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소원을 이룬 대가 (7)
개천신화에는 등장했지만, 플마고 게임 속에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등장하지 않는 이들이 둘 있었다.
천신의 아들이자 신화계 호족을 이끌고 이 땅을 다스렸다는 신인.
그 신인을 항상 모시고 싶다고 천신께 청한, 다른 신화계 호족들의 친우인 청호.
플마고의 모든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오로지 이름, 배경 설명으로만 등장하는 이 둘에 대해서 밝혀진 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찾을 단서가 없던 건 아니었다.
‘신인과 청호는 같이 있을 가능성이 커.’
게임 속에서 적호처럼 신화에서 지워진 게 아닌 한, 개천신화에 남은 신성한 범들의 소원은 모두 이루어진 상태였다.
백호는 신역의 수인이 되었다고 하나, 천신의 시련을 통과하여 수인의 신분을 벗고 제힘을 되찾았을 때 ‘어디에도 갈 수 있는’ 권능을 다시 얻었다.
황호는 게임에서 등장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는’ 권능을 마음껏 발휘해 분신을 부렸다.
그렇다면 기록이 남아 있는 청호의 소원도 아직 건재할 가능성이 컸다.
‘청호와 신인, 둘 중 하나의 행방을 잡으면 둘 다 찾을 수 있어. 그리고 둘 중에 단서가 있던 건…….’
신인의 존재는 게임 속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다.
이 세계에는 천신과 신인을 극도로 증오하며 영원히 이 둘을 소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워 실행했던 이들이 있었으니까.
그 집단의 이름은 진웅팔선(眞熊八仙).
진웅팔선은 오로지 천신과 신인을 제거하기 위해 손을 잡은 웅족의 최대 전력이었다.
이들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 둘은 실성했고, 셋은 깊은 잠에 빠지긴 했다.
신인의 제거에 실패했다는 말은 즉,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신인과 접촉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 웅족을 상대로 청호와 신인의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왔었다.
그래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백호군은 어째서 이렇게 움직인 거지?’
청소년 수련회 사건 당시,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백호군의 힘을 사용한 나를 본 ‘흉내꾼’은 이렇게 말했다.
—천신이 인간에게도 가호를 내렸나, 그럴 리가, 천신에게 그럴 여유가 남아 있을 리가 없는데! ……잠깐, 진족? 방금까지 인간이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진족의 힘을 보이는 것이냐!
—……아니, ‘그런 일’도 있었으니 ‘그 반대의 일’도 있을 법하지.
이 대화는 황지호와 백호군, 적호, 김신록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이 대화 내용을 통해 청호와 신인의 단서를 잡아낸 게 백호군뿐인 게 석연치 않았다.
‘황지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은데…… 만약 사전에 알았다면 이런 얼굴은 하고 있지 않았겠지.’
마음에 걸리는 게 남긴 했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작은 단서를 놓치지 않고 친우의 행방을 밝힌 건 전혀 이상하지 않긴 했다.
파아아…….
황지호도, 백호군도 입을 다문 와중.
광림을 거둔 백호군이 손에 든 백아와 흉내꾼 근처에 떨어져 있던 웅렵조가 사라졌다.
“백호, 너는 어떻게 그 사실을 눈치챈 거지?”
“우리보다 더 집요하게 사라진 신인을 찾던 집단이 있었던 걸 기억하나.”
“진웅팔선을 말하는 건가.”
“우리는 지켜야 할 게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의무를 저버리고 신인의 행방만을 쫓았다.”
“‘흉내꾼’은 진웅팔선과 선이 닿아 있었어. 넌 그걸 알고 거래한 거겠지? 그렇다 해도 청호가 인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네가 어떻게…….”
백호군의 서늘한 얼굴을 본 황지호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여러 생각이 밀려들어 와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백호, 설령 네 의도가 청호와 신인을 찾기 위함이었다 해도 네가 네 맹세를 어겨 가면서 이 ‘흉내꾼’과 거래를 할 필요는 없었다.”
“…….”
“비록 지금 ‘흉내꾼’이 입을 다물고 있다 해도 시간을 들여서 정신을 붕괴시키면…….”
“그러면 늦는다.”
백호군이 딱 잘라서 말했다.
늦는다고?
‘마치 시간제한이 있다는 걸 아는 듯한 말투인데…….’
흑막이 이 세계에 초래할 배드 엔딩을 생각하면 백호군의 판단은 옳았다.
‘흉내꾼’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시간제한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것처럼 말하는 백호군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청호와 신인을 빨리 찾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와 상담했으면…….”
“지금처럼 의견이 엇갈렸겠지.”
백호군과 황지호가 한참을 서로 마주 봤다.
둘 다 안광 스킬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 데도,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결국 먼저 꺾인 건 황지호 쪽이었다.
“……‘흉내꾼’은 살려 둘 건가?”
“그래. 내가 들어주겠다고 한 건 ‘백아와 검을 맞대는 것’까지다.”
백호군은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시선으로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는 ‘흉내꾼’을 내려다봤다.
“백아로 절명하는 영광까지 줄 생각은 없다.”
“이미 과분한 영광을 누린 것 같은데.”
황지호는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황지호가 백호군에게 이런 어조로 말하는 건 처음 봤다.
“이유가 무엇이든 네가 우리의 후예를 공격하고 수장인 내 뜻에 반한 짓을 한 건 변하지 않아. 당장 이것을 원위치에 돌려놓고 내 저택에서 대기하도록.”
백호군은 저 말에는 토를 달지 않고 ‘알았다.’라고 짧게 답했다.
* * *
은광고 거주 구역 교직원 사택 건물, 1층 교직원 휴게실.
방학을 맞은 탓인지 한산함을 넘어 인적이 없는 이 공간에 테이블을 두고 공청훤과 한이가 마주 앉았다.
한이는 공청훤이 직접 만든 시럽이 잔뜩 들어간 개암나무 열매 아이스티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다른 걸 마실래요?”
“……아뇨.”
“한이가 단 음료를 두고 보고만 있다니. 많이 심각한 문제인가 봐요.”
공청훤의 입 모양을 읽은 한이가 움찔했다.
한이가 뒤늦게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얼음 잔을 잡았다.
빨대로 내용물을 한 모금 삼켰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네요. 평소보다 시럽을 많이 넣었는데요.”
속을 훤히 읽는 듯한 공청훤의 태도에 한이가 우물쭈물하다 잔을 내려놨다.
한이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공청훤은 늘 이렇게 속을 훤히 들여다봤다.
‘……이번 일은 공청훤 선생님도 관계가 있으니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이대로 공청훤에게 붙잡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공청훤에게 피해가 갈 게 분명했다.
차라리 모든 걸 밝히고 이번 건을 한이가 혼자 해결하도록 공청훤을 설득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한이는 디바이스를 켜고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공청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가시려고요?”
“다녀오면 알려 드릴게요.”
공청훤이 그 용역 업체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는 걸 눈치챈 한이가 급히 말했다.
“가지 마세요! 아니, 가실 거면 저도 같이……!”
“안 돼요.”
공청훤이 디바이스에 짧게 메시지를 입력하자 휴게실 문이 팍 열렸다.
휴게실 문밖에서 등장한 건 권레나와 사월세음이었다.
“공청훤 선생님,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이를 맡겨도 될까요?”
“네! 절대 여기서 못 나가게 할게요!”
두 사람은 결연한 얼굴로 한이를 바라봤다.
* * *
“신인과 청호가 인간이 되었다고……?”
에어 셔틀에 올라탄 황지호는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백호군을 앞에 뒀을 땐 분노가 앞섰지만 그게 좀 사그라드니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황지호가 권제인 내한 공연 당시, 30대의 황호의 모습으로 한 말이 떠올랐다.
—청호는 ‘신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라는 말을 남기고 아무 예고 없이, 미련 없이 사라졌어.
백호군이 신인의 진짜 소원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청호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신인의 소원을 이뤄 주면서도 곁에 있는 방법을 찾았을 거다.
그리고 그 결과, 청호는 함께 인간이 되는 길을 택한 모양이다.
“인간과 혼혈이었던 신인은 인간이 되기 쉬웠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청호는…… 대체 무슨 대가를 치른 거지? 인간과 진족은 근본부터 다른 것을.”
그건 나도 황지호의 말에 동의했다.
용왕신이 아끼는 여의주에서 태어난 용제건이나,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서 나온 고사성어,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고사를 기원으로 하는 나비령을 생각해 보면 그러했다.
인간과 다른 근원을 타고 난 진족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건 생각하기 힘들었고, 인간의 생을 얻은 이후의 모습도 상상이 안 갔다.
‘……인간이 되었다면 진족에 비해 수명이 아주 짧을 텐데.’
아직 이계 충돌이 일어난 지 100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초반에 각성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이계와 에너미에 대한 준비와 지식이 부족했던 암흑의 시대에 순직했다.
그 탓에 플레이어의 수명에 대한 통계는 아직 적다.
송만석, 탁거산, 홍경복 같은 노장들이 70을 훌쩍 넘기고도 정정한 모습을 보이자 ‘이능이 극에 달하면 수명이 늘어난다.’라는 가설이 세워지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었다.
인간의 수명을 고려해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청호와 신인은 살아 있을까?”
둘이 사라진 시기가 최근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그걸 염두에 두고 물었지만, 황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 둘이 사라진 건 아주 옛일이다. 그 직후에 인간이 되었다면 수명이 다하고도 남았을 거다. 첫 번째 인간의 생에서 수명이 다한 후에 윤회의 굴레를 몇 번이나 넘었겠지.”
“윤회의 굴레?”
“그래. 천신과 인연이 깊은 신인이라면 다시 몇 번이고 이 땅에 환생했을 거다. 인간의 환생은 기약할 수 없지만, 신인과 청호의 혼을 갖고 천신의 가호를 받는다면…….”
황지호는 확신이 없어 보였다.
이걸로 조사해야 할 게 더 늘었다.
윤회의 굴레와 인간이 된 신인과 청호의 행방.
황지호가 생각에 잠겨 대화가 끊긴 사이에, 내가 가진 정보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조의신, 너는 내 힘은 사용할 수 없다고 했지. 백호의 힘 말고도 사용할 수 있는 호족의 힘이 있나? 신인의 힘은 쓸 수 있나?”
“아니.”
황지호가 갑자기 플레이어의 궤적에 대해 언급한 건 청호 때문인 것 같았다.
‘청호, 혹은 신인의 힘을 쓰면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백호가 아닌 다른 호족, 게임 속 황지호와 적호는 NPC였다.
호족 중에서 플레이가 가능한 캐릭터는 백호군 하나밖에 없었다.
신인과 청호는 그저 언급만 되고 아예 나오지도 않았으니 고려할 대상도 되지 않았다.
“호족 중에서는 백호뿐인가.”
황지호가 다시 생각에 잠긴 사이, 에어 셔틀은 거주 구역에 도착했다.
교직원 사택 건물 앞에서 정지한 에어 셔틀에서 내리기 전.
내릴 준비를 하는 황지호에게 말했다.
“나 혼자 가도 되는데.”
나름 황지호를 배려해 한 말이었지만, 황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지금 백호와 이야기하면 냉정하게 굴 자신이 없다. 너와 가겠다. 한이를 귀찮게 하는 남궁 그룹의 세작도 처리해 두고 싶다.”
그렇게 황지호와 내려 도착한 교직원 사택 건물, 1층 교직원 휴게실 앞.
콰앙! 쿵! 와장창!
깨진 창문 사이로 가구의 파편이 튀어나왔다.
창문이 깨지자 그 사이로 실랑이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내 줘. 두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싫어!”
“안 돼요!”
한이와 권레나, 사월세음의 목소리였다.
드문드문 대화하는 사이로 이능파가 충돌하고 물리적으로도 무언가가 부딪치고 터지고 깨지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렸다.
‘설마, 이건…….’
나는 청호와 신인의 존재를 들었을 때만큼 충격을 받았다.
교직원 휴게실에서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의 첫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