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악천후 뒤에 (6)
고등학생이 된 방윤섭은 몇 번이나 변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변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바로 행동으로 실천해 결과를 얻는 건 소수의 노력가와 천재들뿐이다.
그리고 방윤섭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젠 진짜로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심한 순간 넘치던 의욕은 지루하고 고된 훈련 속에 무뎌져 갔다.
은광고에 입학하면 변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변하지 않았다.
탁거산의 제자가 되면 변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변하지 않았다.
수련회에서 위기를 겪고, 근접 전투에선 제일을 다투는 유수의 격투가의 제자가 되는 등의 온갖 극적인 사건을 겪어도 방윤섭은 여전히 등신인 그대로였다.
등신에서 보통 사람으로, 보통 사람에서 초일류 플레이어로 거듭나게 하려면 계기 외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 인내가 필요한 법이었다.
탁거산이 주는 과제를 수행하고, 고단한 수련을 견디면 강해지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것과 실제로 그걸 견디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었다.
‘대체 저 쥐방울만 한 새끼는 어떻게 참는 거야. 어떻게 저걸 다 하냐고!’
방윤섭의 옆에서 묵묵히 수련을 견디며 성장하는 맹효돈을 보며 깨달았다.
저게 진짜 노력가고, 천재라는 걸.
재능을 타고나더라도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인내를 통해 개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견뎌 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가는 맹효돈에 비하면, 방윤섭은 보통 인간에 불과했다.
‘……그래도 곧 쉴 수 있어! 태풍이 강원도 쪽으로 오니까!’
그리고 태풍이 홍천을 강타하기 직전.
탁거산은 일기예보를 보고도 태풍에 맞춰 수련을 기획했다.
곧 태풍이 오니까 쉴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버티던 방윤섭이 버럭 소리를 질러 매를 벌었다.
“태풍이 오는데 수련이라고? 미쳤어!”
“스승에게 미쳤다니, 고얀 놈!”
“크악!”
‘빡!’ 하는 호쾌한 소리와 함께 방윤섭의 이마에 딱밤이 떨어졌다.
일견 탁거산은 가볍게 주먹을 휘두른 것으로 보였지만, 방윤섭이 피할 수 있는 스피드도 아니었고 골통이 저릿해질 정도의 데미지를 줬다.
“가자, 제자들아!”
비가 조금씩 떨어지는 가운데, 탁거산은 기운찬 목소리로 제자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이 산을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풍의 위세가 맹렬함을 더해 갔다.
그들이 홍천의 야산 정상까지 올라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삐이이!
무음 모드,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해 둔 그들의 디바이스에서 일제히 알람 소리가 울렸다.
현재 모드에서 수신하는 거라곤 협회 위성에서 발신하는 경보뿐이었다.
탁거산은 신속하게 디바이스를 가동해 홀로그램을 열었다.
“……협회의 비상소집이로군.”
태풍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큰 피해가 예상되니 해당 지역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구조 활동에 협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구조 활동 협력 요청…… 그런 것도 있었지.’
자연재해, 이계 발생.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 플레이어는 보통 후자에 전념한다.
플레이어가 자연재해에 대응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인도적 차원에서 다른 이들을 돕고, 또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수습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계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협회 측에서는 플레이어들의 구조 활동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이계 공략과 달리 포상금도 받을 수 없지만, 플레이어의 대다수는 협력 요청이 오면 흔쾌히 응했다.
일종의 자원봉사단처럼 자연재해에 전문적으로 대응하는 플레이어 단체도 있을 정도였다.
‘설마 이 와중에 훈련을 더 하자고 하진 않겠지?’
방윤섭이 긴장한 기색으로 탁거산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탁거산은 구조 활동에 합류할 생각인 듯했다.
협력 요청에 응해 홍천군청 앞으로 이동하니, 거세진 빗줄기 속에서 우비를 입은 이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군청 앞 주차장에는 소방차와 경찰차가 오고 가고 있어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소집에 응한 플레이어는 5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현재 한반도 전 지역에 태풍이 강타하는 바람에 근방 지역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저 인원수를 보니 방윤섭은 눈앞이 팽팽 도는 기분이었다.
‘이 동네는 왜 이렇게 플레이어가 없지? 홍천군 인구수가 7만 정도인데, 당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플레이어 비율이 1%밖에 안 된다고 해도 대충 700은 되어야 할 거 아니야……!’
지방 지역의 고령화를 고려해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 플레이어들이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상했다.
홍천군에 상주 중인 플레이어가 그리 많지 않다고 고려해도 이곳은 지나치게 플레이어의 수가 적었다.
방윤섭이 의문을 품은 가운데, 탁거산 쪽으로 온 공무원이 비닐로 코팅된 지도를 내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탁거산과 은광고 학생 둘로 구성된 방윤섭 일행 쪽에는 까다로운 요청이 떨어졌다.
“이 동네는 상습 침수 지역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리가 끊겨서 이 지역이 고립됐어요. 지금 파견할 소방 인력이 부족해서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산자락에 있는 마을 이장 집에 대피 중이긴 한데 지병을 앓고 계신 분도 있고, 산사태가 염려돼서…….”
그들이 받은 요청은 폭우에 유실된 굴다리 탓에 고립된 주민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네 몸 얘기는 근형이한테 들었다. 몸을 사리거라.”
“……네!”
출발 전, 탁거산이 맹효돈에게 당부하는 게 보였다.
방윤섭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저 새끼는…… 어디가 아픈 건가? 아픈 몸으로 저렇게 잘 싸운다고?’
그때는 빵셔틀 졸업을 위해서 생각없이 그저 탁거산이 하라는 대로만 움직였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내기 시합 당시 옥타곤 스테이지에서 맹효돈이 보인 모습은 이상했다.
이상할 정도로 다치는 걸 꺼려 했던 게 어딘가 걸렸다.
‘젠장, 지금 남 걱정할 때냐!’
사고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들은 홍천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협력 요청에 응했다.
그사이에 빗방울과 바람은 점점 굵어져 몸이 무거워지고, 젖은 옷이 체온을 빼앗아 갔다.
방윤섭의 체력이 점점 바닥을 향해 가는 데도 태풍은 지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맹효돈은 여전히 쌩쌩했고, 탁거산은 처음부터 이능파를 몸에 둘러 비 한 방울 맞지 않는 신기를 선보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방윤섭의 좌절감과 패배감은 커져만 갔다.
‘저 70은 훨씬 넘긴 노인한테 밀리고, 키는 나보다 훨씬 작은 데다 무슨 병까지 있는 거 같은 땅꼬마 새끼한테 밀리다니……!’
이를 악물고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 방윤섭은 한계에 달했다.
탁거산이 숨을 몰아쉬며 버티려는 방윤섭을 말렸다.
“빵셔틀아,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거라.”
“아오, 진짜! 빵셔틀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른 것을 마지막으로 방윤섭의 기력은 다했다.
그는 더 이상 이능파를 낼 수 없었고 몸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결국 방윤섭은 홍천군청 근방의 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피난소에서 쉬게 되었다.
체육관 한구석에서 찌그러져 까무룩 잠이 들고 일어나니 모든 게 끝나 있었다.
태풍은 지나갔고, 탁거산과 맹효돈 두 사제는 많은 사람을 구해 냈다.
영웅이 된 두 사제가 방윤섭 근처에서 이불을 깔고 세상 편하게 자는 걸 보니 그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에 잠겼다.
‘……난 대체 뭘 한 거냐.’
방윤섭은 잠든 두 사람을 두고 비척비척 체육관 밖으로 걸어 나갔다.
태풍이 지나간 덕에 날이 좋았다.
떨어진 간판, 뒤집힌 천막, 여기저기 꼬인 현수막, 부러진 가로수 등으로 거리는 엉망이었지만 하늘은 쾌청하고 사람들은 활기차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처 없이 걷던 방윤섭이 도착한 곳은 그가 낙오되었던 장소, 오음산이었다.
오음산에 버섯을 캐러 산에 올라갔다가 연락이 두절된 60대 노부부의 수색을 요청받아 향했던 장소였다.
‘둘이 편하게 자빠져 자는 걸 보니 무사히 구출했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마음이 답답했다.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니 떠오른 건 담배였다.
‘……어차피 여기엔 조의신 그 개새끼도 없고 도인이랑 그 제자 놈은 자고 있으니까 안 걸릴 거야.’
방윤섭은 등신 같은 능력을 총동원하여 숨겨 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고 입에 물었다.
일단 그렇게 꺼낸 건 좋았는데 문제점이 있었다.
‘불이 없잖아!’
방윤섭이 제 등신 같음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가려 할 때.
방윤섭의 앞에 조의신과 주수혁이 등장했다.
* * *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방윤섭을 본 순간 고민에 빠졌다.
‘감자빵을 사 오라고 해야 하나, 옥수수빵을 사 오라고 해야 하나.’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방윤섭이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아, 불 안 붙였잖아!”
“윤섭아…….”
주수혁은 방윤섭의 손에서 번개같이 담배를 빼앗아 갔다.
방윤섭이 반사적으로 주수혁이 든 담배 쪽으로 손을 뻗다 뻘쭘해하는 얼굴로 손을 거뒀다.
주수혁이 담배를 허공에 휙 던졌다.
팟!
순간 허공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주수혁이 짧은 시간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해 쌍검을 소환한 후, 담배 한 개비를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가루가 된 담배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헐…….”
“방학 동안에 청소년 금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시설이 있어, 가 볼래?”
“아니, 내가 거길 왜 가! 안 피웠잖아!”
주수혁의 절기에 넋을 잃었던 방윤섭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방윤섭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빠악!
“꾸억!”
통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방윤섭이 나무 기둥 쪽에 처박혔다.
방금까지 방윤섭이 서 있던 자리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탁거산이 서 있었다.
주먹을 보니 딱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또, 또 피웠느냐! 이놈이 다른 곳도 아니고 산에서 담배를 피우려고 해!”
“아오, 안 피웠다고!”
두 사제가 옥신각신할 때.
내 뒤쪽에서 희미하게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말발굽이 지면을 박차는 듯한 소리였다.
“잠깐, 누가 오고 있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흥분한 탁거산을 비롯한 전원이 기척을 느낀 듯 내 뒤를 바라봤다.
흑발에 어두운 빛의 피부를 가진 누군가가 세 마리의 백마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맨 앞에 선 박력 넘치는 흑발의 여자는 초면이었지만 백마 셋은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저 말은 혹시…….’
민그린, 송대석과 함께 홍경복을 만나러 홍천을 방문한 날.
오음산의 삼마치를 지나갈 때 갑자기 에어택시가 멋대로 정차한 적이 있었다.
에어택시가 정차한 그 밑에서 세 백마가 가만히 우리 쪽을 올려 보다 사라졌었다.
‘그때 그 백마들인가?’
탁거산이 순식간에 내 뒤편으로 이동해 가장 앞에 서서 백마를 이끄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진족이군. 여긴 무슨 일이시오.”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긴 했는데, 진족이었나 보다.
“소란스럽네. 모처럼 감사 인사를 표하려고 왔는데.”
그 목소리를 들으니 상대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예전 12지 동맹 회담 당시에 들어 본 적이 있던 목소리였다.
“안녕, 나는 마족(馬族)의 수장이야. 인간 사이에서 쓰는 이름은 없어. 그냥 ‘흑마(黑馬)’라고 불러.”
상대는 12지 동맹의 일각, ‘예민한 흑마’라는 대화명을 쓰던 마족(馬族)의 수장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