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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28화 (228/925)

43. 변하지 않는 것 (9)

태풍으로 인해 궂은 날씨 탓에 에어 버스는 물론이고 지상 대중교통 수단도 모두 운행이 중지되었다.

은광고의 각 반 담임과 고문 교사들도 외부 활동을 자제해 달라는 요지의 공지를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은광고 학생들이라면 자력으로 이 정도의 태풍을 뚫고 이동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아직 이들은 청소년들이었다.

낮은 확률이지만 태풍 속에서 이능 폭주라도 일으키면 수습이 어려웠다.

그래서 오늘 동아리 활동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진행되었다.

“상체 밸런스가 흐트러졌어요. 어깨를 펴고 힘의 분배에 신경 써 주세요.”

“네!”

총동아리회관, 제2체육관.

방학 중에도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으로 북적이던 체육관이 태풍의 영향으로 텅텅 비었다.

오늘 동아리 활동은 학교 기숙사생을 대상으로 고문 교사의 감독하에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태호권 소모임은 현재 고문 교사와 동행하여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2학년 부원의 자세를 봐 주던 공청훤이 창밖을 보다 말했다.

방음 설비 덕에 바깥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강풍 탓에 사선으로 꺾인 상태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위협적으로 보였다.

“이번 태풍의 기세가 심상치 않네요. 교내에서 이동하는 것도 위험할 것 같아요. 방에서 쉬세요.”

“네!”

지익회 소속이기도 한 2학년 학생 둘이 자리를 떴지만, 한이는 아직 홀로 벽을 보며 수련을 계속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최근 발기술을 중심으로 연습하고 있었는데, 특히 태호권 기본자세인 ‘호랑이 발걸음’은 하루 300번 이상은 반복했다.

공청훤이 연습에 몰두한 한이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권하려고 할 때.

한이가 번쩍 고개를 들어 제2체육관 입구를 바라봤다.

입구에 태호권 소모임 부원이 아닌 누군가가 서 있었다.

“황지호.”

입구에는 막 체육관 안으로 들어온 듯한 황호가 서 있었다.

태풍을 뚫고 왔을 텐데 황호의 머리카락에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여긴 왜 왔어?”

“재대련을 하려고.”

“……누구랑? 왜?”

“너랑.”

이 돌아이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걸까?

한이는 대놓고 정색할 뻔했지만, 공청훤의 앞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표정을 살짝 굳히는 선에서 참았다.

대신 딱딱하게 말했다.

“네가 태호권으로 장난질하는 거 별로야.”

신체 능력도 뛰어나고, 태호권의 경지도 높은 1학년 0반 돌아이.

그가 태호권으로 진지하게 싸우는 일은 거의 보지 못했다.

주먹으로 막는 동작을 새끼손가락 하나만 들어서 끝낸다든가, 양손을 이용해야 하는 자세에서 손가락 두 개만을 쓴다든가 하는 행동이 그러했다.

한이가 조금 독하게 말해 간접적으로 대련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황호는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체육관에 등장했을 때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한이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는 태도였다.

“알았다. 앞으로는 태호권으로 장난질은 하지 않도록 하지.”

그렇게 답하는 같은 반 급우의 얼굴은 어딘가 10대다워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컨셉이라도 잡은 건지 노친네 말투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영향으로 저런 얼굴이 된 걸까?

한이의 표정이 좋지 못한 데도 황호는 그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재대련을 하자.”

한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공청훤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상하게 말릴 마음이 들지 않네요. 좋아요. 심판은 제가 보죠. 태호권 도복을 빌려드릴까요?”

한이에게 대련을 청한 이가 진족임을 알면서도 공청훤은 학생을 대하듯 말했다.

황호는 대답 대신 학교 체육복 저지를 벗었다.

저지를 벗자 태호권 도복이 보였고, 하의는 처음부터 도복이었다.

“문제없군요. 자, 각자 제자리에.”

거리를 두고 둘이 마주 보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은광고 입학 후 첫 수업에서 대련했던 때와 달리, 황호의 얼굴은 진지해 보였다.

곧 공청훤의 낭랑한 목소리가 체육관에 울렸다.

“시작!”

*    *    *

이능으로 구현한 밤하늘 아래, 흑과 백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스테일메이트 배 체스대회에서 받은 기념 코인을 던져 선수, 후수를 정한 결과.

백호군이 백을 잡아 선수, 내가 흑을 잡아 후수가 되었다.

‘……페이스가 빨라!’

백호군은 그의 대검술만큼이나 호쾌하고 거침없이 뒀다.

반면 손이 식고 두통이 밀려든 탓에 내 손은 서서히 느려졌다.

삑.

삑.

‘삑’하는 체스 클락 음이 반복될 때마다 체스 기물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수가 이 정도로 쌓이니 둔해진 사고 회로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백호군은 고수다.

이 세계에서 나와 체스를 둔 이들 중에 가장 체스를 잘 두는 것 같았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두는 것 같아……!’

백호군은 마치 내가 무슨 수를 둘지 훤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

내 기보를 철저하게 연구한 걸까?

백호군은 마치 나와 체스를 수백 번 두기라도 하거나 내 머리를 들여다보면서 두는 것 같았다.

‘설마 이래서 그때는 둬도 소용이 없다고 한 건가.’

백호군이 제안했을 당시 다시 체스를 두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고 트라우마도 훨씬 심했다.

분하지만 그때 뒀으면 처참한 대국이 되었을 거다.

간신히 한 수 한 수 버티고 있었지만, 교착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미들 게임 페이즈는 쏜살처럼 지나가 엔드 게임 페이즈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체크.”

체크메이트를 선언한 건 백호군 쪽이었다.

흑의 킹이 백의 체스 피스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완패했다.

이 세계에 와서 천동하에게 졌던 적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압도적으로 진 건 처음이었다.

나는 흑의 킹을 체스보드 위로 쓰러뜨렸다.

“……졌습니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라고는 하지만, 체스로 진 건 속이 쓰렸다.

그러나 이 정도 되는 체스 플레이어에게 진 것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차게 식은 손을 내밀자 백호군이 마주 잡아 악수했다.

이제야 온기가 조금씩 돌아오는 내 손을 보던 백호군이 말했다.

“……아직이었나 보군.”

뭐가 아직이란 말인가.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건가?

아직이고 뭐고 지금은 분했다.

체스보드 위에 쓰러져 있는 흑의 킹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한 판 더…….”

“오늘은 여기까지다.”

백호군이 손을 놓았다.

“조의신. 대국 중에 이능파 컨트롤에 신경 쓰도록.”

이능파 컨트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밖으로 이능파를 방출하기라도 했나?

가끔 집중하다 보면 이능파를 흘리는 이들이 있긴 하다.

“너는 체스를 둘 때 이능파로 네 숨통을 누른다.”

……나한테 그런 버릇이 있나?

긴장하면 인식하지 못하고 혀끝이나 입술을 깨무는 버릇과 비슷한 건가.

나한테는 그런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네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버릇이라면 다른 이들도 눈치챘겠지. 그러나 그 버릇이 네게 고통을 주는 건 변함이 없다. 고쳐라.”

솔직히 말해 전혀 모르겠다.

나한테 그런 버릇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잘못 볼 리가 없고, 거짓을 말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밖으로 안내하겠다는 듯 백호군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란히 서서 걸을 때, 백호군은 다시 뜬금없는 화제를 던졌다.

“예전에 네가 나에게 악몽에 관해 물었지.”

12지 동맹 회담이 끝났을 때 말하는 건가?

그때, 양족의 수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12지 동맹에 참석한 자, 혹은 마법진 주변에 있는 자는 ‘악몽’ 그 자체다. 악몽에 삼켜지지 않게 경계하도록.

그 ‘악몽’의 존재를 다른 12지 수장도, 황지호도 매우 경계했다.

“그게 왜?”

그 말에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한테서 체스 외에도 약점을 꼽자면, ‘꿈’이 있을 거다.

꿈을 본 적도 없었고, 꿈이라는 단어의 개념도 사전적인 의미로만 파악하고 있는 나였다.

꿈의 영역은 나에게 있어서 미지나 다름없었고 꿈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할 말이 없어졌다.

‘……요새 주위에서 ‘꿈’이라는 개념이 자주 언급되는 것 같은데.’

중국 여행 때 문새론이, 어젯밤엔 장남욱이 악몽을 꿨다.

플레이어의 궤적, 리플레이의 설명에도 등장했다.

뭔가 마음에 걸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계속하도록.”

백호군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    *    *

유상훈의 방.

장남욱과 유상훈, 두 사람은 이능과 꿈에 관련된 논문과 기사 등의 자료를 읽고 있었다.

“꿈을 통해 계시를 주는 상위 존재가 있기는 한데…… 아닌 것 같아. 이미 나는 상위 존재랑 연을 맺은 상태라서.”

“그랬냐? 아, 그 눈이랑 관련 있나 보네.”

장남욱은 안경을 써서 눈 안의 별빛을 감춘 상태였다.

장남욱의 안경알을 흘끗 보던 유상훈은 다시 자료로 눈을 돌리고, 더 묻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꿈은 플레이어의 내면 영역이잖아. 상대의 내면이나 정신에 개입하는 이능은 희귀해. 게다가 발동 조건도 굉장히 까다로워서 직접 만나야 할걸.”

“우리가 공통적으로 아는 상대와 관련이 있겠네.”

유상훈은 은광고 소속이었고, 장남욱은 사관학교 소속이니 겹치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렇게 대충 추려 봐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장남욱은 문득 일월청룡선을 들어 벽사 의식을 치르던 조의신을 떠올렸다.

‘저주의 씨앗’에 당한 도시후의 건을 상담해 주던 것도.

“그냥 의신이한테 얘기하지 않을래?”

그렇게 말하고 난 장남욱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도움만 받는다는 사실에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졌다.

자신만 악몽을 꾸던 거라면 절대로 조의신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유상훈도 악몽에 시달렸으니 해답을 낼 수 없는 자신이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의신이와 상담하자. 입학시험 때 꿈이라면 의신이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

유상훈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장남욱은 주저하다가 물었다.

“……상훈아, 왜 오늘 나만 부른 거야?”

“조의신은 꿈에 안 나왔잖아.”

유상훈은 도움이 안 되는 자료 창을 꺼 버렸다.

“걔는 악몽을 안 꿨는데, 굳이 엮는 게 좀 그랬다.”

장남욱은 유상훈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기도 하고 조금 기쁘기도 했다.

결국 둘은 서로를 위해 조의신에게 연락하기로 결심했다.

*    *    *

체스를 두는 사이, 비가 상당히 거세졌다.

벽사의 결계 밖으로 벼락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우비를 입어도 소용없겠네.’

광림을 써서 결계를 치는 능력을 가진 캐릭터의 힘을 쓸까 생각했지만, 그냥 아껴 두기로 했다.

지금 내 몸의 능력치를 고려하면 이 정도의 비를 맞아도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바래다주겠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친절하고 배려심 넘치는 제안에 감사의 마음이 솟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어차피 학교 안이니까…….”

그때, 디바이스가 울렸다.

진동 모드로 설정해 둔 탓에 귓가가 울리는 게 느껴졌다.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발신자: 장남욱’이라고 떠 있었다.

갑자기 왜 연락한 걸까.

“받아 보도록.”

이번 호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새벽에 장남욱이 감성 글을 보낸 것도 그렇고, 악몽을 꿨다고 하니 늦게 받으면 걱정할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의신아, 지금 통화할 수 있어?]

“어, 무슨 일이야?”

[상담할 게 있는데…….]

장남욱은 자신이 봤다는 꿈에 관해 이야기했다.

꿈이라는 말에 난감했지만, 그 내용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남욱이 꿨다는 내용은 나도 잘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 꿈은 게임 속,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을 선택할 때의 전개와 똑같았다.

“꿈에서 나는 안 나왔어?”

[응.]

“……다른 사람은 누가 있었어? 내 자리를 대신해서 나온 사람은 없었어?”

[응? 손민기랑 감독관 선생님은 확실히 있었는데……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어. 의신이 네가 없다는 건 확실해.]

장남욱의 말은 계속되었다.

[오늘 만나서 얘기 들었는데 상훈이도 같은 꿈을 꿨대.]

“유상훈이?”

[응. 두 번이나.]

유상훈은 두 번.

장남욱은 한 번.

게임 속 튜토리얼 전개와 같은 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유상훈은 악몽을 두 번 꿨다고? 언제?”

유상훈이 꿈을 꾼 날은 내가 ‘리플레이’ 기능으로 유상훈을 선택했던 날과 일치했다.

내가 설마 ‘리플레이’로 유상훈과 장남욱에게 게임 속에서 그들이 맞이한 결말을 꿈으로 보여 준 건가?

그런 악몽을 보여 줬다고?

[그리고 내 ‘눈’으로 봤을 때, 우리 둘한테 검은 안개가 끼어 있었어.]

별 처녀의 눈으로만 보인다는 검은 안개.

그 말을 들으니 더는 우연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내 이능파의 색은 검은색이었으니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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