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30화 (230/925)

44. 악천후 뒤에 (1)

—넌 나한테 평생 태호권으로 못 이길 거다.

그렇게 말하던 청호는 태풍이 불던 날 사라졌다.

긴 세월이 지난 후.

황호는 인간이 된 청호를 다시 만났다.

‘결국 나는 평생 태호권으로 네게 이기지 못했군.’

한이와 태호권으로 진지하게 주먹을 맞대 보니 더 확실하게 느꼈다.

지금 저기에 있는 한이는 호족이 아닌 인간이다.

황호의 친우 청호가 아닌 황지호의 급우 한이다.

그녀가 청호로서 생을 보내는 동안 태호권으로 이기지 못했으니, 결국 황호는 평생 태호권으로 그녀를 이기지 못한 셈이다.

파아아…….

그때, 온몸을 때리던 빗줄기가 멎고 비와 바람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붉은 안개가 주변에 퍼져 있었다.

“황호, 왜 청승을 떨고 있는 겁니까?”

뒤를 돌아보니 적호가 보였다.

황호와 한이와의 태호권 대련이 끝난 후에도 적호는 체육관에 남아 있었다.

예상보다 적호가 빨리 등장한 것을 보고 황호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공청훤과 한이를 더 지켜보다 올 줄 알았는데. ……인간이 된 청호와 신인을 오래 지켜볼 수 없었나 보군.’

황호가 가라앉은 눈으로 적호를 바라봤다.

황호의 시선을 받은 적호는 아들과 화해한 이후, 예전에 비해 부쩍 신랄해진 입을 놀렸다.

“당신이 이 정도 태풍을 그대로 맞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건 알지만, 부하나 후예들이 보면 걱정합니다. 청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떠십시오.”

“하하하! 그래. 네가 잘 가리고 있도록.”

“저택에 돌아갈 때까지만 수고를 하겠습니다.”

황호가 젖은 머리를 대충 밀어 올리고 적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잡담은 어느 사이엔가 보고로 바뀌어 있었다.

“전에 말씀하셨던 ‘성헌’이라는 인물에 관한 1차 조사가 끝났습니다.”

저택에 가까워졌을 때, 적호가 입을 열었다.

천단수 앞, 조의신이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언급한 인물 ‘성헌’.

계속 황호가 신경 쓰던 존재 중 하나였다.

“보고하라.”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이냐.”

“조의신과 관련된 모든 인물과 은광고 전교생의 친인척 조사까지 해서 찾아봤습니다만…….”

말꼬리를 흐리던 적호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가 답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성헌’이라는 이름을 쓰는 인물은 없었습니다.”

“……그렇군.”

“좀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황호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을 때.

황호의 시야 속으로 저택 앞에 정차되어 있던 에어 밴이 들어왔다.

적연으로 몸을 가린 탓에 에어 밴 안에 대기하는 이들의 눈에는 황호와 적호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에어 밴을 가만히 주시하던 황호가 디바이스를 켜 비서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 눈을 반짝거렸다.

“……황호?”

“향록이 방문한 듯하군. 들여보내지.”

황호가 비서에게 녹족의 수장, 향록을 들여보내도 좋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곧 연락을 받은 것인지 에어 밴 안에서 작은 그림자가 우산을 들고 뛰쳐나왔다.

향록 뒤로 비서팀 소속 호족들이 트렁크를 들고 이동하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트렁크를 본 황호가 아주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조의신은 은련관에서 백호와 대련을 한다고 했지. 둘을 같이 불러오면 되겠군.”

조의신과 백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황호의 얼굴은 지나치게 밝았다.

적호는 조의신과 백호, 신수가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황호가 저리 신난 걸 보니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    *    *

당장 기숙사 방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 백호군을 뿌리치고 갈 수 없었다.

백호군 손가락 끝이 검게 물든 걸 보니 더 그랬다.

대체 녹족의 수장은 왜 이런 타이밍에 영약을 완성한 건지 모르겠다.

이 궂은 날씨에 밖을 싸돌아다니며 영약을 날라야 하나?

완성은 오늘 했더라도 태풍이 멎을 때쯤 완성품을 가져온다는 선택도 있지 않은가.

“조의신.”

아득해진 정신을 백호군의 목소리가 되돌렸다.

“……그래, 가자.”

그냥 황지호가 보낸 메시지뿐이라면 나중에 뭐라 하든 말든 오늘은 무시했을 텐데.

결국 나는 황명호 대저택까지 가게 되었다.

바로 본채로 가는가 싶었는데, 본채 출입이 불가능한 녹족의 수장을 만나기 위해서인지 별채 쪽으로 향했다.

“백호, 안녕! 인간도 안녕!”

폭풍 속에서도 만개한 호랑이꽃으로 뒤덮인 미로 정원을 빙 둘러 도착한 별채.

수많은 별채 중에 오늘도 향록은 한옥 타입의 별채에 왔나 보다.

별채 입구에서 향록이 손을 휙휙 저으며 나와 백호군을 맞이하고 있었다.

크르르……!

별채 안쪽에서 지옥의 낭떠러지에서나 들릴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 산령이 저기에서 놀고 있나?

아니면 황지호가 내는 소리겠지.

“신수, 그만 포기하세요. 마침 백호와 조의신도 왔군요. 같이 먹으면 견딜 만할 겁니다.”

적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신수라고?

별채 안에 나의 천사 올무도 있는 모양이다.

왕왕!

곧 천사가 별채 밖으로 나와 나를 맞이해 줬다.

향록이 만든 영약을 먹는 게 힘들고 무서울 텐데도 우리 올무는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아주 대견했다.

착한 올무를 격려해 주기 위해 번쩍 안아 들고 쓰다듬으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끄응?

올무가 내 손가락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다 나를 올려다봤다.

왜 그러지?

올무가 내 손가락을 꼭 안았다.

‘아, 혹시…… 손가락이 너무 차가워서 그런 건가.’

체스를 한 직후에 장남욱으로부터 ‘리플레이’에 관해 들었다.

그때, 체스를 하면서 식었던 손이 더 차가워졌나 보다.

“오늘 태풍 때문에 날이 서늘해서 그래. 난 괜찮아.”

착한 올무가 계속 끙끙거렸다.

그걸 옆에서 보던 향록이 밝게 말했다.

“고작 태풍 때문에 그래? 인간은 연약하구나. 내 영약을 먹고 빨리 건강해져!”

향록의 말에 다시 손이 식는 것 같았다.

“객당(客堂)을 두고 대청마루에서 다들 뭐 하는 거냐. 들어가자.”

뒤에서 황지호가 등장했다.

별채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황호, 안녕! 뭐 하다 왔어?”

“비를 좀 맞았다. 손님이 여럿 왔으니 정결한 차림새를 갖추고 왔지.”

비를 맞아?

저놈을 상대로 물세례를 날리려면 지진 해일로도 부족할 텐데.

대체 뭔 청승을 떨다가 비를 맞은 건가.

‘……그런데 정결한 차림새?’

황지호가 말하는 정결한 차림새는 은광고 하복이었다.

황지호는 여전히 방학 중에도 제 컨셉에 충실한 모양이다.

“가자! 미리 준비 다 해 놨어!”

이전에도 한 번 방문한 객당으로 이동하니 비단 보료방석이 이미 깔려 있었다.

약재와 포도가 섞인 향이 나는 게, 이번엔 향록이 8월 제철 과일인 포도에 생강과 약재를 넣어 약차를 만들어 온 것 같았다.

‘녹족의 수장이 약차를 잘 만드는구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 약차 대신 영약을 먼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향록 바로 앞에 깔린 비단 방석 세 개는 나, 올무, 백호군의 자리인 듯했다.

향록은 우리가 앉자 중탕으로 데워진 파우치 세 개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자, 마셔! 먹은 직후의 변화를 관찰하려고 내가 직접 왔어. 필요하다면 조정도 할게!”

약이 완성되면 향록이 진료할 필요도 없을 텐데 왜 왔나 했다.

필요하면 더 맛없게 만들 것 같아 경계심이 치솟았다.

“어서 드시죠. 입가심으로 드실 간식도 준비했습니다.”

적호가 내민 건 한입 크기로 썬 곶감젤리였다.

적호는 아직도 김신록 건으로 백호군에게 앙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백호군이 굳은 얼굴로 영약과 곶감을 봤지만, 우리 셋 중에선 가장 먼저 다 먹었다.

표정이 굳은 상태로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운 인내심이었다.

나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본받아 영약을 삼켰다.

‘……맞춤 영약은 더 맛이 없잖아!’

영약을 복용하자 몸 곳곳에서 온기가 차올랐지만, 맛이 없어서 정신은 지쳤다.

영약을 전부 마시고 곶감젤리를 입에 밀어 넣었지만, 저세상으로 간 미각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올무가 몇 차례나 쉬었다가 마셨다가를 반복하는 걸 마지막으로 영약 시음회가 끝났다.

“음, 문제없는 것 같네! 역시 내가 만든 영약이야!”

맛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시음한 당사자의 생각과 달리 향록은 만족한 얼굴로 그리 외쳤다.

“아, 전에 황호가 부탁해서 연구하던 것 말인데 성과가 있었어. ……여기서 말해도 될까?”

향록이 슬쩍 내 쪽을 봤다.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인간이니 신경 쓰였나 보다.

“말해도 좋다.”

실컷 처웃으며 시음회 광경을 감상한 황지호가 말했다.

“응, 그럴게! 전에 황호가 줬던 인간으로 열심히 임상 시험을 거듭한 결과, 새로운 버전의 치험약을 개발했어!”

황호가 줬던 인간?

황지호를 쳐다보니 부연 설명을 해줬다.

“너도 아는 인간들이다. 청소년 수련회 당시에 실종된 지도사들을 넘겼지.”

흑막과의 거래에 응해 무고한 학생들과 주민들을 폭탄으로 날려 버리던 그놈들 말인가.

크고 작은 비리를 저지르고 학생을 괴롭힌 것도 그랬지만, 폭탄 건을 생각하니 용서가 안 됐다.

‘이능독 해독제를 개발하면 그나마 이 세계에 도움이 되겠지.’

그들을 대상으로 어떤 임상 시험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청소년 수련회 당시 황지호가 사용했던 치험약에 내장을 녹이는 부작용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충 짐작이 갔다.

“여전히 내장은 녹아. 그래도 이번 버전은 높은 희귀도의 회복 아이템과 동시에 사용하면 내장이 녹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인간도 사용할 수 있어!”

“흠, 괜찮군.”

……저게 괜찮은 걸까?

향록이 더 열심히 연구해서 제대로 된 해독제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향록은 새로운 버전의 해독제를 몇 정 넘긴 후, 고액권의 현금이 가득 담긴 트렁크를 받았다.

제 몸보다 더 큰 트렁크를 질질 끌며 향록은 몹시 기뻐했다.

향록은 새로운 연구에 저 돈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비바람이 심하군. 원한다면 별채에서 묵고 가도 좋다.”

“괜찮아! 연구실에서 실험 경과를 지켜보고 싶은 게 있어서…… 오래 내버려 두면 죽는 실험체가 나올 수도 있고.”

콰쾅!

현관을 나서는 향록 뒤로 번개가 내리쳤다.

향록은 아담한 체구에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야기의 내용이나 시커먼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바람과 벼락을 배경으로 말하는 탓에 살벌하게 보였다.

비서진의 배웅을 받으며 향록이 저택 밖으로 나갈 때, 영약 파우치가 든 가방을 들고 나도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영약을 먹느라 지친 신수를 내버려 두고 돌아갈 생각인가? 은인은 참으로 매정하군.”

“묵고 가시죠. 은호의 후예들도 기뻐할 겁니다.”

황지호와 적호가 그렇게 말한 것에 이어 올무가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끄응…….

귀를 접은 올무가 백호군의 품에서 내 쪽으로 오려고 버둥거리는 게 보였다.

그래도 망설여졌다.

‘리플레이’로 장남욱과 유상훈에게 악몽을 뿌린 내가 이곳에서 쉬어도 될지 판단이 안 섰다.

“조의신.”

망설이던 중에 백호군이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내 이능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짚었던 검지였다.

그리고 백호군은 황지호와 적호, 올무를 쳐다봤다.

‘돌아가겠다고 하면 알리겠다는 뜻인가……!’

더 고민할 수 없었다.

나는 올무를 받아 들고 호랑이들과 함께 호랑이꽃이 활짝 핀 미로 정원 너머 본채로 향했다.

*    *    *

황명호 대저택에서 맞이한 아침.

올무를 품에 안고 눈을 뜨니 디바이스가 메시지 수신을 알리며 울리고 있었다.

주수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주수혁] 의신아, 우리 효돈이 찾으러 안 갈래?

[주수혁] 여기가 지금 탁 할아버지가 수련 중인 산이라는데, 태풍으로 엉망이 되었다 해서.

[주수혁] 방학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데리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주수혁이 보낸 기사에는 산사태가 발생해 토사로 엉망이 된 홍천의 어느 야산이 찍혀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3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