쩡거리고 있었는데…….”
사월세음이 정신없이 던졌던 정보들을 나름 시계열에 맞춰서 정리해 말했다.
한이가 함정에 빠져 영상이 찍혔다는 말로 설명을 마치자, 황지호가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감히 신역에서, 신역의 학생에게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다니. 이 몸의 위엄도 땅에 떨어졌군.”
위엄이 떨어졌다기보다는 그간 했던 태만한 선택의 결과물인 것 같은데.
은광한빛보육원이 은광구 외진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하지만, 호족의 수장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면 플레이어가 포함된 조직 폭력배가 대낮에 저리 날뛸 리가 없었다.
“그럼 목우람을 옮길 준비를 당장 시작해야겠군.”
“그래. 아직 신문부 일정은 남았지만, 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미리? 목우람도 지금 귀국할 거다.”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 전에 황지호가 말했다.
“나도 너와 귀국할 거니까.”
간만에 하는 해외여행을 아주 제대로 즐기고 있어서 더 놀다 올 줄 알았는데.
도와주더라도 분신으로 할 줄 알았지만 아닌가 보다.
* * *
은광고 연구동 구역 광림 연구 4관, 은영관 지하.
적호의 영역인 이 건물 안에 최근 김신록 전용 연구실이 생겼다.
생겼다기보다는 예전부터 마련된 공간을 적호가 내어 줬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셨던 것 같은데.’
연구실 안은 김신록이 주로 애용하는 브랜드의 학용품, 사무용품이 비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비품 중에는 한정된 기간 정해진 수량만이 판매되는 고급 펜, 메모지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발매 시기 등을 고려해 보면 급하게 구비한 것 같지 않았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어. 어디에서 자랑할 만한 아들이 되고 싶어.’
이미 적호는 친우들에게 제 아들을 자랑하고 다녔지만, 김신록은 그렇게 생각했다.
김신록은 제 이름이 새겨진 카드키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다 은영관 밖으로 나섰다.
은영관 앞에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록아.”
실눈을 떠서 옥색의 눈동자를 감춘 용제건이었다.
김신록의 눈에는 용제건이 붙임성 있게 손을 살랑거리는 것도 얄밉게 보였다.
“왜 왔어.”
“연락을 안 받아서 왔지. 아직도 그때 일로 토라져 있어? 나랑 의신이 덕분에 아버지랑 친해졌잖아.”
“왜 왔냐고!”
고마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김신록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낯이 뜨거워지고 용제건을 한 대 치고 싶어졌다.
완력 차를 절감한 것도 자존심이 상했고…… 하여튼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용제건의 연락을 무시했다.
“여기에 온 이유는 반반인데.”
“뭔데.”
“반은 너를 놀리는 거고…….”
파파팟!
녹색의 압핀이 공기를 찢고 용제건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나.
“신록아, 이런 거 함부로 던지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다섯 개 중 하나는 이계 금속으로 만들었네? 어쩐지 압핀 하나가 유난히 빠르게 날아오던데. 언제 이런 수고를 들였어?”
한 손으로 다섯 개의 압핀을 거뜬히 잡아 낸 용제건이 김신록이 직접 제작한 이계 금속 압핀을 관찰하고 있었다.
틈을 노려서 적어도 당황한 얼굴을 보거나 거슬리는 긴 머리카락을 일부라도 잘라 내고 싶었는데 용제건은 그저 신나 보였다.
김신록이 분한 표정을 숨기고 노려보니 용제건이 실눈을 휘며 웃었다.
“슬슬 화낼 것 같으니까 본론을 말할게.”
“내가 아직 화가 안 난 것 같아?”
“알았어, 알았어.”
파아앗!
다음 순간,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는 공간술이 전개되었다.
시안색의 공간 속, 용제건이 입을 열었다.
“그 ‘흉내꾼’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 말을 듣는 김신록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렇지 않아도 김신록도 ‘흉내꾼’ 탓에 머리가 복잡했다.
김신록은 여태까지 사로잡은 웅족의 고문과 관리, 그에 관한 관찰과 기록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
문제는 최근 백호가 직접 고문을 하겠다고 ‘흉내꾼’을 찾아오면서 생긴 것이었다.
‘최근 들어 백호 님께서 고문을 자행한 흔적이 하나도 없었어.’
처음 백호는 직접 웅렵조로 저 ‘흉내꾼’의 살을 저몄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진족 특유의 자체 회복 능력으로 상처가 수복되기까지에 걸리는 시간과 양상은 개체 별로 다르긴 하지만, 평소보다 빨리 회복되었다기엔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백호 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거지?’
육체적인 고문이 아닌 정신적인 고문일까?
그러나 고문에 서툰 백호가 그런 고차원적인 기술을 사용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백호가 은광고의 학생을 죽음의 위기로 내몬 ‘흉내꾼’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지켜 주고 제 스승이기도 한 백호를 의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백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백호 님께서는 생각이 있으실 거야.’
용제건은 대답하지 않고 불안하게 눈을 깜빡이는 김신록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 ‘흉내꾼’은 여태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적어도 김신록 자신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제건이 묘하게 웃는 걸 보지 못하고, 김신록은 등을 돌렸다.
* * *
아직 신문부 취재 일정이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1학년생 두 명이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면 크게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다.
목우람이 1학년 0반이었던 덕이다.
“그래…… 반 친구 몸 상태가 많이 걱정이 되겠지.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으니 해외에 계속 있기 불안하겠구나. 같이 한국으로 가지 못해 미안하다.”
제갈재걸은 오히려 미안해하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은 없는지 거듭 물어 왔다.
그 말을 듣는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행여 제갈재걸이 귀국한다고 할까 봐 숨도 못 쉬고 지켜봤다.
숨도 못 쉬던 0반 선배놈들은 곧 탄성을 질렀다.
“그럼 아쉽지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제갈 선생님.”
“아자!”
“잘 가!”
홍규빈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주먹을 불끈 쥐거나 하이파이브를 해 대기 시작했다.
그들 입장의 희소식은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럼 나도 갈까요?”
“살펴 가십쇼!”
불청객 서돌도 귀국 의사를 밝히자 서돌의 정체를 아는 문새론이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황지호는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목우람을 수송하는 과정에서 방패가 하나 더 늘어난다는 생각에 넘어가 주기로 한 것 같았다.
귀국 준비는 금방 끝나 황지호가 대기 시킨 전세기 앞.
수트 차림의 호족 여섯이 잠들어 있는 목우람을 데리고 등장했다.
“오는 길에 별일 없었나?”
“명령은 무사히 수행했습니다만, 추가로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뭐지?”
“이동 중에 ‘거북’과 자주 마주쳤습니다. 적의는 없어 보였습니다.”
거북이라면 중국에 터를 잡은 이들로, 현무를 따르는 진족이었다.
‘설마 현무가 도와준 건가……?’
야시에서 마주쳤을 때는 개입할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진족이 워낙 변덕스러운 존재라서 확실하게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이동하지.”
보고를 들은 황지호가 손짓해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탑승을 시작했다.
그리고 비행기 안.
옆 좌석에 앉은 황지호에게 물었다.
“너는 남을 줄 알았는데.”
“내가?”
“한반도에 분신이 남아 있잖아. 본신은 여기에서 여행을 즐기고, 도울 일이 있으면 분신을 움직이면 되니까.”
내 말을 들은 황지호가 차를 마시는 걸 멈췄다.
“내가 천신께 빈 소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개천신화는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거의 암기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
“그래. 천신께서는 내 소원을 이루어 주고 나를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게 했어. 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주변에는 어느 사이엔가 황지호가 친 결계가 세워져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