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42화 (242/925)

45. 처서에 비가 오지 않으면 (4)

용제건이 부재중이었지만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처음에 우리가 계획한 캠프파이어는 기껏해야 선물을 주고받고 맛난 걸 먹으며 선생님과 반 아이들과 대화를 하거나 노는 그런 단순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3학년 0반이 끼어들며 기획이 맛이 갔다.

해가 지고 캠프파이어에 불을 붙이기 전, 3학년 0반 놈들이 언제 만든 건지 직접 만든 종이컵에 꽂은 양초를 배부했다.

‘설마 그…… 전설의 촛불 의식을 할 셈인가!’

청소년 수련회에 참석한 이들은 누구나 겪는다는 캠프파이어 촛불 의식.

뻔하고 상투적인 말로 감성을 자극해 수많은 청소년을 울려 흑역사를 남긴다는 유서 깊은 전설의 의식이었다.

내 예상대로 사회를 맡은 우기환은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우기환이 신호를 보내자 3학년 0반의 국악부 소속 학생이 리조트의 음악 체험관에서 빌려 온 듯한 해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캠프파이어, 촛불 의식과 해금은 어울리는 구석이 없었는데 국악부 0반 선배놈의 연주가 지나치게 출중해서 조화의 여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금에서 흘러나오는 구슬프고 청명한 음률은 교사진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나와 친구, 선생님, 주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 희망의 빛을 밝힐 촛불에 빛을 전하겠습니다.”

플레이어는 밤눈이 밝은 편이니 이 정도 어둠에 앞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대체 저 선배놈이 무슨 짓을 할지 지켜보기로 했다.

서로에게 촛불의 불을 전하며 촛불 점화 의식을 마친 후.

해금으로 연주되는 ‘꽃이 피고 지듯이’를 배경으로 우기환이 진중하게 말했다.

“자, 이제 눈을 감고 나 자신, 친구, 가족, 부모님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제정신이 아닌 우기환의 머리에서 어떻게 나온 건지 모를 감상적인 멘트가 아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해금의 절절한 곡조와 우기환의 나지막한 음성이 사춘기의 감성과 양심을 사정없이 자극해 결국 우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엄마아…….”

탁거산 도인이랑 한 훈련과 3학년 0반 좀비의 습격이 힘들었던 탓일까, 아니면 평소에 엄마한테 잘못한 게 많았던 걸까.

우기환이 분위기를 조금 띄우기가 무섭게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방윤섭은 계속되는 감성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문새론이 기념 영상을 남길 계획이라며 여행 과정, 특히 단체 활동은 철저하게 촬영하겠다고 고지했다.

방윤섭이 펑펑 우는 광경이 생생하게 기록되는 중인데, 저놈이 그걸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마음이 찡하네요.”

“엄마 보고 싶다.”

“……흥.”

우리 반에서는 사월세음과 민그린, 송대석이 울먹거렸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역시 감성이 풍부한 것 같았다.

“우리가 여태껏 저지른 과오, 잘못은 이 촛불과 함께 남김없이 꺼뜨리고 새로운 내일을 열어 갑시다. 셋까지 센 후 촛불을 끄겠습니다. 셋, 둘, 하나……!”

촛불이 꺼지고 해금의 연주가 멈췄지만 이미 주변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우기환 일당이 연출한 감성극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짧고, 고등학교 시절은 더더욱 짧습니다. 친구, 선생님…… 이 소중한 인연을 짧은 학창 시절 동안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혼란한 틈을 타 우기환이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제자. 두 사이가 좀 더 돈독해지고 가까워지자는 의미에서 야자타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야, 임연화!”

우기환이 미쳤나 보다.

여태까지 밑밥을 깔았던 건 야자타임을 위해서였나 보다.

우기환이 잡은 마이크에서 쩌렁쩌렁한 막말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나랑 우리 반 애들한테 그럴 수가 있어, 임연화아악!”

임연화가 우기환에 응해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기환아. 뭔데?”

임연화의 얼굴엔 강자의 여유가 넘쳐 났다.

갑자기 반말을 들어 열 받는다기보다는 임연화 기준으로 귀여운 제자가 야자타임에서 뭔 말을 할지 궁금한 것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계 공략할 때 우리가 도움이 안 된다고 꺼지라고 할 수 있어!”

동결형 이계에서 임연화한테 꺼지라는 소리를 들은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 뒀나 보다.

임연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답했다.

“꺼지라고 한 적 없는데?”

“거치적거리니까 안 보이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라고 했잖아! 그게 꺼지라는 소리잖아아악!”

임연화는 울부짖는 우기환을 보며 자애롭게 답했다.

“거치적거렸던 건 사실이잖아, 기환아. 너희는 너무 약해. 아직 어려서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런가? 아, 그런데 너희들은 내가 사관학교 고등부 다니던 시절보다…… 아니, 중학생일 때보다 약한데.”

3학년 0반이 기획한 야자타임은 결국 임연화에게 아무 타격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임연화는 귀여운 제자들과 더 친해진 느낌이 든다며 기뻐했다.

임연화는 의욕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이 그렇게 약한 자신을 싫어할 줄은 몰랐어. 앞으로는 더 강하게 교육할게.”

임연화의 말에 원시인의 대장 우기환이 목 뒤를 잡고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0반 선배님들하고 임연화 선생님은 정말 사이가 좋네요. 저희도 3학년이 되면 함근형 선생님하고 저만큼 친해질 수 있을까요?”

“우리도 야자타임 해도 돼?”

“그, 근형아…… 아, 못 하겠어!”

그리고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은 아직 3학년 0반 놈들에게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우기환이 쓰러지자 1학년 학생들의 분위기도 정상으로 돌아와 평범하게 즐거운 캠프파이어를 즐겼다.

*    *    *

먼 옛날, 웅녀가 자신의 수식어로 ‘비탄’을 선택했을 때의 일이었다.

순백의 곰 가죽으로 눈을 가린 상위 존재가 그녀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제안했다.

—네 비극은 나의 권능으로도 막을 수 없고, 이를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도 네가 아끼는 붉은 범이 다칠 때마다 언제, 어디에서, 왜 다쳤는지 알려 주마.

—그러니 그만 슬퍼하고 일어나거라. 지금 여기에서 네가 무너지면, 흉계로부터 네 붉은 범을 어찌 지키겠느냐.

상위 존재의 호의를 받아들인 웅녀는 다시 일어섰다.

비탄의 이름을 짊어진 웅녀는 진웅팔선의 한 축으로서 웅족 내의 제 입지를 쌓아 올렸다.

호족의 영역에서 형틀에 묶인 적호가 형틀 외의 것으로 인해 몸이 상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계 충돌 이후 상황이 변했다.

형틀에서 벗어난 적호는 호족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호는 붉은 안개로 몸을 숨기고 보호하는 능력이 있기에 다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올해에만 벌써 두 번을 다쳤다.

한 번은 ‘그자’로부터 명령받아 돈족의 수장 저강렵에게.

한 번은 진웅팔선의 일각, 번민의 곰에게.

적호가 다칠 때마다 웅녀의 머릿속에 1월 1일 새벽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신화계…… 아니, 전설계로 격하된 전설계 호족의 적호(赤虎)는 1년 내로 죽습니다.

거짓된 모습으로 진짜 자신을 감추고 말한 누군가, 후일 ‘적벽괴도’라는 이름이 붙은 이가 그리 고했다.

세 눈을 가진 진실의 청려장(靑藜杖)을 제게 써 달라던 당돌한 적벽괴도는 진실만을 말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날 환몽경매를 부순 실력자, 적벽괴도의 말에 신빙성을 느낀 비탄의 웅녀는 적벽괴도에게 그녀가 제작한 ‘부와 생명의 무게’ 아이템을 넘겼다.

‘부와 생명의 무게 중 하나는 은광고 안에서 사용되었지. 적벽괴도는 은광고 안에 있어.’

적벽괴도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은광고는 호족의 신역이기에 웅녀가 쉬이 접근할 수 없었다.

그저 은광고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던 것에 그치던 웅녀가 움직인 건 적호가 상보심금파의 갈래에 꿰뚫린 이후였다.

‘그이가 호족이고, 적벽괴도의 활동 영역이 은광고라면 내가 앞에 나서서 돕는 건 불가능해.’

그렇게 판단한 웅녀는 은광고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제가 믿을 수 있고 적벽괴도에게 협력할 만한 진족과 접촉하기로 했다.

그게 용제건이었다.

웅녀는 염준열을 통해 용제건에게 ‘부재자의 기척’ 아이템을 넘겨 적벽괴도의 단서를 잡도록 유도했다.

기척 감지 능력이 우수한 용제건이 키모폴레이아 전역에 감각을 연결하는 아이템을 사용한다면, 타인의 모습을 빌리는 적벽괴도의 정체를 꿰뚫어 볼 것이다.

용제건은 자신의 아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 적호를 구하고자 하는 적벽괴도에게 협력할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날 신록이를 보호하다가 적호 씨가 좀 다쳤지. 그 일 때문에 불러낸 거야?”

용제건은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은광고의 청소년 수련회 당시 적호가 다쳤고, 이 여행은 청소년 수련회를 보충하기 위한 일종의 후속 조치다.

주오 아일랜드로의 여행에 1학년 0반이 참가한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또 용제건이 1학년 0반의 부담임 교사라는 건 은광고 홈페이지만 봐도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웅녀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용제건과 접선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것 같았다.

적호가 다쳤던 사실을 상기시키자 비탄의 웅녀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답변하지 않았다.

“……후후후, 글쎄.”

용제건은 추궁하지 않았지만 붉은 드레스의 옷자락을 보면서 일순 황홀한 얼굴을 했다.

“적호 씨랑 신록이랑 화해한 거 알아?”

화해라는 말에 비탄의 웅녀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비탄의 웅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접이식 실크 부채를 물 흐르듯이 펴 들어 얼굴을 부쳤다.

용제건의 짧은 이야기가 끝났을 땐, 비탄의 웅녀는 저도 모르게 부채 뒤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불러냈는데, 오히려 내 쪽이 좋은 이야기를 들었구나.”

“당신이 준 아이템이 그만큼 유용했으니까. 덕분에 좋은 연을 얻었거든.”

표정을 가다듬은 비탄의 웅녀는 부채를 접고 본론을 꺼냈다.

“한반도에서 태풍이 물러간 다음 날, 나와 연이 있는 마족(魔族)이 불평하더구나. 이 주변에 감추어 둔 무언가가 깨졌다고. 불평과 함께 말을 하나 흘렸지.”

“무슨 말인데?”

용제건이 흥미진진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용제건, 용궁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게 언제지?”

“황룡의 얼굴을 볼 겸, 용왕신님의 무녀 계승식 때 간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50년 전쯤인가?”

“용왕신의 무녀는 반백 년, 50년을 주기로 바뀌었던 것 같은데.”

“응. 내년에 무녀의 선발을 거쳐 계승식을 할 거야.”

용제건의 말에 비탄의 웅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바뀌기 전에 들러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슬슬 가 볼 때가 되긴 했는데. 그게 적호 씨와 관련이 있는 일이야?”

용제건의 말에 비탄의 웅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확신이 없어 보이는 몸짓이었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위험 요소는 지워 두고 싶어. 그를 크게 다치게 하도록 사주한 자가 관여한 듯하니까.”

적호를 크게 다치게 사주한 자가 용궁과 관련이 있다니.

용제건은 되묻고 싶었지만 비탄의 웅녀로부터 이 이상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해 입을 다물었다.

둘 중 다시 입을 연 건 비탄의 웅녀 쪽이었다.

“이대로 가면 그가 1년 내로 죽는다더구나.”

그렇게 말하는 비탄의 웅녀의 눈에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죽는다더구나.’라는 표현은 마치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듯한 말투였다.

용제건이 그 표현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누가 적호 씨가 죽는다고 했어?”

“……용들이 몹시 아끼는 후예의 모습을 한 아이가.”

용제건의 머릿속에 한 학생이 떠올랐다.

조의신.

적벽괴도라는 이름으로 염준열의 모습을 빌렸던 인물이었다.

‘1년 내로 적호가 죽는다고? ……수련회 사건을 가리키는 것도, 예전에 적호 씨가 중상을 입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비탄의 웅녀는 소곤거리듯이 용제건한테 말했다.

“그 아이한테 전하렴. 까마귀의 가면을 쓰고 있다면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고.”

용제건은 비탄의 웅녀가 작게 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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