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소원을 이룬 대가 (8)
국민망겜 플레이어마이스터고교의 고이고 썩은 물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화석.
나는 이 수식어에 한 점 부끄러움도, 어긋남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 와서 감히 나 자신을 그렇게 불러도 될지 의심이 생길 때가 있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인 사월세음과 권레나 그리고 NPC인 한이가 싸우고 있는 지금이 그랬다.
콰쾅! 펑! 휙! 와장창!
부서진 화분이 창문과 충돌해 강화 유리가 완전히 박살 났다.
그 덕에 안이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
엉망이 된 교직원 휴게실 안.
사월세음이 바람술을 사용한 여파로 인해 내부에서 가구의 파편이 휘날리고 있었다.
“공청훤 선생님도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자꾸 가려고 하세요? 혹시 디바이스에 왔다는 메시지에 주술 코드가 심어져 있었나요? 미치셨어요?”
반 친구에게 미쳤냐고 묻는 사월세음의 모습이 낯설었다.
반 친구를 향해 매섭게 채찍을 부리는 권레나의 모습도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촤아악! 휙!
사월세음이 일으킨 바람을 뚫고 권레나가 휘두른 채찍이 한이를 구속하려 했다.
그러나 채찍의 끝이 닿기 전 한이가 손날로 채찍을 옆으로 흘려 궤도를 바꾸었다.
황지호가 ‘움직임이 괜찮은데. 방학 중에도 태호권을 착실히 수련했군.’이라고 평가하는 게 태호권의 기본 기술을 응용한 동작 중 하나인 듯했다.
“……비켜. 그러다 다쳐.”
한이의 실력을 잘 아는 두 사람이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둘은 한이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외쳤다.
“……다치지 않게 노력할 거예요!”
“그래. 우리 중에 누가 다치면 회복 아이템으로 치료하면 돼. 한이가 좀 다치더라도 안 보낼 거야.”
“레나 말이 맞아요. 그 사람들은 엄청 위험해 보였어요. 차라리 학교 양호실에서 쉬시는 게 안전할 거예요!”
“응, 우리 학교 양호실 시설 좋더라. 침대도 푹신하고, 거기에 비치된 과자도 맛있어.”
“그럼 한이를 양호실로 보내는 게 좋겠네요!”
“우리가 간병해 주자!”
“네!”
반 친구를 양호실로 보내겠다고 대놓고 상담 중인 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라니……!
정신이 아득해지긴 했지만, 잘 생각해 보니 한이를 위해서 행동한다는 점에선 여전히 착하고 좋은 아이들이었다.
그래,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은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다.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건물이 완파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반 아이들의 첫 싸움을 응원하기로 했다.
“둘 다 봐주지 않을 거야……!”
2 대 1이긴 했지만, 사실 우리 반 최약체인 사월세음과 권레나는 한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셋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건 사월세음이나 권레나와 달리 한이가 망설이고 있는 탓이었다.
봐주지 않겠다는 말과 달리 한이는 두 사람이 다칠까 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청호와 싸웠을 때가 떠오르는군. ……그 녀석은 나를 봐주지 않았는데.”
노친네가 태호권으로 응전하는 한이를 보며 옛 추억에 잠겨 있었다.
방금까지 기분이 저조했던 노친네는 어느 사이에 들뜬 얼굴로 반 아이들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었다.
“아직 다리 기술이 어설프군. 소질은 뛰어나지만, 아직 나에 비해 수련이 부족해.”
5천 살을 산 노익장과 17세 고등학교 1학년생의 수련 시간을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처웃으며 훈수를 두고 있는 이사장은 학교 건물이 박살 나는 중인데도 별 신경을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얄밉게 한마디씩 던지며 싸움 구경을 하는 게, 싸움 구경 좋아하는 은광고 학생의 교풍이 이사장한테서 시작되었나 싶었다.
그리고 은광고의 교풍에 따라 싸움 구경을 하러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야, 0반 애들 싸운다!”
“교직원 휴게실에서 싸우는 중임요!”
누가 그렇게 외친 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에어보드를 타고 몰려들었다.
“뭐? 2학년? 3학년?”
“2학년 0반은 지금 교무부장 쌤 따라서 중국에 갔고 3학년 0반은 무인도에서 부트 캠프하느라 구르는 중인데……!”
“1학년인가 봐!”
“걔들 학교에 나오긴 함?”
주변이 구경꾼으로 시끄러워졌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열심히 싸우는 중이었다.
‘가능하면 반 아이들끼리 결착을 냈으면 했는데.’
소문이 크게 나는 것도 좋지 않을 텐데.
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말리려 할 때였다.
“의신아, 물러나 있어.”
“…….”
내 앞을 지익회장 성시완이 가로막았다.
해탈한 표정의 성시완 옆에는 말없이 서 있는 계이담을 비롯한 지익회 구성원들이 있었다.
주거 구역에서 일을 치르다 보니 지익회까지 얘기가 간 것 같다.
“하하하, 언젠가 1학년 0반 아이들도 사고를 칠 날이 올 줄은 알긴 했지만…… 2학기 시작 전까지는 버틸 줄 알았는데.”
아련하게 말한 성시완이 계이담에게 말했다.
“이담아, 네가 애들 말려.”
“성시완 선배님, 제가 말릴게요.”
그러나 내 말에 성시완이 고개를 저었다.
“1학년은 이능 조절이 상급생보다 미숙한 경우가 많아. 우리한테 맡겨. 나보다는 이담이가 중재에 소질이 있어.”
계이담이 이능파가 실린 바람과 채찍과 주먹과 발길질로 난장판이 된 휴게실 안으로 훌쩍 뛰어들어 갔다.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누구세요?’, ‘잠깐만…….’, ‘뭐야, 이능이 잘 안 써져!’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잠잠해지고 몇 초 후, 만신창이가 된 우리 반 아이들 셋과 멀쩡한 계이담이 나타났을 때.
휙!
때마침 누군가가 에어보드 위에서 뛰어내리며 등장했다.
우리 반 담임, 함근형 선생님이었다.
함근형 선생님의 흉흉한 얼굴에 신나게 구경하고 있던 은광고 구경꾼들이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옷 여기저기가 찢기고 피부가 쓸린 상처가 있는 반 아이들을 본 함근형이 얼굴만큼이나 무섭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 다 교무실로 와라. 아니, 그 전에 양호실부터 가자.”
구경하던 학생들이 겁을 먹을 정도로 무서운 얼굴과 목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처음으로 싸운 반 아이들을 걱정하는 티가 났다.
한편, 사월세음과 권레나가 양호실에 간다는 말에 기뻐했다.
“와, 양호실로 간다! 한이야, 가자!”
“잘됐네요! 빨리 가요.”
사월세음과 권레나가 한이의 양옆으로 꼭 붙어서 그렇게 말하자 함근형 선생님은 영문을 몰라 했다.
“……싸운 게 아니었나?”
반 아이들에 이어 지익회 임원들, 함근형 선생님까지 등장하자 이대로 공청훤을 따라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한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함근형 선생님! 공청훤 선생님이…….”
“공청훤 선생님은 괜찮으실 거야. 내가 보고 올게.”
함근형 선생님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된 것 같긴 하지만, 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사월세음도 한마디 거들었다.
“의신이가 보러 가면 아무 문제 없겠네요! 자, 이제 안심하고 양호실로 가요.”
“내가 간호할게!”
“저도요!”
누가 봐도 한이보다 사월세음과 권레나가 더 크게 다쳤는데도 그런 소릴 했다.
한이는 입술을 꽉 깨물며 혼란스러워하다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주소 하나를 말했다.
“……부탁할게.”
한이는 나한테 부탁한 것 같은데 대답은 황지호가 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 몸이 직접 가니 별일 없을 거다. 아, 채찍을 피해 주먹을 날릴 때 발놀림이 미숙하더군. 태호권 기본자세 중 하나인 ‘호랑이 발걸음’과 공격기의 연계가 잘 안 되고 있어. 아직 연습량이 부족한 탓이다. 아침, 저녁으로 100번 이상 복습하도록.”
황지호의 입 모양을 읽은 한이가 대놓고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도 황지호는 ‘하하하하!’하고 처웃었다.
함근형 선생님이 아이들을 인솔해 양호실로 가고 나와 황지호는 공청훤이 갔다는 폐공장으로 향할 때.
뒷정리를 하는 지익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쟤들 싸운 거 맞지?”
“0반 아이들은……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차원에서 사는 것 같아.”
“자동 청소기나 호출하자…….”
“어, 생각보다 많이 안 부서졌어. 보수 작업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역시 1학년 0반 아이들은 얌전하네!”
짧은 대화 속에서도 지익회의 고충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 * *
종로1가, 붉은 사자 팀 빌딩.
가위바위보에서 승리해 염준열의 휴식 시간을 독점하게 된 용족이 넓은 수련실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이능으로 구현한 폭포 옆에도, 동굴 안에도, 연못 아래에도 염준열은 없었다.
‘준열이 성격이라면 쿨 다운도 하지 않고 수련실 밖으로 나갈 리가 없는데…….’
용족이 이능을 끌어 올려 감각을 날카롭게 다졌다.
숨을 고른 용족이 이윽고 대나무 숲 그늘에 앉아 좌선 중인 염준열을 발견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존재감이 흐린 것 같았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준열아! 덥지? 수련실은 바깥 기온이랑 똑같이 맞춰 뒀으니까…… 온도 좀 낮출까?”
“괜찮아요. 전 불꽃을 쓰는 용의 후예니까요.”
“그래도 수분 섭취 잘 해 둬. 자, 이온 음료랑 습식 타올 받아. 오늘 도착한 사전 인터뷰 자료는 디바이스로 보냈어.”
“감사합니다.”
염준열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밝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스승 적벽괴도가 내 준 과제인 ‘기척 죽이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염준열은 내심 초조했다.
초조를 숨기기 위해 디바이스를 켜 인터뷰 자료를 확인하며 말했다.
“오디션 참가자 명단은 확정된 건가요?”
“아직 모집 중이래. 이건 우선 1차로 확정된 플레이어 명단.”
명단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할 예정인 플레이어들의 사진과 간단한 이력이 쓰여 있었다.
홍보가 아직 제대로 안 된 상태였는데 알음알음 참가한 플레이어들이 꽤 많았다.
명단을 확인하던 염준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뇨, 제가 아는 후배들이랑 같은 반인 아이가 있어서요.”
“은광고니? 은광고에서도 이 오디션에 나오는 애가 있었구나…… 그런데 어떤 후배들인데? 준열이랑 많이 친한 후배들이야? 이상한 애들은 아니지?”
용족은 즉시 경계했다.
염준열의 교우 관계는 철저히 체크 중이었지만, 딱히 학교 후배와 교류하던 이력은 없던 탓이었다.
“세음이랑 이전에 저와 체스를 뒀던 의신이요.”
“아, 그…….”
곧바로 체스 대회의 패배를 떠올린 용족이 괴로운 얼굴을 했다.
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청룡이 날카로운 이능파를 쏘아 보냈다.
괜한 소리를 해서 염준열의 아픈 기억을 건드리지 말라는 질책의 뜻일 것이다.
치열한 이능파의 교환을 알아채지 못한 염준열은 명단을 보여 주며 밝게 말했다.
명단에는 분홍 머리를 한 소녀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출연자는 은광고 1학년 0반의 독고미로라고 해요.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1학년 0반 아이들은 등교를 잘 안 하지만요.”
* * *
은광구 외곽, 광일동의 폐공장에 도착한 직후.
황지호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왜 그래?”
“……이능파의 충돌이 느껴진다.”
공청훤 선생님이 싸우는 중인 걸까?
하지만 반 아이들의 싸움도 처웃으며 구경한 황지호가 교사가 좀 싸운다고 저런 표정을 지을 것 같진 않았다.
녹슨 철조망을 뛰어넘던 황지호가 중얼거렸다.
“익숙하고 그리운 기운이 느껴지는군…….”
폐공장 내부로 진입하면 할수록 황지호의 이동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나도 이능파의 충돌을 느꼈을 때, 황지호의 머리카락과 눈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갑자기 왜 이래……!’
황지호가 힘을 개방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황지호는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미로 같은 폐공장 안을 달렸다.
마침내 폐공장 중앙으로 진입했을 때.
멀리서 공청훤이 쇠파이프를 든 남자들을 제압 중인 게 보였다.
“청호……!”
뭐? 청호라고?
그러나 묻기 전에 황지호가 봉을 꺼내 들어 앞으로 달려 나갔다.
황금빛의 이능파와 풍압이 난투극을 벌이던 이들을 덮쳤다.
콰아아아!
섬광이 눈을 덮쳐 앞이 보이지 않아 급히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여전히 시야 안에 빛이 가득했지만, 스킬이 발동하자 이능파의 흐름과 공장 안의 실루엣들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황지호는 일격에 여기 있는 이들을 제압한 건가.’
황지호가 이번에는 싸움 구경을 할 생각이 없었나 보다.
쓰러져 있는 용역 업체의 이들 사이로 서 있는 건 황지호와 공청훤 둘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뭘 하는 거야……!’
황지호가 들고 있는 금빛 봉의 끝이 공청훤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목을 겨누고 있는 무기 끝에서 황금색의 마력과 이능파가 얽혀 눈이 아플 정도로 이글거렸다.
숨을 몰아쉬는 황지호가 물었다.
“그 가호를 어디서 받았지? 어디서 청호의 가호를 받은 거냐!”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