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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38화 (238/925)

44. 악천후 뒤에 (9)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훈련장.

현재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고등부는 여름 방학 중으로, 자율 훈련 기간에 해당했다.

그럼에도 1학년 생도 전용 연병장에는 거의 전 생도가 모여 있었다.

자율 훈련 기간에 돌입하자 기수장 장남욱이 단체 훈련을 제안해 대다수의 생도가 이에 응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우린 아직 군인도 아니고, 고1 첫 방학인데 훈련을 해야 함?’이라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생도들이 많았다.

그러나 장남욱과 같은 반에 소속한 생도들이 의리를 세워 전원 참가했고, 이에 자극을 받아 참가하는 생도들이 점점 늘었다.

삐이익!

휴식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 몇몇 생도들이 연병장에 주저앉거나 엎어졌다.

도시후는 1학년 생도 중 가장 먼저 바닥에 대 자로 드러누웠다.

진짜 힘들어서 그대로 뻗은 생도들과 달리 도시후는 엄살을 부리며 투덜거렸다.

“……아, 힘들다. 지금 수혁이네는 주오 아일랜드에서 엄청 재밌게 놀고 있겠지. 우리도 거기 갈 수 있었는데.”

도시후의 말대로였다.

주수혁은 청소년 수련회 사건에 휘말린 은광고 1학년 학생들과 교사진을 주오 아일랜드로 초대했는데, 원래 그 초대객 중에는 사관학교 생도들도 있었다.

키모폴레이아에서 이계 충돌과 자연 이능파 방출 사건이 터졌을 때, 그 자리엔 도시후와 장남욱이 있었고 주수혁은 그들을 초대하기로 약속했었다.

주수혁은 사관학교 생도들과의 약속도 잊지 않고 있었다.

—주오 아일랜드를 전세 낼 계획이야. 방학 끝나기 전에 같이 가지 않을래?

—우리도 반 아이들이랑 오니까 너희들도 사관학교 생도 애들 데려와! 이동 수단은 은광고에서 천자(天子)를 빌려주기로 했고, 일용품은 리조트에서 주오 브랜드의 어매니티를 제공할 거야. 몸만 오면 돼.

그러나 장남욱은 고심 끝에 주수혁의 호의를 사양했다.

장남욱은 주오 아일랜드에서의 일정도 제대로 묻지 않고 사관학교 생도들과 세운 훈련을 핑계로 이를 거절했다.

다행히 주수혁은 싫은 얼굴 하나 하지 않고 다음에 같이 가자며 답했지만, 장남욱은 거짓말을 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장남욱이 다른 아이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이를 거절한 건 훈련 때문이 아니었다.

‘……시후한테는 ‘저주의 씨앗’이 심어져 있어. 바다에서 일이 터지면 뱃멀미도 심하고 맥주병인 시후는 버티지 못할 거야.’

도시후에게는 아직 별일이 없긴 하지만, 가끔 ‘저주의 씨앗’이 남긴 기색이 눈에 보일 때마다 속이 답답했다.

도시후는 그런 장남욱의 속도 모르고 주오 아일랜드에 가고 싶다면서 징징거렸다.

징징거리는 선에서 그쳤으면 차라리 나을 지도 몰랐다.

“주오 아일랜드로 나를 데려가 주오! 하하하!”

철없는 도시후는 분노를 부르는 허무한 말장난을 쳤다.

오죽하면 저러나 싶었다.

장남욱이 그 말장난을 무시하는 대신 ‘수혁이의 제안을 멋대로 거절해서 미안하다.’라는 몇 번이나 했던 사과의 말을 입에 올리려고 할 때, 빡빡머리를 한 생도들이 나타나 도시후를 에워쌌다.

“이 미친놈이 배도 못 타면서 섬 타령을 하고 있네.”

“이 새끼 해군 커리큘럼 신청한 애한테 수업 자료 달라고 딜하는 거 봄.”

“미친 새끼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2학기 수강 신청 확인서 내놔. 해군 커리큘럼으로 몰래 변경 안 한 거 맞냐?”

“수강 신청 기간은 한참 전에 지났는데, 저 새끼가 뭔 짓을 했을지 모르니까 다시 확인하자.”

“그러자.”

도시후를 둘러싼 생도들이 도시후에게 손을 뻗었다.

평소 같았으면 장남욱이 말렸겠지만, 장남욱은 도시후를 외면했다.

대신 훈련으로 고생한 생도들에게 수분 보충이나 시켜 줘야겠다며 장남욱이 아이스박스에서 이온 음료수병과 얼린 컵을 꺼내 생도들에게 따라서 건네주기 시작했다.

“어? 어…… 수강 신청 확인서를 훈련 중에 들고 있을 리가 없잖아. 잠깐, 악!”

생도들이 도망치려는 도시후를 제압했다.

그리고 곧 도시후의 전투복 조끼 안주머니에서 ‘기간 외 수강 과목 변경 신청 안내문’을 발견했다.

우연히 갖고 있다고 변명할 수도 없는 게, 안내문 뒷면에 나온 과목 코드 중 해군 커리큘럼 과목 코드에 형광펜으로 체크가 되어 있었다.

그냥 도시후를 괴롭힐 생각으로 품을 뒤지던 생도들과 낄낄거리며 이를 구경하던 생도들의 얼굴이 싸악 굳었다.

생도들에게 음료수를 나눠 주다가 상황 파악을 뒤늦게 한 장남욱의 얼굴에서도 혈색이 가셨다.

도시후의 무단 외출 사건으로 인해 고초를 겪은 장남욱과 다른 생도들의 얼굴을 봐서 해군 커리큘럼은 택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 새끼 진짜 미친놈이네.”

“아니, 그냥…… 나중에라도 과목을 바꿀 생각은 없었고, 가지고만 있으려고 한 건데. 진짠데…….”

“닥쳐.”

퍽!

생도 하나가 도시후의 복부에 주먹을 날린 것을 시작으로 생도들이 1열 종대로 나란히 서서 도시후를 한 대씩 팼다.

도시후에게 주먹을 날린 이들은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장남욱에게서 얼음 컵을 건네받았다.

도시후가 그로기 상대로 연병장에 뻗어 있을 때, 제일 먼저 도시후를 때렸던 빡빡머리의 생도가 말했다.

“기수장! 너 패라고 얼굴은 남겨 놨다!”

“그래, 우리가 규연이가 쟤 턱주가리 날리려는 거 말렸어.”

“막타 치고 다시 훈련 시작하자.”

어느 사이엔가 도시후가 사고를 칠 때마다 안면은 장남욱이 팬다는 암묵적인 룰이 생긴 것 같았다.

장남욱은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남욱이 불쌍한 척 눈을 까는 도시후를 보며 말했다.

“시후야, 왼쪽이랑 오른쪽 중에 어느 쪽 얼굴을 맞을래?”

“기수장은 특별히 두 대 때리는 걸로 하자.”

“그러자!”

결국 도시후는 양쪽 뺨을 다 얻어맞았다.

*    *    *

주오 아일랜드는 인천항을 기준으로 석모도보다 먼 곳에 있었고, 천자(天子)에서의 항해를 즐기지 못했던 학생들을 배려해 상당히 느린 속도로 이동했다.

느긋하게 항해를 즐기다 보니 늦은 시각에 도착해 배에서 내릴 때쯤은 슬슬 저녁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SNS에 주오 아일랜드 후기 올라온 거 보니까 음식들 다 맛있어 보이던데……! 저녁 뭐 나올지 기대된다!”

“뭐가 나오든 수련회 밥보단 맛있겠지.”

주오 아일랜드의 해시 태그는 흔히 SNS상에서 ‘셀럽 판독기’로 불리지만 ‘먹방 테러’ 태그로도 불렸다.

해당 태그가 붙은 게시글 중 광고가 아닌 게시글에는 화면 너머로만 봐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의 사진이 실려 있곤 했다.

기대에 찬 얼굴로 아이들이 내리는 가운데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놈이 있었다.

바로 목우람이었다.

“……레나 님은 목소리도, 심성도 곱군요. 저의 뮤즈께서는 단순히 음색만 아름다운 게 아니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 천천히 내리겠다는 핑계로 목우람은 결국 따로 이동했다.

이놈은 권레나와 함께하는 여행이 너무나 황송하여 바로 옆에는 못 있겠다고 한다.

김유리가 반장이긴 하지만 이 위험한 놈을 막 병실 밖으로 나온 김유리에게 떠맡길 수도 없으니, 목우람을 맡게 된 건 부반장인 나와 함근형 선생님이었다.

“……레나 님? 뮤즈?”

함근형 선생님은 복잡한 얼굴을 했다.

새로 합류한 0반 학생이 또라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저는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3박 4일간 호텔에 머무는 동안 레나 님께서 불편해하시면 어떻게 하죠?”

목우람의 문제점은 혼잣말뿐만이 아닌데.

목우람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듯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원래부터 레나 님은 같은 기숙사 건물에 머물렀습니다! 그동안 제가 레나 님께 피해를…….”

목우람은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일단 말이 길어지고 있으니 목우람을 안심시켜 주기로 했다.

“은광고 기숙사 건물은 방음이나 이능파 대책이 완벽하게 세워져 있어. 창문을 열어 두거나 벽을 부수지 않는 한 들리지 않을 거야. 여기 리조트도 그렇고.”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여태까지 여행지에서 그 문제로 트러블을 몇 번 겪어서요.”

목우람은 여행하는 동안 호구처럼 다 털리고 살았으니 허술한 숙소에서 묵었을 거다.

낙후된 시설은 성장기인 플레이어가 장기간 머물기에 그리 좋지 않다.

은광고와 주오 그룹은 플레이어 수용 시설 관련 건축법을 철저하게 준수 중이니까 그 점은 문제없다.

청소년기에는 취침 시 이능파를 저도 모르게 흘리는 이들이 있기에 플레이어 특목고 기숙사나 방음과 이능파 대책은 필수였다.

입학 첫날에 권레나 사건으로 소란스러워졌을 때에도 창문을 열어 둔 학생이 없었다면 기숙사 안에 있는 학생들은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을 거다.

목우람과 대화하며 하선할 때, 멀리서 주수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의신아! 숙소 배정 문제로 얘기할 게 있는데…….”

“목우람은 나한테 맡기고 다녀와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보자.”

이번 여행의 목표는 반 아이들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여름 방학을 만끽하게 하는 것이다.

빨리 대화를 마쳐서 함근형 선생님을 쉬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주수혁 쪽으로 갔다.

주수혁 주변에는 각 반의 반장과 부반장이 모여 있었다.

김유리와 안다인은 수련회 사건 이후로 만난 게 처음이라 그런지, 밀린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김유리는 면회가 어려웠고, 안다인도 바빴으니 오랜만에 보는 거겠지.’

안다인도 타이틀 히로인답게 주수혁 못지않게 바빴다.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움직이는 스토리와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탓이었다.

은거한 정치인을 타깃으로 한 암살 저지, 미궁 타입 이계에서 길을 잃은 플레이어 수색 등 안다인도 여름 방학 사이에 많은 퀘스트를 수행했다.

‘안다인도 게임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해냈어. 김유리가 무사하고, 솜뭉치가 죽지 않았고, 안다인을 괴롭히는 부정 입학자나 담임이었던 최편득이 없어서 그런 건가.’

얼음꽃 같다는 평을 받는 안다인이 오늘은 햇살 속에서 해바라기처럼 웃고 있었다.

그리고 주수혁은 행복해하는 얼굴로 안다인을 보고 있었고, 문새론은 그런 주수혁과 안다인의 사진을 찍고 싶은지 손이 근질근질해 보였다.

“왔냐.”

“……어.”

태풍 이후의 암살 사건 이후로 유상훈과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나와 장남욱이 했던 대화 내용은 유상훈도 알 거라고 생각하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미묘했다.

‘그 악몽은 나 때문에 꾼 거라고 확실히 말해야 하는데.’

그날 내가 뜬금없이 이젠 악몽을 꾸지 않을 거다, 미안하다고 했으니 이미 눈치챘을 거다.

그러나 내가 직접 사실을 고하는 것과 그저 짐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악몽의 원인을 안 장남욱과 유상훈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의 성격을 고려하면 화를 내거나 사죄를 요구하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이상하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악몽의 원인을 말한 후에도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까?’

방 배정표를 받고, 다시 0반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사이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    *    *

배정받은 방에 짐을 두고 해변으로 나온 우리의 첫 일정은 바비큐 파티였다.

천자(天子) 안에서도 은광고에서 제공하는 다과를 실컷 먹긴 했지만, 여행지에 와서 그런지 배가 금방 꺼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바다에서 놀아 체력을 소모하고 온 아이들이 빨리 밥을 내놓으라며 항의하기까지 했다.

여섯 시가 넘었지만, 아직 해가 긴 탓에 환한 해변가에서 화로와 그릴을 설치해 제각각 모여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준비된 재료는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킹크랩, 새우, 양송이버섯, 통옥수수, 아스파라거스 등 없는 게 거의 없었다.

“하하하하! 이 몸이 나설 때가 된 것 같군.”

1학년 0반의 셰프는 본의 아니게도 황지호로 정해졌는데, 요리에서만큼은 나잇값을 해서 기가 막히게 양념을 배합하고 고기와 야채를 구워 냈다.

바비큐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황지호와 교사진, 이능파에 민감한 학생들 몇몇이 바다 저편을 보고 소리 질렀다.

“……뭐가 온다!”

“물 밖으로 나와!”

해수욕을 하던 학생 몇 명이 급히 밖으로 뛰어나오고 교사진들이 해변가로 달려갔다.

바다 저편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주오 아일랜드 주변에는 이능 트랩이 설치되어 있어. 조수를 타고 이쪽으로 오는 것도 불가능해!”

학생들이 순식간에 무기를 꺼내 들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청소년 수련회 사건을 겪은 아이들이 이런 상황에는 조금 익숙해진 것 같았다.

“흠, 공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안광으로 바다 저편을 노려보다 이능파를 거두고 홀로 한가롭게 양념을 배합하는 황지호가 말했다.

지금 해변가로 상륙하려는 무언가는 황지호가 아는 상대일지도 모르겠다.

곧 거지꼴을 한 누군가가 해변가로 기어 왔다.

“뭐, 뭐야. 현지인?”

“이계의 틈에서 흘러나온 원시인 같은 게 아닐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지만 잘 보니 저건 나도 아는 인물이었다.

나만 아는 것도 아니고, 아마 전교생이 아는 유명 인물일 것이다.

“밥…… 고기…… 살려 줘…….”

모래사장으로 비척비척 걸어오는 인물은 은광고 하복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좀비처럼 이쪽으로 오고 있는 인물의 정체는 무인도로 부트 캠프를 떠난 것으로 알려진 3학년 0반의 반장, 우기환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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