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소원을 이룬 대가 (6)
먼 옛날, 신화의 시대.
외적을 격퇴한 호족이 웅족의 배신으로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
그 당시 한반도에서 최고의 무위를 자랑하던 백호가 광오하게 선언하였다.
—나의 형제와 친우를 배신한 곰에게 나의 이빨, 백아(白牙)에 죽을 자격은 없다.
백호는 그의 형제 은호가 직접 내린 대검, 눈이 아릴 정도로 새하얀 백아를 봉인했다.
그 대신 백호와 어울리지 않는 검붉고 투박한 웅렵조(熊獵爪)를 들었다.
곰을 사냥하는 발톱, 웅렵조는 수많은 웅족을 도륙하고 분쇄하며 파괴하였다.
웅렵조는 백호가 추구하는 정적이며 고고한 무(武)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순한 ‘병기’였다.
—네놈들이 나의 진정한 검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추한 발톱으로 무참히 죽여 주마.
백호의 선언 앞에 웅족의 전사들은 절망했다.
웅족의 전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족을 배신한 것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일족을 위해 싸우고 당대 제일의 검사가 휘두른 검에 쓰러지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래서 백호와 마주한 웅족의 전사들은 백아가 아닌 웅렵조에 죽는 것에 모욕감과 허무를 느꼈다.
—백아를 들어라, 백호! 네 진정한 무위를 보여라!
—네 놈도 무사라면 그 흉한 발톱이 아닌 네가 자랑하는 그 대검을 들어라!
웅족의 전사들은 모든 수를 동원해 백호를 협박하고, 그에게 애원하며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백호는 웅족을 섬멸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백아를 부르지 않았다.
웅족의 수장이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퇴를 명령할 때까지 웅족 중 그 누구도 백아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은광고등학교의 부지 안, 청랑호 벽사의 결계 너머의 은련관 서방칠수(西方七宿) 아래.
호족에게 사로잡힌 웅족의 수장의 오른팔, ‘흉내꾼’은 백아 앞에 서 있었다.
“이게…… 백아……!”
백호가 들고 있는 눈부신 도신을 홀린 듯 바라보던 ‘흉내꾼’이 입을 열었다.
“……검을 다오.”
파아앗!
백호가 손짓하자 하얀 이능파가 대검의 형체로 바뀌었다.
무기를 소환하는 백호의 광림이 발동한 것이다.
백호는 대검이 실체를 갖추자 말없이 ‘흉내꾼’에게 던졌다.
휙!
백호가 소환해 던진 무기를 손에 쥔 ‘흉내꾼’이 미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하!”
‘흉내꾼’이 손등의 핏줄이 터질 기세로 검붉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하하핫! 하하하하하하! 내가, 이 내가 웅렵조를 드는 날이 오다니!”
백호가 ‘흉내꾼’에게 건넨 대검은 웅렵조였다.
* * *
황명재단의 로고가 새겨진 차는 은광고 정문 안으로 바로 진입했다.
‘평소엔 정문 앞에 도착하면 내려야 했는데.’
은광고 결계에 등록된 이동 수단은 드물었다.
그렇기에 보통 약속을 잡거나 에어 택시를 부를 땐 정문 밖에 대기하는 게 보통이었다.
새삼 지금 타고 있는 에어 셔틀이 황명재단의 것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딩동.
정문을 통과해 거주 구역으로 향할 때, 공청훤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공청훤] 한이와 교직원 전용 사택 건물로 이동하는 중이에요.
[공청훤] 1층 휴게실에서 한이의 얘기를 듣고 있을게요.
사월세음과 권레나가 감시하고 있었을 텐데, 한이는 두 사람의 어설픈 감시망을 뚫고 탈출했다가 공청훤에게 잡힌 모양이다.
‘한이가 움직였어. 그 용역 업체에서 협박 메시지를 보냈구나.’
협박 메시지가 없다면 한이가 당장 움직일 이유가 없었을 테니, 무언가 있던 게 분명했다.
이대로 거주 구역으로 가서 한이가 받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음 수를 생각하는 게 좋겠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황지호가 디바이스에 온 전화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 녀석이 지금 나한테 연락하는 거지?”
“누군데?”
“용제건. 불길하군. 어지간한 일로는 연락을 하지 않을 텐데.”
용제건이 연락했다고?
용제건은 발이 넓은 편이지만 유희계 용답게 단순한 인사치레로 연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 탓에 게임 속에서도 용제건의 연락을 받은 이들이 긴장하는 장면이 꽤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황지호 이 노친네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전화를 했는데 왜 안 받는 것인가.
“받아 봐.”
황지호를 재촉하니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디바이스를 스피커 통화 모드로 전환했다.
[황호 이사장 씨, 안녕.]
“무슨 일이지?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신록이가 습격당했어.]
김신록이 습격당했다는 말에 황지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김신록은 무사할 거야. 무사하지 않았다면 용제건이 황지호한테 전화나 하고 있을 리가 없지.’
나와 같은 생각에 미친 듯 황지호는 날이 선 이능파와 마력을 갈무리하고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무사한 거겠지? 지금 어디냐.”
[광림연구4관, 은영관이야.]
황지호가 턱짓을 하자 주거 구역으로 향하던 에어 셔틀이 연구동 구역 쪽으로 급히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지금 은영관에 있다고? 그렇다면 은광고 안에서 습격이 있었다는 뜻이잖아.’
은광고 안에서.
그것도 후예인 김신록이.
의문이 깊어지는 가운데 용제건이 말을 이었다.
[지금 한반도야? 신록이 말에 의하면 황호 이사장 씨가 귀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데.]
“그래. 지금 은광고다. 바로 그쪽으로 가겠다.”
[이쪽으로 오는 것보다 습격한 자를 잡아 줬으면 하는데.]
“습격한 자의 정체를 아는가 보군. 말해.”
용제건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 너머로 소음이 들렸다.
귀를 기울여 보니 다투는 소리 같았는데 김신록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말하지 마! ……황호 님께 보고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분과 대화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신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저번처럼 용제건에게 완력으로 밀려 제압된 듯했다.
완전히 조용해지자 용제건이 답했다.
[습격자의 정체는 백호 씨야. 기록기기를 확인해 보니 ‘흉내꾼’을 은영관 밖으로 데리고 나갔던데.]
“……!”
황지호가 그 말을 들은 즉시 화면을 하나 더 전개해 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면에 뜬 통화 대기 시간이 길어져도 백호는 응하지 않았다.
‘백호군이 김신록을 공격하고 무단으로 흉내꾼을 데리고 나갔다고?’
김신록이 용제건을 말리는 것을 보니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또 백호군이 김신록을 공격했다면 김신록이 쉽게 제압당한 것도 이해가 갔다.
백호군이 친우의 아들인 김신록을 공격할 만한 이유.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백호군이 그런 일을 했다면 분명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신록이 헛짓 못 하게 지키고 있도록.”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통화를 마친 황지호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 에어 셔틀이 향하는 곳은 은광고 조경 구역이었다.
“은련관으로 가는 거야?”
“그래. 백호는 신역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은광구 내 수호자의 권능이 닿지 않는 장소 중에 백호가 있을 만한 곳은 은련관뿐이다.”
한이가 걱정되긴 하지만, 공청훤이 한이에게 해가 될 일이 발생하는 걸 지켜볼 리도 없으니 조금 늦어도 괜찮을 거다.
“은련관으로 간다.”
* * *
은광고 조경 구역, 청랑호 주변 호수길.
안개가 짙게 서려 있는 곳에 내린 황지호가 혀를 찼다.
“결계의 강도를 높여 놨군. ……해제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황지호의 말대로 백호군이 친 벽사(辟邪)의 결계가 강화되었는지, 청랑호의 안개는 여느 때보다 짙고 넓게 퍼져 있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에는 이런 상황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군.”
안개를 보는 황지호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래. 하지만 그렇게 행동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야.”
게임에서는 없던 전개였지만 확신을 갖고 말했다.
백호군이 자신의 친우를 배신하는 상황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결계를 해제하는 건 내가 할게.”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백호군의 카드가 한 장 흘러나와 빛으로 변하다 사라졌다.
곧바로 백호군의 광림과 스킬을 연달아 사용했다.
〈해당 캐릭터의 광림, ‘파운참뢰(破雲斬雷)의 백아(白牙) 소환’을 사용합니다.〉
“백아까지 소환이 가능하다니……!”
황지호가 감탄사를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벽사(辟邪)’를 사용합니다.〉
스킬 발동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백아가 빛을 뿜었다.
하얗게 물든 시야 저편, 안개를 향해 백아를 내리그었다.
서걱.
안개를 베는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무언가가 잘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안개가 걷혔다.
안개가 걷히자 문 위의 현판, 은련관(銀練館)이 보였다.
“……훌륭하군. 진정 백호의 힘을 이 정도로 사용할 줄이야.”
마력을 눈가에 두르고 ‘안광’ 스킬을 발동했는지 황금의 눈을 한 황지호가 말 그대로 눈을 금색으로 반짝이며 말했다.
“그대로 백호의 힘을 사용해라. 도약한다.”
백아의 소환을 해제했지만, 여전히 백호군의 광림을 발동한 상태로 은련관 안으로 들어갔다.
은련관에 들어서자 멀리서 강렬한 이능파의 충돌이 느껴졌다.
카아앙! 콰앙!
소리의 진원지는 백호군과 몇 번 대련했던 서방칠수의 하늘이 있는 중앙 돔이었다.
도약하면 할수록 소리는 가까워지다 이내 뚝 멎었다.
나와 나란히 도약하던 황지호가 급히 가속해 서방칠수가 있는 중앙 문을 열었다.
쾅!
“백호!”
이능으로 만든 일곱 개의 별자리가 떠 있는 하늘 아래.
‘흉내꾼’이 쓰러져 있었다.
힘을 개방한 백발 백안의 백호군이 붉게 물든 백아를 들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황지호는 몇 초간 말을 못 하고 있다가 경악에 찬 상태로 입을 열었다.
“너…… 은호가 만든 백아를 저 더러운 곰에게 휘두른 거냐……!”
백호군은 백아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답했다.
“‘흉내꾼’과 거래했다. 백아와 검을 맞대는 게 일생일대의 소원이라더군.”
“수장의 오른팔이었던 이 ‘흉내꾼’의 소원을 왜 네가 들어주는 거지? 김신록을 공격하고, 은호의 백아를 쓰면서 네가 한 맹세를 어기면서까지……!”
“……네가 그리 반대할 줄 알았다.”
황지호의 분노가 그대로 마력으로 표출되었다.
파직하고 금빛의 스파크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튀어 다녔다.
황지호의 적의가 백호군을 향하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서늘한 눈으로 황호를 바라봤다.
“그 소원을 이루어 준 대가로 ‘그들’의 행방을 들었다.”
“누구의 행방을 찾았다는 거지? 그 행방이 그렇게도 중요했나! 대답에 따라 수호자의 권능으로 수인인 너를 구속하겠다.”
황금의 마력이 뿜는 압력이 더 거세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 백호군이 입을 열었다.
“청호와 신인.”
“뭐……?”
“그들은 인간이 되었다더군.”
황지호가 두른 마력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바람도 어느새 그쳐 조용해진 은련관에서 백호군이 말을 이었다.
“신인의 진짜 소원은 ‘인간이 되는 것’이었고, 천신이 이를 들어주었다 한다.”
* * *
“도련님, 오랜만입니다.”
도련님이라는 단어를 무시한 홍규빈이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언론 홍보실 언론 1팀 팀장 홍규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 실장님.”
“그러면 도련님이 원하시는 대로 홍 팀장님이라고 불러 드리겠습니다.”
홍규빈이 내민 명함을 정중히 받아 든 최 실장이 물었다.
“홍 팀장님, 그 ‘시 못 쓰는 시인’께서는 잘 계십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최 실장은 악의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련님 소원을 이루어 주는 대가로 평생의 꿈을 포기하신 그 굉장한 선생님, 남옥시인(藍玉詩人) 말입니다. 소식이 궁금해서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