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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20화 (220/925)

43. 변하지 않는 것 (1)

천성헌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천성헌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재벌가의 자제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도는 데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예의까지 바르니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 탓에 천성헌이 술자리에 불려 가는 일이 많았는데 정작 본인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그래도 정중한 태도로 할 말도 다 하고 맺고 끊는 건 칼 같은 천성헌은 술자리 분위기가 나빠지지 않을 정도로 마시면서도 적절히 제 주량을 조절했다.

하지만 그날은 운이 좋지 않았다.

—복학했으면 곱게 지내지 완전 진상이네…….

—왜 자꾸 성헌이 먹이려는 거야? 기싸움하는 거야?

—누가 전화 걸어서 빼내면 안 되나?

—저 진상 눈치 쩔어. 방금 그 방법으로 빼내려다 발신자 이름 보고 눈치까서 벌주 먹였잖아.

그날은 과대표를 맡다가 군대를 늦게 간 선배의 전역일이었다.

전역 직후라 그런지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전 과대표는 지나치게 잘난 후배 천성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전 과대표는 천성헌에게 질이 좋지 않은 싸구려 양주를 잔뜩 마시게 했고, 말리던 현 과대표와 후배들에게 눈치를 줬다.

화석 취급받는 고학번에 나이도 많고 발도 넓은 데다 눈치가 귀신 같은 전 과대표를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 뒤에서 움직여 술자리를 박살 낸 게 나였다.

그 일은 조용히 묻힐 줄 알았는데 며칠 뒤 천성헌이 나를 찾아왔다.

—그날 조교님 부르신 게 조의신 선배님이라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날 전 과대표는 예비군 마크가 붙은 팔각모, 해병대의 전역모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해병대를 나온 전 과대표의 윗 기수에 해당하는 대학원 조교를 그 자리에 불렀다.

해병대 후배가 전역했다는 말을 들은 조교는 그 전 과대표와 접점이 없었는데도 술을 사 줘야겠다며 교내 해병대 전우회 멤버들을 끌고 바로 날아왔다.

그 결과, 전 과대표는 천성헌에게 진상을 부리지 못할 정도로 술이 먹여져 인사불성이 되었고 술자리는 평화롭게 끝났다.

—해병대 출신 선배가 떠올라서 술 사 달라고 부탁한 건데.

감사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서 대충 그렇게 둘러대고 넘어갔다.

그러나 천성헌은 그날 이후로 ‘의신이 형’이라고 부르며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성헌이는…….”

천성헌은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잘난 후배였다.

반면 나는 가까이 지내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는 놈이었다.

취미 생활이라곤 국민망겜으로 악명이 자자한 플마고를 하는 것뿐이니, 나나 천성헌 사이에 공통분모랄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천성헌은 날 잘 따랐다.

암 투병 이후 점점 협소해지는 인간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남은 게 천성헌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천성헌의 선배가 아니었고 이 세계에는 천성헌이 없었다.

“당연히 모르는 사람은 아니겠지. 피를 토하기 직전에 안부를 물은 대상인데.”

“…….”

교신 스킬을 사용할 때, 초상우주의 답신은 밖으로 들리진 않겠지만 질문 자체는 내가 입으로 소리를 내서 한다.

주변에 들릴 리스크도 고려했었다.

그래도 청호와 신인 이야기가 나오면 뒤에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든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답할 생각이 없나 보군.”

황지호는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참 기다리던 황지호가 말했다.

“……오후에는 별채에서 손님을 만날 거다. 그때까지 쉬고 있도록.”

무슨 손님이기에 황명호 대저택에 오고 내가 만나야 하는 거지?

고민했지만, 지금 나도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황지호에게 무언가를 묻기는 좀 그랬다.

“그러면 나는 잠깐 기숙사에 들렀다가 오후에 여기로…….”

……왕! 왕!

혼자 생각할 시간을 확보할 겸, 저택에 묶여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해 한 제안이었지만 올무에 의해 저지당했다.

올무가 내 옷 소매를 물고 베개 쪽으로 잡아당기며 누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화가 나 있는 올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반쯤 앉아 있던 몸을 눕혔더니 금방 눈이 감겼다.

아직 피로가 남아 있던 건지 올무가 자라고 권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눈을 감은지 얼마 안 되어 꿈 없이 잠들었다.

*    *    *

은광구 광일동 은광한빛보육원의 공터.

평소엔 텅 비었던 이곳이 요새 들어 황명재단에서 보낸 차량으로 가득했다.

처음엔 보육원 사람들은 에어 셔틀들을 보고 신기해했지만, 며칠 연속으로 같은 차량을 보다 보니 익숙해진 듯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 수많은 차량 중 가장 안쪽에 주차되어 있던 에어 셔틀은 유독 짙게 선팅이 되어 있었다.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에어 셔틀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위이잉.

언뜻 보기엔 문이 홀로 열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차 안에서 기다리던 이는 문을 열고 들어온 존재를 꿰뚫어 보았다.

“적호.”

파아아…….

20대의 모습을 한 황호가 적호를 부르자 어디선가 붉은 안개가 흘러나와 공기 중에 녹았다.

사라진 붉은 안개 사이로 적호가 적연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황호, 다녀왔습니다.”

“데이터는?”

“원본, 백업본 전부 제거했습니다.”

“그 쓰레기들은?”

“공갈 협박에 직접 가담한 자들은 사고를 가장해 신체의 일부를 파괴해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협박 메시지를 보낸 자의 청력은 영구 손상시켰습니다.”

삣.

적호가 띄운 홀로그램엔 사고로 위장된 현장의 사진들이 있었다.

사진 옆에는 뒷조사를 한 결과가 보고서로 첨부되어 있었다.

“현재 사고를 당한 이들에게 재생 시술을 받을 재력이 없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쓰레기가 하나 안 보이는군.”

황호의 말에 적호가 경찰 병원의 병실 사진과 진료 기록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광일파출소장은 광일파출소 습격 사건 이후 계속 경찰 병원에 입원한 상태입니다. 퇴원 후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수고했다.”

보고를 마치자 황호와 적호, 둘 다 말이 없었다.

적호는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보육원을 응시했다.

옛 친우를 찾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아직 부재중인 듯했다.

최근 적호와 황호는 조의신 덕에 공청훤과 한이가 신인과 청호의 환생임을 알게 되었다.

조의신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공공연하게 이를 밝히면 공청훤과 한이가 표적이 되리라 판단한 호족들은 극히 일부의 존재들에게만 그 사실을 밝혔다.

현재 호족 중에서 공청훤과 한이의 정체를 아는 건 황호, 적호, 백호, 김신록 그리고 청호의 수제자 넷뿐이었다.

“한이를 만나고 왔나?”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적호는 보육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 한이가 보육원으로 봉사 활동을 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탓이었다.

“지켜본 소감은 어떻지?”

“어제 지익회관 기숙사 식당에서 1학년 0반 학생들과 식사를 하고 있던 것을 봤습니다. 여전히 입이 짧은 것 같더군요.”

“단 음식은 잘 먹는다.”

황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해하면서도 제가 고른 음식을 먹는 한이가 눈에 선했다.

“한이의 이야기는 황호 당신이 몇 번 한 적이 있었죠. 같은 반에 태호권을 계승한 아이가 있다고…….”

“첫 수업에 대련하고, 그 이후로도 몇 번 대련했지. 태호권을 써서 이계 시뮬레이션도 같이 클리어했어.”

어느새 모든 홀로그램이 꺼지고 그 대신 한이의 프로필이 떠 있었다.

“그런데도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청호가 쌓아 올린 태호권의 모든 경지를 잃었다는 뜻이겠군요.”

“그래. 청호가 가르친 호족의 제자 중에 지금 한이가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없다. 완패하겠지.”

마침 보육원에 한이와 권레나, 사월세음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한이는 아직 두 사람이 자원봉사 하러 오는 게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권레나와 사월세음이 양쪽에서 한이의 팔을 잡고 힘차게 걷고 있었다.

그러다 각오를 다진 건지 한이가 애매하게 웃으면서 둘에게 뭐라 말을 하고, 권레나와 사월세음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는 게 보였다.

어쩐지 그 모습은 신화계 호족 중 유일하게 여성이었던 청호가 다른 친우들이 치던 장난질을 함께하는 걸 꺼려 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어울려 주고 웃던 걸 떠올리게 했다.

“……청호는 제가 형틀에 묶여 있던 사이에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어째서 청호는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난 걸까요.”

“그것도 대가의 일부였을 지도 모르지.”

“대가요?”

“친우였던 우리를 잘라 내는 것 말이다.”

황호의 말에 적호가 괴로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적호가 대죄를 저질러 형틀에 묶인 후에도 청호는 저를 가끔 찾아와 제자로 받은 아들 이야기를 주로 하곤 했다.

청호의 발길이 끊기고, 그녀의 실종을 안 후에도 적호는 언젠가 그녀가 돌아와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우정이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끝나다니.

모든 것을 잊고 인간이 된 청호, 한이를 보는 적호는 기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우리보다 신인을 택한 친우의 선택을 존중하겠다. 하지만 설령 그러하더라도 우리의 우애는 변하지 않아. 그렇지?”

황호의 말에 눈이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적호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청호가 어떤 선택을 했건, 지금 어떤 모습이건 우리의 우애가 변할 리 없습니다.”

두 호족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창밖의 풍경이 조금 바뀌었다.

한이가 0반 친구들과 함께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자 건물 그림자 사이에서 나타난 청호의 수제자들이 바닥에 엎어져 울기 시작했다.

계속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한이가 사라지니 은신할 여력도 없어진 것 같았다.

황호가 디바이스로 비서를 불러 청호의 제자들을 끌고 나가도록 지시를 내린 후 말했다.

“조사해 줬으면 하는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천단수 앞에서 조의신이 한 말이 신경쓰이는군.”

적호는 천단수 앞에서 봤던, 그 압도적인 힘을 견디며 무언가를 질문하던 조의신을 떠올렸다.

황호가 무엇을 시킬지 짐작이 갔다.

“‘성헌’이라는 인물에 관해 조사해 보도록. 단서는 없지만 흔하지 않은 이름이니 무언가가 나오긴 하겠지.”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져 있었다.

정말 푹 잔 건지 머릿속이 상쾌했다.

끼익.

눈을 뜨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어, 의신이 오빠 일어났다!”

“의신이 형,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이에요.”

내가 답인사를 하기도 전에 은호의 후예들이 조르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문병 오고 싶었는데 계속 황호 님과 백호 님이 안 된다고 하셔서…… 이제 일어날 때가 됐으니 계속 옆에서 지켜봐도 된다고 했어요!”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어요. 아, 오늘도 자고 가실 거죠? 저녁은 손님 때문에 안 되니까…… 내일 아침은 같이 먹어요!”

은호의 후예들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황지호가 일부러 보낸 걸까?

그 손님을 만나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돌아가기 어렵게 되었다.

“아, 황호 님께서 백호 님도 손님 뵈러 오라고 하셨어요!”

“같이 가요!”

첫째 은서호가 말을 거는 쪽을 보니 아직 백호군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백호군 옆에선 올무가 눈을 크게 뜨고 꼬리를 작게 살랑이고 있었다.

둘이 계속 옆에 있어 줬나 보다.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몸을 일으켰다.

“……그 손님은 누군데?”

이 질문에는 둘째 은이호가 답해 줬다.

“녹족의 수장이라고 들었어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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