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변하지 않는 것 (10)
한이는 1학년 0반 돌아이로 이름난 황호의 실력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상대는 장난이라고는 하지만 언제나 한이로부터 압승을 거뒀다.
장난질을 하면서도 압도적인 무위를 보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체격, 체력, 근력, 민첩성, 순발력, 마력…….
거기에 태호권까지.
어느 것 하나 현재 한이의 힘으로 대적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기는 건 공부였으나, 황호가 모든 과목에서 정확히 40점을 맞는 걸 보면 그것도 일종의 장난질이 아닌가 싶었다.
‘황지호가 진지하게 싸우면 몇 초만에 내가 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분이 지나도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혔을 때, 한이는 그 이유를 알아챘다.
‘내 종합 능력치 레벨에 맞춰서 싸우고 있어!’
서로 주먹에 실은 힘이 거의 같았다.
상대는 오로지 태호권으로만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이다.
‘힘을 억누른 상태로 싸우는 건 쉽지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해도 손을 늦출 수 없었다.
분하지만 순수히 태호권만을 놓고 봐도 기량에서 한이가 크게 밀리고 있었다.
진지하게 태호권을 구사하는 상대에게서는 마치 몇십 년, 아니…… 몇백 년은 수련한 고수의 기백이 느껴졌다.
상대는 고난도 기술을 정교하게 구사하면서도 한이의 빈틈을 빠르게 파고들며 공세를 퍼부었다.
마치 태호권 교본서를 그대로 구현한 듯한 완벽한 동작을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분하지만, 황지호가 공청훤 선생님보다 몇 수 위인 것 같아……!’
주고받는 합이 늘어날수록 한이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게 늦은 한이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을 때.
황호는 일순 멈칫했으나 한이가 일어나기 전에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거기까지!”
공청훤이 크게 외치며 한이도 기척을 느낄 수 있도록 이능파를 쏘아 올렸다.
“황지호 승!”
공청훤이 뭐라고 말했는지 한이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공청훤의 대련 중단 신호에 맞춰 순식간에 기술을 멈춘 황지호가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 줄까?”
한이는 고작 대련 한 번만으로도 기진맥진해졌는데, 황호는 땀도 흘리지 않았다.
울컥한 기분이 들어 한이가 곧바로 땅을 박차고 일어났다.
“혼자 일어날 수 있어.”
“하하하하! 그렇군. 내 도움은 필요 없어 보여.”
혼자 일어난 한이를 보고 크게 처웃은 황호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대련에 응해 줘서 고맙군. 당신과도 대련하고 싶은데…… 태풍이 심해지고 있으니 들어가도록.”
한이와 공청훤을 번갈아 보던 황호는 체육복 저지를 한 손에 들고 체육관 밖으로 나섰다.
공청훤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생했어요.”
황호가 체육관 밖으로 사라진 후, 한이가 마무리 운동으로 스트레칭을 하며 물었다.
“쟤랑 대련하실 거예요?”
“네. 그 아이가 요청하면요.”
공청훤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황호가 대련을 청하면 진짜로 응할 생각인 듯했다.
‘선생님……?’
은광고의 우수한 교사들에게 대련을 청하는 학생은 많지만, 모두가 이에 응하는 건 아니었다.
교사 중에는 3학년 0반 강한 담임 임연화같이 호전적으로 응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수업에 불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거절하는 교사들도 적지 않았다.
한두 명을 상대하는 건 문제가 없지만, 힘이 넘치는 학생들이 너도나도 대련을 청해 오면 당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희귀한 스킬을 가진 공청훤에게 대련을 청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는 온화한 말솜씨로 좋게 거절해 왔었다.
‘그런데 이렇게 흔쾌히 받아들이겠다고 하다니…….’
한이는 스트레칭을 중단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쟤한테 좀 무른 것 같은데요. 평소 같으면 방금 한 대련도 막았을 것 같은데…….”
“그러게요.”
공청훤의 대답에 한이가 입술을 빤히 쳐다봤다.
자신이 입 모양을 잘못 읽은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공청훤이 ‘그러게요.’라고 답한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게요. ……저 아이가 무례하게 굴어도 화가 안 나요.”
‘황지호가 무례하게 군 적이 있나?’ 하고 한이가 생각했지만,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공청훤은 황호가 사라진 문 건너편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히려 미안한 기분이 들어요. 저 아이가 다소 억지를 부리더라도 들어주고 싶네요.”
그리고 공청훤의 그 말은, 한이 말고 다른 이에게도 전해졌다.
공청훤의 낭랑한 목소리는 체육관에 남아 있던 적호의 귀에도 똑똑히 닿았다.
적연으로 몸을 감춘 적호는 착잡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봤다.
‘두 사람은 어딜 봐도 인간이야. 청호와 신인에게는 이 적연이 통하지 않았어. 아무리 출력을 올려도 꿰뚫어 봤었는데.’
씁쓸했지만, 저 둘이 인간이 되었다면 적연을 간파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군.’
적호는 신인의 환생이라는 공청훤의 태도에 위화감을 느꼈다.
‘공청훤은 신인으로서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군.’
공청훤은 한이의 말대로 황호를 상대로 다소 무르게 대응하는 면이 있었다.
첫 만남에서 다짜고짜 봉으로 급소를 겨눈 학생에게 관대하게 행동하는 것부터 그랬다.
무엇보다 ‘미안한 기분이 든다’는 말이 결정적으로 느껴졌다.
‘신인과 청호가 떠난 이후부터 황호의 책임은 더더욱 무거워졌으니까…… 신인이라면 미안하기도 하겠지.’
반면에 한이는 달랐다.
황호가 저렇게 수상하게 행동하고 같은 반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도 한이는 공청훤의 의뭉스러운 태도에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청호는 완벽하게 잊고 있는 것 같아.’
적호는 황호의 말을 떠올렸다.
—그것도 대가의 일부였을 지도 모르지.
—친우였던 우리를 잘라 내는 것 말이다.
좀 더 두 사람을 지켜보려던 적호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청호와의 우애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어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점 심해지는 태풍을 뚫고, 적호는 제 친우들이 기다리는 저택으로 향했다.
* * *
나를 이 세계로 부른 초상우주는 나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초상우주는 내 사소한 경력부터 가족 관계, 심지어 내가 뒀던 기보까지 이 세계에 구현했다.
그러니 초상우주는 내가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쯤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내가 ‘리플레이’라는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리플레이]
다른 차원에 게임의 형태로 새겨진 미래, 기록을 꿈으로 재현한다. (1단계)
꿈을 꾸지 않는 내가 ‘꿈으로 재현한다.’라는 설명문이 포함된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그 순간부터 나는 의심했어야 했다.
이 기능은 다른 사람, 내가 선택한 이들에게 적용된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여태까지 추가된 설정집 열람, 로그 다시 읽기, 주변 지도 열기는 모두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들이었으니, 리플레이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기능들은 리플레이와 달리 게임 속에서 있던 기능이었다.
리플레이는 게임 속에서 없던 기능이니 좀 더 그 정체에 대해 제대로 고찰했어야 했는데.
‘장남욱은 한 번, 유상훈은 두 번이나……!’
손민기도 그 꿈을 꿨겠지만, 그놈이 뭔 꿈을 꾸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장남욱과 유상훈한테 그런 악몽을 꾸게 한 건 견딜 수 없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두 사람은 나에게 죽 보고 싶었던 해피엔딩의 편린을 보여 줬다.
그에 반해 나는 대체 뭘 보여 준 건가?
두 사람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니라고 해서 소홀하게 생각한 건 아닐까.
“조의신.”
백호군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백호군의 손가락이 닿아 있었다.
파아아…….
백호군의 손가락 끝에서 이능파가 움직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건……!’
백호군의 검지는 내 이능파의 색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예전에 황지호가 권제인과 적호의 이능파를 억눌렀을 때와 같은 방법을 쓴 것 같았다.
“그 버릇을 고치라고 말했을 텐데.”
설마 내가 이능파로 숨통을 눌렀던 것일까.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디바이스 너머로 장남욱이 계속 말했다.
[아, 우리 둘 사이에서 차이점이 있긴 했어.]
“……차이점?”
두 사람은 제3자의 시점이 아닌, 본인의 입장에서 꿈을 봤다고 한다.
[손민기가 탈출하다 실패한 직후의 서술이 조금 달라. 나는 그때 손민기한테서 시선을 못 떼고 있었어. 그에 반해 상훈이는 다른 쪽 출구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문 쪽을 보고 있었나 봐.]
두 사람은 꿈속에서 같은 공간에 있긴 했으나 몇몇 장면은 서로 다른 곳에 시선을 주고 있는 바람에 묘사가 엇갈렸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리플레이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리플레이는 게임대로 이 세계가 흘러갔을 때, 그 인물이 경험한 바를 꿈으로 재현하는구나.’
게임이 시작되는 건, 튜토리얼.
즉, 입학시험 당일이다.
두 사람이 꾼 꿈의 시작은 튜토리얼의 시작 시점과 일치했다.
그리고 게임 시작과 거의 동시에 사망한 두 사람은 그 순간을 그대로 악몽으로 경험했다.
‘리플레이를 활용하면 행적이 묘연했던 이들의 기억을 엿볼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그 악몽을 본인한테 보여 주라고?
이 세계의 모든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비참하게 죽는다.
현재 시점에서 이미 사망한 캐릭터도 있지만, 1년 뒤에 죽는 인물도 있고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며 버티다 죽는 주수혁, 안다인, 백호군 같은 캐릭터도 있다.
꿈에서라도 그걸 다시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의신아? 듣고 있어?]
장남욱의 말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백호군이 서늘한 표정으로 내 이마를 짚고 있는 게, 아직도 이능파 컨트롤이 안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백호군의 손가락 끝이 처음 내 이마를 짚었을 때보다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그 꿈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희들이 다시 그런 꿈을 꾸지는 않을 거야.”
[응? ……혹시 뭐 알고 있어?]
“나중에 내가 설명할게. 미안해.”
[의신아?]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은 후,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백호군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먼저 가 볼게.”
“조의신…….”
백호군은 나를 붙잡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백호군은 탐탁지 못한 눈으로 나를 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백호군은 검게 물든 손가락을 조용히 뗐다.
이대로 보내 줄 생각인가 보다.
“다음에 보자.”
벽사의 결계 밖, 태풍이 몰아치는 밖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하지만 그 전에 나와 백호군의 디바이스가 동시에 울렸다.
딩동.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금 메시지를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일단 기숙사방으로 돌아가서 현재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고 리플레이에 대해서 생각을…….
“가자.”
백호군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을 걸었다.
가자니, 어디로?
“네 디바이스를 확인해라.”
방금 온 디바이스 메시지는 백호군과 나에게 동시에 보낸 메시지인가 보다.
백호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낼 만한 이들은 많지 않다.
은호의 후예들이거나 황지호일 가능성이 큰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은호의 후예들이 보낸 메시지일 가능성도 있으니 확인해 보기로 했다.
[황지호] 네가 오늘 은련관에서 백호와 대련한다는 건 알고 있다.
[황지호] 대련이 끝났으면 같이 내 저택으로 오도록.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황지호] 녹족의 영약이 도착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