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변하지 않는 것 (6)
“그러면 우리는 가 볼게. 우람아, 필요한 게 있으면 디바이스로 연락해.”
“…….”
“네, 들어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1학년 학생끼리 있는 게 목우람이 말을 트기 편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지익회 소속 선배들은 기숙사 로비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인사를 하다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박승현은 왜 성시완하고 계이담이랑 있던 거지? 지익회 소속 멤버 중에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친한 사람들은 없었는데…….’
비중은 적지만 박승현도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
반면 지익회에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나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연관된 비중 있는 NPC가 없었다.
굳이 존재감이 있던 NPC를 꼽는다면 현재 고문인 김신록을 대신해 그 자리를 차지했던 최편득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건 지익회 배지잖아.’
자세히 보니 박승현의 티셔츠에 지익회 배지가 달려 있었다.
티셔츠 밑단 구석,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였지만.
“지익회에 들어간 거야?”
“……어.”
박승현이 티셔츠 밑단을 움켜쥐어 주먹 안으로 지익회 배지를 숨겼다.
박승현은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올해는 1학년 학생 중에 지익회에 들어온 애가 적었대. 마침 방학 중에 추가 모집 공고가 떴길래 지원했어. 지익회 선배님도 다 좋은 사람들이고…… 지익회 연혁 보니까 설립 과정도 되게 뜻깊은 거 같고…….”
그러고 보니 그런 설정이 있었다.
보통 은광고에서는 학생회, 선도부, 지익회 입부 희망자가 골고루 나뉘는데 올해는 달랐다.
바로 올해 입학한 주수혁과 안다인의 존재 때문이었다.
주수혁은 선도부로, 안다인은 학생회에 들어가는데 두 사람의 카리스마에 이끌려 ‘함께 일해 보고 싶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학생들이 급증해 두 곳에 입부 신청이 몰리게 된다.
‘그것도 내년에 지익회가 사라지게 된 원인 중 하나였겠지.’
상대적으로 지익회에는 1학년 입부 희망자가 적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플마고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 시나리오로 지익회는 전멸한다.
‘……그다음 해에 최편득의 주도로 지익회가 폐지되고 사감 제도가 부활했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려야 할 학생회와 선도부도 힘을 못 썼다.
학생회장 도원우, 선도부장 오혜지를 중심으로 한 3학년이 전원 사망했고, 1, 2학년 중에도 사망자가 속출했던 탓이다.
지익회의 폐지를 막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 건 은광고 졸업생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졸업한 이들이 학교에 가할 수 있는 힘은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게임 속에서 학교를 움직이는 이사회는 최편득 일당이 꽉 잡고 있는 데다 이사장인 황명호가 태만하게 구니 지익회는 무력하게 해산됐다.
‘태만하게 군 탓도 있었지만, 그때는 적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움직이던 중이었겠지. 학교에서 학생 자치기구 하나가 없어지든 말든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의신이 너는 지익회에 들어올 생각 없어? 신문부랑 병행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박승현은 밝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게임 속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박승현은 부정 입학자에게 시달려 늘 의기소침해 있었다.
자진해서 지익회에 들어가는 것도, 다른 학생에게 지익회 입부를 권하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게임과 달라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해 주는 기쁜 권유였지만 아쉬운 마음을 담아 거절했다.
“신문부가 바빠서 어려울 것 같아.”
“그래……. 여유가 생기면 말해.”
“그럴게. 아, 혹시 같이 다니는 친구도 같이 지익회에 들어간 거야?”
“어. 축구부랑 겸해서 하고 있긴 한데…….”
박승현과 같이 붙어 다니던 체육복 차림의 1학년생은 축구부로, 이번 사관학교 교류전에 축구부 대표로 뽑힌 모양이었다.
연습으로 바빠서 요즘 박승현도 밥 먹을 때 빼면 얼굴 보기 바쁜 것 같았다.
‘유상훈도 바쁘겠지.’
유상훈은 평소대로 메시지 방에서 ‘ㅇ’, ‘ㄴ’, ‘?’ 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읽고 씹기를 반복하고 있어 바쁜지 안 바쁜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농구 연습에 매진 중일 게 분명하니, 시간이 나면 응원차 간식을 투척하러 가 볼까.
“아, 잡담이 길어졌네. 미안…… 그러니까…… 아, 시설 안내랑 주의 사항을 말할게.”
“네! 잘 부탁드립니다!”
박승현은 아직 지익회 일에 익숙하지 않은지 홀로그램에 적어 둔 메모를 보며 목우람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줬다.
목우람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박승현의 설명을 경청했다.
특히 기숙사 규칙을 들을 때는 온 신경을 집중해 듣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상이 주요 기숙사 규칙이야. 0반 입소자들에게는 특별히 기숙사 규칙 전문을 종이로 인쇄해서 배부하고 있어. 학교에서 보낸 지급품하고 같이 들어 있을 거야.”
“네! 반드시 확인하여 정독하겠습니다.”
목우람의 성실한 답변에 박승현이 아주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지익회에 막 들어갔는데 정체불명의 0반 학생이 갑자기 입소했으니 긴장이 안 될 리가 없긴 했다.
“혹시 기숙사 운영에 관심 있어? 엄청 열심히 듣네. 지익회에 들어 올 거면 환영할게!”
“지익회에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목우람은 딱 잘라 말했다.
“대신 저는, 뮤즈가 계시는 기숙사 내에서 절도와 예의를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박승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목우람이 0반이라는 게 실감이 났을 것이다.
“어…… 그럼 뭐 필요한 거 없어? 짐 정리 도울까?”
“괜찮습니다. 전 짐도, 가진 것도 없습니다. 학교에서 준 지급품 박스가 전 재산입니다.”
“……정말로 더 필요한 게 없어?”
목우람은 사복도 없는지 학교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방학 중이지만 편하다는 이유로 기숙사에서도 체육복을 입고 다니는 기숙사생이 많아서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긴 했다.
현재 소지금 0원이지만, 목우람은 그의 뮤즈인 권레나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 정신적으로 충만한가 보다.
박승현이 지익회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생용 비품 목록을 목우람에게 억지로 떠넘겼지만, 목우람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디바이스는 받았다고 들었어. 방학 내내 기숙사에서 지낼 예정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줘.”
목우람이 배정받은 17층까지 바래다준 박승현은 0반의 위엄을 맛본 후 퇴장했다.
‘짐이 없다니까 짐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아도 되겠지.’
목우람은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지금 놀러 가도 돼?”
“환영합니다! 레, 레나 님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설마 권레나를 직접 만난 후에도 ‘레나 님’이라고 부르려는 건가.
* * *
플레이어 협회.
예정보다 일찍 휴가에서 복귀한 홍규빈은 업무에 몰두해 있었다.
어제는 야근을 넘어 그대로 밤을 지새운 건지 어제와 옷차림이 같았다.
아침 일찍 제일 먼저 출근한 직원이 그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휴가가 있었는데, 이제는 없네요.”
“홍 팀장님, 중국으로 여행 가신다고 들었는데…….”
“중국에서 사고 몇 개가 묻혔다고 들었어요. 그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요새 정부랑 협회가 사이가 안 좋잖아. 이계부에서는 대놓고 플레이어 위성을 갖고 시비를 걸고 있고…….”
“정말 쉴 틈이 없네.”
그때, 손거울을 백미러로 사용해 입구 쪽을 정찰하던 협회 직원이 파티션을 두드렸다.
보낸 신호는 ‘-・--’, 모스 부호 ‘Y’였다.
‘윤 대리님이네!’
‘윤 대리다!’
다들 입을 다물고 곧장 자리에 앉았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직원도 있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요즘 윤 대리는 과민한 상태라 아무도 그 성미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했다.
윤 대리를 찬 여친이 홍보 2팀의 박 팀장과 사귀기 시작하며, 이전부터 홍보 1팀을 상대로 각을 세우던 박 팀장이 윤 대리를 노골적으로 긁었던 탓이었다.
“팀장님.”
정찰 역을 맡은 직원의 예고대로 곧 윤 대리가 등장했다.
스트레스로 눈이 쑥 들어간 윤 대리가 곧바로 홍규빈 앞으로 다가갔다.
“말씀하세요, 윤 대리님.”
홍규빈은 여전히 눈으로 남궁 그룹의 모든 계열사의 사업 지표를 분석하며 답했다.
윤 대리가 목소리를 낮춰 보고했다.
“경찰 병원에 입원 중이던 광일파출소장이 자살했습니다.”
홍규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경찰 병원에서 자살했다고……?’
광일파출소장 김 경감은 이능 총 폭발로 인해 손을 절단하고 재생 시술을 받아야 했다.
비록 부상 중이라고 하지만 처음 김 경감은 ‘최 실장’을 팔며 적극적으로 증언하려 했다.
그러나 김 경감이 가짜 ‘최 실장’의 허수아비에 놀아났다는 걸 알자 재생 시술을 핑계로 협회의 심문을 피하기 시작했다.
제 손에 든 패가 하찮다는 걸 알고 살 궁리를 하고 있었을 거다.
‘그자는 자살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어. 자살로 위장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윤 대리도 홍규빈과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조용히 물었다.
“이번 건은 호족이 관여했다고 들었습니다. 호족이 꾸민 일일까요? 호족의 영역에서 설친 보복으로 말입니다.”
윤 대리의 말에 홍규빈은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호족은 쉽게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죽이더라도 이렇게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아요.”
“……아, 여태까지 관계자는 불구가 되고 끝났죠.”
“큰 벌을 주고 싶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했을 겁니다.”
홍규빈은 제갈재걸이 근무하고 있는 은광고가 호족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갈재걸이 은광고에 재직하게 된 이후, 홍규빈은 호족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빠짐없이 조사해 왔다.
홍규빈은 어느 정도 호족의 수법을 파악하고 있었다.
‘김 경감이 뭔가 알아낸 거야. 그자에게 가진 패가 없다면 경찰 병원에서 일을 치르는 수고를 했을 리가 없어.’
홍규빈의 머릿속에 악의 없게 웃던 최 실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사 잡지의 성공한 기업가 인터뷰 란에 실리더라도 위화감이 없을 법한 표정이었으나 그가 벌인 일을 생각하면 오싹하기에 그지없었다.
홍규빈이 최 실장을 찾아갔던 그날, 홍규빈이 얻은 건 ‘남궁 그룹이 이번 일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뿐이었다.
짙은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이번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이후 이계부와의 충돌이 심해졌다.
거기에 더해 남궁 그룹까지 상대하자니 어깨가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김 경감도 일단은 플레이어입니다. 규정집행부에서 조사할 명목이 있죠. 윤 대리님은 김 경감을 맡아 주세요.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움직일 때는 반드시 정 사원 데리고 가세요.”
“…….”
“더 보고할 게 남았습니까?”
윤 대리가 홍규빈 뒤쪽에 있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 밖은 보이지 않았다.
“출근하는 길에 아는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네?”
“협회에 있는 제자가 출근하는 걸 기다려서 잠깐 이야기하려던 게 아닐까요? 그 선생님 성격상, 바쁜 제자가 마음을 쓸까 봐 연락도 안 하고 오신 것 같습니다만.”
홍규빈이 즉시 몸을 돌려 블라인드를 올렸다.
플레이어 협회, 언론 홍보실 건물 쪽 입구.
제갈재걸이 서 있었다.
“그 제자는 어제 퇴근을 안 한 바람에 만나지 못한 것 같지만요.”
윤 대리의 말이 전부 끝나기 전에 홍규빈이 즉시 자리를 떴다.
‘출국 일정이 밀려서 오늘이나 내일 귀국한다고 들었는데……!’
홍규빈은 뛰어가면서 정신없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제갈재걸이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홍규빈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제갈 선생님!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연락해 주셨으면 바로 뵈었을 텐데요.”
“시간이 나서 잠깐 들렀습니다. 출근길에 마주치면 인사라도 드리려고 했는데…… 계속 협회에 계신 걸 보니 바쁘신 모양입니다.”
“안 바쁩니다! 마침 퇴근하려던 참이었어요.”
제갈재걸은 홍규빈을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잠깐 보다가 말했다.
“의신이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우람이 건으로 의신이가 도움을 청했다고 하더군요.”
“의신이가요?”
왜 조의신이 제갈재걸에게 그 이야기를 한 거지?
조의신에 대해서 파악은 다 못 했지만, 그가 비밀주의자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입이 무겁고, 필요 없는 말은 일절 하지 않는 그가 굳이 제갈재걸에게 그걸 왜 말한 걸까.
“이번에 힘써 주지 않았더라면 몸이 상해 있는 우람이가 신분증 발급 문제로 국경을 넘기 어려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말도요.”
제갈재걸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리면 좋을지 몰라서…….”
“당연한 일을 한 겁니다. 제갈 선생님께서 마음 쓰실 필요는 없…….”
하지만 물건을 본 순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건…….”
신문부가 만들었다는 제갈재걸의 잡지 초판 1쇄였다.
포장된 초판 1쇄 외에도 기획 과정에 제갈재걸이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벌 버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