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변하지 않는 것 (5)
[리플레이]
다른 차원에 게임의 형태로 새겨진 미래, 기록을 꿈으로 재현한다. (1단계)
‘리플레이’의 기능 설명에 걸리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나의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 설명과의 유사성이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의 상세를 열람합니다.〉
[플레이어의 궤적]
다른 차원에 게임의 형태로 새겨진 미래, 꿈의 기록을 재현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객체에 대해 초월적인 간섭과 정보 열람이 가능해진다는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 스킬의 기능 중 하나인 ‘리플레이’.
스킬이 아닌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
이 두 개는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면 상당히 유사했다.
그 유사성 탓에 차이점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하면 현실에서 나를 통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능력이 재현돼. 리플레이는 꿈에서…… 뭐가 재현된다는 거지? 그리고 1단계라니. 레벨 같은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니 난감해졌다.
리플레이가 꿈을 통해 발현되는 기능이라면 꿈을 안 꾸는 나는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써 보긴 해야지.’
나는 사용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손에 들어온 새 체스 피스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기능 사용하기를 선택하자 ‘삣’ 하는 시스템음과 함께 푸른빛의 윈도우가 하나 더 떠올랐다.
윈도우에 표시된 건 이 세계에 와서 만난 이들의 목록이었다.
처음 나에게 말을 건 유상훈.
뒤를 이어 자기소개를 한 손민기와 장남욱.
빈사 상태로 등장한 김신록.
게임과 다르게 체육관에서 등장한 백호군.
나를 병원으로 인솔한 제갈재걸, 그곳에서 만난 홍규빈과 유상희.
은휘관에서 만난 이사장의 비서와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호…….
그러나 병원에서 만난 의료진이나 진수중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게임 속에 등장했다’고 인식한 캐릭터들만 만난 순서대로 기록된 것 같은데.’
유상훈, 장남욱, 손민기, 김신록은 튜토리얼에서는 이름도 나오지 않고 사망하긴 했지만, 게임 속에 등장한 건 확실했다.
홍규빈과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을 한 비서도 비중이 적지만 등장하긴 했다고 인식했었다.
‘써 볼까.’
리플레이 설명란에는 교신 스킬 설명에 쓰여 있는 경고 문구가 없긴 했지만, 기절할 경우를 대비해 침대에서 리플레이 기능을 사용하기로 했다.
‘리플레이가 게임 속 미래와 기록을 구현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캐릭터를 택하는 게 좋을 거다.
리플레이를 사용하기로 선택한 첫 대상자는 황지호였다.
‘만약 리플레이가 제대로 발동하면 ‘황지호 죽이는 방법’을 찾는 단서가 될 거야.’
황지호의 분신은 모두 ‘황호’라는 항목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리플레이 목록 중에서 황호를 선택했을 때였다.
〈현재 단계에서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에러 안내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리플레이 설명에 표시된 단계라는 게 캐릭터 선택에 제한이 걸리는 거였나?
‘기준을 모르겠는데…….’
고민 끝에 가장 윗줄에 있는 유상훈을 선택했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메시지 이후 리플레이 항목에 떠 있는 캐릭터 선택 창이 전부 회색으로 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다른 캐릭터를 선택해 봐도 에러 메시지조차 뜨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꾸지 못하니까 기능이 발동하지 않은 걸까.
‘……단계가 오르면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전용 메뉴의 레벨이 오르면 리플레이의 단계도 상승해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 당장 기능에 대해 고찰하는 건 포기하고 오늘도 꿈 없이 잠들었다.
* * *
최근 유상훈은 여름방학을 맞이해 늦은 시각까지 농구부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농구부 고문과 전문 코치는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했지만, 방학이 되니 강도가 더해졌다.
코치진은 특히 2학기에 열릴 군사관학교와의 스포츠 교류전 대표로 선발된 멤버를 매우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처음으로 교류전이 시작된 해의 우승, 원년 우승은 한 번 놓치면 평생 돌아오지 않는다!
스포츠계에서 원년 우승이라는 타이틀은 큰 의미가 있었다.
그 경기가 사라질 때까지 원년 우승이라는 타이틀은 변하지 않고 한 번 놓치면 다시는 얻을 수 없었다.
올해 처음으로 시작한 은광고와 군사관학교 사이의 스포츠 교류전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올해 승리한 학교에는 몇 년 동안 원년 우승교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상훈아, 너한테는 기대가 크다!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말렴. 네 병력을 생각하면…….
—네 메디컬 체크업은 철저하게 하고 있어. 그래도 힘들다고 생각하면 바로 말해라.
농구부 1학년 중에서는 유일하게 선발로 뽑힌 유상훈에게 걸린 기대가 컸다.
유상훈은 1학년이고 키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농구부원과 코치진은 만장일치로 유상훈을 선발로 뽑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볼 회전 능력은 떨어지지만, 코트 어디에서나 안정된 슛을 쏘는 유상훈의 득점력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그리고 유상훈도 그런 기대에 응해 매일 훈련에 성실히 임했다.
‘잘 쉬고, 잘 자는 것도 훈련이야.’
유상훈은 그런 마인드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바로 잠들었다.
평소라면 유상훈은 아침 훈련을 가기 직전까지 숙면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심야, 유상훈은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디 아파?”
거실에서 스탠드만 켜 놓고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유상희가 놀란 얼굴을 했다.
요새 얄미울 정도로 잘 먹고 잘 자던 유상훈의 얼굴에 핏기가 거의 없었던 탓이다.
“광림이나 스킬을 쓸까? ……이능이 싫으면 병원으로 갈래?”
유상희의 말에 유상훈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냉장고에서 1 .5L짜리 생수통을 꺼내 통째로 들이켰다.
그 꼴을 본 유상희가 인상을 썼다.
“아, 좀! 입 대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이거 내가 다 마실 거니까 됐어.”
유상훈이 반쯤 남은 생수통을 들고 유상희와 한참 떨어진 소파 끝에 앉았다.
“안 자고 뭐 하냐.”
“……그냥 잠이 안 와서.”
유상희는 띄워 두고 있던 홀로그램을 전부 껐다.
유상훈은 그 내용을 보지 않았지만 보나마나 진로 문제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자신이 뭐라고 참견할 문제가 아니라 판단한 유상훈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잠시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유상희였다.
“너도 잠이 안 와? 계속 안 잤어?”
“아니, 개꿈 꿔서 깬 건데.”
“무슨 개꿈?”
“입학시험 꿈.”
입학시험이라는 말에 유상희가 다시 인상을 썼다.
“손민기 그 뇌가 잘린 것 같은 새끼가 지랄하는 꿈을 꿨니?”
“아니. 그 새끼는 꿈속에서 죽었어.”
“그럼 좋은 꿈이잖아. 복권 사자.”
유상희가 복권 판매점의 위치를 검색하는 동안 유상훈이 남은 생수를 전부 들이마셨다.
생수병을 종잇조각처럼 구겨 버린 유상훈이 말했다.
“좋은 꿈은 아니야. ……그 자리에 조의신이 없었어.”
“의신이가 없었다고?”
여전히 유상훈의 안색이 창백했다.
“손민기 그 새끼만 죽은 게 아니야. 꿈에서는 나도, 장남욱도, 감독관이었던 김신록 선생님도 다 죽었어.”
* * *
황명호 대저택에서 돌아온 후 며칠이 지나고 맞이한 아침.
아침 일찍 신문부와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들의 유라시아 여행기의 종착점은 영국이었고, 영국에서 마지막 일정을 마친 이들은 직항 항공편을 타고 밤에 귀국했다 한다.
[문새론] 귀국할 때까지 2학년 0반 선배님들과의 대결은 신문부의 전승으로 끝남! 하하하! 피곤하긴 하지만, 이겼다는 것에 의미가 있도다!
여행 내내 청두시 호텔에서 펼친 대전 격투 게임에 이어 2학년 0반과 신문부와의 기묘한 대결이 이어진 모양이다.
문새론의 설명에 의하면 신문부는 늘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는데…… 과연 신문부가 이긴 걸까?
이겨도 이긴 게 아닐 것 같은데.
기묘한 대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지쳐서 뻗은 신문부원을 내버려 두고 제갈재걸과 신나게 놀았을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눈에 선했다.
[문새론] 아, 맞다. 영국에서 있던 사건은 아직 설명을 안 했네.
2학년 0반을 상대로 한 허무한 승리기를 줄줄 늘어놓은 문새론은 영국에서 겪은 사건을 설명했다.
템스강을 따라 옥스퍼드를 향하던 일행은 또 사건에 휘말렸다.
우연히 소년 소녀가 납치되는 상황에 조우한 이들은 곧바로 추적에 돌입했다.
템스강 아래에 숨겨진 지하수로와 이계를 돌파하는 짧은 모험을 마친 후.
그들은 비밀 경매장에 도달했다.
그 비밀 경매장에서 플레이어 협회 영국 지부 소속 플레이어들과 만난 신문부 일행은 그들과 협력해 비밀 경매를 부수고 납치된 이들을 구하기로 했다.
[문새론] 영국 협회가 개판이라고 하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음요! 총본부에서 또 털러 온다고 함!
그 비밀 경매장의 배후는 바로 플레이어 협회 영국 지부의 간부들이었다.
협회 영국 지부의 플레이어들에게 속아 넘어간 일행은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전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명은 크게 다칠 위험에 놓였다고 한다.
[문새론] 거기에서 정체불명의 히어로가 등장함!
[문새론] (사진)
문새론은 휘황찬란한 투우복 차림에 가면을 쓴 누군가의 사진을 메시지방에 올렸다.
붉은 비단에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아 번쩍거리는 챠케틸라가 매우 눈에 띄었다.
빛의 옷이라고도 해석되는 투우복, ‘Traje de luces’를 단어 그대로 재현한 듯한 옷이었다.
‘설마 이건……!’
반사적으로 손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이런 옷을 입고 비밀 경매장을 돌아다닐 법한 인물은 흔치 않았다.
내 예상에 쐐기를 박듯 문새론이 계속하여 메시지를 보냈다.
[문새론] 자칭 ‘Phantom Thief’, 괴도라고 불러 달라는 화려한 히어로께서는 비밀 경매를 끝장내고 쿨하게 사라졌어!
[문새론] 뭐라고 멋있는 말을 많이 남기긴 했는데, 그때 주변이 좀 시끄러워서 다 알아듣지는 못했어. 대충 ‘다시 보자, 전우들이여!’라는 말을 남긴 거 같은데…….
저기에 등장한 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맞는 것 같았다.
게임 속 내년, 그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세상을 짧고 굵게 뒤흔들다 퇴장한다.
‘괴도’를 자청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그 캐릭터는 유독 오그라드는 대사를 자주 뱉어 화면 밖의 나에게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
‘……그래도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약했구나!’
내가 오그라듦을 극복하고 감탄하는 사이에도 문새론의 메시지는 계속 올라왔다.
메시지 중에는 그들이 구한 사람 중에 영국 왕실 소속인 자제가 있어서 언젠가 영국으로 초대받을지 모르겠다는 말도 있었다.
영국 왕실 소속의 자제가 경호원을 따돌리고 일반인 사이에 섞여 쇼핑을 하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라 한다.
‘몰랐다고 하지만 어쨌든 영국의 왕실을 건드렸으니…… 영국 협회는 또 털리겠구나.’
영국 협회는 맨체스터 대이계공략 때에는 진족의 심기를 건드려 반목해 도움이 되지 못하고 괴멸 상태에 이르렀었다.
얼마 전 재러드 리가 환몽 게이트에 연루되었다고 오해받았던 사건 때에는 비협조적인 태도로 불필요한 오해를 부른 영국 협회.
이번에는 제대로 물갈이가 됐으면 좋겠다.
“어, 의신아!”
지익회관에서 아침 훈련을 마치고 다시 1학년 기숙사 건물로 돌아왔을 때.
성시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는 계이담과 박승현 그리고 목우람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우람이에 대해서는 들었지? 우람이한테 물어보니까 아는 사이던데.”
“안녕하십니까!”
목우람은 나를 발견하자 밝은 얼굴로 깍듯이 인사했다.
마침 한이 건으로 잠깐 기숙사에서 지내던 사월세음도 본가로 돌아갔다.
맹효돈은 아직 탁거산과 수련 중이다.
그리고 목우람이 기숙사에 막 입소했고, 나에게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무명의 운명에 대해 물을 최적의 타이밍이야.’
훈련으로 쌓인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