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43화 (243/925)

45. 처서에 비가 오지 않으면 (5)

캠프파이어가 끝난 후.

3학년 0반을 제외한 각 반의 반장과 부반장이 모여서 내일 일정을 확인했다.

임연화에게 털리고 정신적으로 그로기 상태에 몰린 3학년 0반 놈들은 척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부르기 어려웠다.

각자 반으로 돌아가려 할 때, 문새론이 제안했다.

“얘들아, 우리 산책하다가 들어가자! 오늘은 날이 좋아서 절벽 쪽에서 별 보기 좋을 것 같아.”

그 흔들다리가 있는 절벽 말하는 건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제안이면 당연히 들어줄 생각이지만, 문새론은 산책을 하고 싶어서 저런 제안을 한 것 같지 않았다.

문새론은 주수혁과 안다인을 제외한 멤버들에게 윙크를 날리고 있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배려심이 깊구나!’

문새론은 여행지에 왔는데도 조금도 진전이 없는 은광고 공인 쌍방 짝사랑 커플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나 보다.

영민한 우리 반 반장 김유리는 바로 문새론의 의도를 알아채고 반응했다.

“그래! 2학기 때는 축제도 있으니까 학급 임원들끼리 친목을 다져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다인아, 갈 거지?”

유상훈은 시큰둥한 얼굴이었지만 군소리 없이 따라왔다.

정보통 문새론은 주오 아일랜드의 명소에도 통달했는지 안내한 장소는 낭만이 넘쳤다.

흔들다리 위로 달과 별이 보였고 풀벌레 우는 소리와 바닷바람이 상쾌했다.

“밤에 오니까 분위기가 다르네.”

주오 아일랜드에 자주 왔을 주수혁도 감탄할 정도였다.

흔들다리 위, 바람잡이로 온 우리는 끊임없이 화제를 제공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시켰다.

주오 아일랜드에서 인상 깊었던 프로그램과 시설, 앞으로 남은 여름방학 계획, 2학기에 수강할 선택 과목 등등.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적당한 핑계를 대며 자리를 비워 주수혁과 안다인, 둘만 남겼다.

“하하하! 은광고가 자랑하는 선남선녀에게 꽃길을 깔아 주니 기분이 좋네. 협력 고마워!”

문새론은 좋은 일을 했다며 뿌듯해했다.

나도 덩달아 뿌듯했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뜬 김유리가 ‘……다인이랑 수혁이가 책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했던 걸 추측해 보면 또 두 사람은 독서 토론회나 할 생각인 것 같지만.

‘그래도 게임 속 전개와 전혀 달라.’

게임 속의 여름방학은 최악이었다.

여름방학 초반에 터진 청소년 수련회 사건으로 학생과 교사진의 정신은 피폐해졌다.

방학이라고 하지만 죽은 학생과 교사진, 주민들의 넋을 기려야 했다.

또, 살아남았지만 방학이 끝난 후에도 이능독의 영향으로 재생 시술이 더디게 진행되어 퇴원하지 못한 학생도 있었다.

이렇게 아이들과 교사들이 모여 다 같이 노는 건 생각도 못 했고, 미리 짜 둔 일정 탓에 어쩔 수 없이 바캉스를 간 이들도 죄악감에 시달렸다.

‘그땐 방학 내내 비가 내렸던 것 같은데.’

처서 즈음에도 구름이 걷히지 않아 분위기는 우울하고, 비가 계속 내려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이곳의 기상 조건은 게임과 다른 걸까, 아니면 날씨와 연관된 상위 존재들이 변덕을 부린 것일까.

주오 아일랜드에서 머무는 내내 하늘은 쾌청했고 내일도 맑을 예정이다.

“어, 의신이랑 유리 왔다!”

“좀 늦었네. 고생 많았어.”

나랑 김유리가 0반 아이들이 묵는 중인 플로어로 돌아왔다.

여전히 용제건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함근형 선생님이 계셨다.

“다녀왔습니다! 얘들아, 뭐 하고 있었어?”

“아, 오늘 우기환 선배님이 제안했던 야자타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요. 마침 오늘은 함근형 선생님도 계시니까 연장자는 반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서요.”

그건 함근형 선생님이 아니라 5천 살 연상인 황지호한테 들으면 될 텐데.

저 망할 노친네는 염치도 없는지 실실거리면서 듣고 있기만 했다.

“상관없다. 0반 학생들과 몇 번 야자타임을 했다.”

“와, 함근형 선배님이랑 0반 선배님이요?”

“그래. 부임한 직후에는 좀 놀랐지만 이제 익숙해졌다. 너희들도 가끔 그러는 거라면 봐주마.”

함근형 선생님이 은광고에 부임한 건 15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함근형 선생님은 당시 학생회장 성국언이 이끄는 3학년 0반의 부담임을 맡았다.

‘……그때 야자타임을 당했다고?’

저 상황이면 야자타임을 건 0반 선배는 현재 2선 국회의원인 성국언일 텐데.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담이 셌다.

“야자타임이고 뭐고 우리 반엔 평소에도 존댓말을 쓰는 놈이 둘이나 있잖아.”

짱돌 맹효돈 선생께서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존댓말이라는 말에 시선이 사월세음과 목우람 쪽으로 쏠렸다.

‘게임 속 진행 상황을 고려하면 슬슬 사월세음도 반말을 쓸 때가 됐는데.’

주수혁이 3학년일 때 합류한 사월세음은 퇴장하기 며칠 전까지 존댓말을 사용했다.

어른들 틈에서 자라난 사월세음이 2년 정도를 노예처럼 지냈으니 반말에 익숙해질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게임 속에서 나비령의 가든에 진입하기 전에 말을 놓게 되니까 구출한 이후로 말을 놓을 때까지 반년 정도 걸린 셈이다.

‘이제 슬슬 말을 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지금 8월인데도 말을 놓을 기미가 없었다.

“계속 존댓말을 쓰면 안 될까요? 존댓말이 더 편하고, 저…… 그러니까…… 반에 존경하는 분도 있고…….”

사월세음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혹시 ‘그 단어’에 대한 존경심 운운할 생각은 아니겠지.

사월세음이 ‘그 단어’를 뱉는 실수를 하기 전에 말을 돌리기로 했다.

“편한 대로 해.”

“네! 감사합니다! 저…… 의신이의 말대로 편하게 할게요!”

사월세음은 존댓말을 계속 쓰기로 한 모양이다.

이번에 화살은 목우람 쪽으로 갔다.

“우람이는 해외 생활을 하다 왔다고 했지.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존댓말을 쓴다고 했나?”

“……한국어는 존댓말이 더 어렵지 않아?”

권레나와 한이가 의문을 표하자 한참 떨어져 앉은 목우람이 성실하게 답했다.

“한국어에 익숙해지더라도 존댓말을 쓸 겁니다. 제 영감의 원천과 함께하시는 여러분께 말을 놓는 우를 범할 수 없습니다.”

“쟤는 존댓말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네, 문제는 저에게 있습니다.”

송대석이 독기 빠진 목소리로 한마디 했지만 목우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정 가까이 되었을 때, 내일 일정도 있으니 그만 자라고 함근형 선생님이 권했다.

아쉬워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내일은 밤을 지새워 놀아도 좋다는 뉘앙스로 함근형 선생님이 말씀하시자 다들 얌전히 자러 갔다.

노는 데에도 체력이 많이 소모된 탓인지 배정받은 1인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곧바로 잠들었다.

*    *    *

새벽 2시.

권레나는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내일 잘 할 수 있을까…….’

권레나는 내일 주오 아일랜드에 방문하는 특별 게스트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았고, 기꺼이 이에 응했다.

그 제안을 받을 때는 그저 기쁘기만 했는데 코앞에 닥치고 나니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다.

‘주오 아일랜드의 시설은 24시간 개방한다고 했지.’

권레나는 방 밖으로 빠져나가 기념품 DIY 공방으로 갔다.

잠도 안 오고,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던 탓이었다.

‘바이올린 모양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현이랑 스크롤을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음표로 바꿨지.’

8분음표 모양으로 가공된 이계 광석도 귀엽긴 했지만, 바이올린 모양도 만들고 싶었다.

‘바이올린 모양으로 예쁘게 만들어지면 권제인 선배님께 선물해 드리고 싶어!’

별로 예쁘지 않아도, 가공하다 만 이계 광석 덩어리를 선물해 줘도 권제인은 기뻐하겠지만 권레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의욕에 찬 권레나가 이계 광석을 깎았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두 번 정도 가공에 실패했을 때였다.

쾅!

공방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목우람이었다.

목우람은 뛰어다니기라도 한 건지 땀투성이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우람아?”

“……나가는 기척이 있었는데, 1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목우람은 숨이 찬지 말을 딱딱 끊었다.

‘우람이도 안 자고 있었나 보구나. 혹시 우람이는 기척에 예민한 걸까?’

권레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반 아이 중 누군가가 한밤중에 사라져 1시간 넘게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도 걱정할 거다.

“걱정해서 찾아 준 거야? 고마워.”

“아닙니다. 노크를 하지 않는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여기는 공용 공간이잖아.”

목우람은 권레나와 한참 거리를 두고 물었다.

“무엇을 만들고 계십니까?”

“바이올린 모양으로 만들고 있었어. ……잘 안 되고 있지만.”

권레나는 멀리 있는 목우람도 보이게 다듬고 있던 이계 광석을 들어 보였다.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목우람의 제안에 권레나가 오늘 공방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목우람은 ‘이 광석으로는 제 영감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라는 의문의 발언을 한 후, 권레나를 따라 음표 모양의 광석을 하나 만든 게 끝이었다.

그래도 모처럼 반 친구가 한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목우람이 이계 금속으로 만든 조각도를 들어 광석 덩어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목우람의 정교한 손놀림을 보던 권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린이나 지호보다 솜씨가 좋은 것 같아……!’

순식간에 완성된 바이올린 미니어쳐를 본 권레나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이능파 조절을 잘 못해서 부술지도 모르는데…… 또 부탁해도 될까? 보답으로 나중에 나도 뭔가 만들어 줄게!”

권레나의 말에 목우람이 입을 떡 벌렸다.

권레나가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한 건지 했던 말을 되짚어 볼 때, 목우람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보답은 필요 없습니다. 바라신다면 얼마든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    *

다음 날, 우리는 게임 센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전신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로 점수를 내는 리듬 게임부터 단순한 형태의 인형 뽑기까지.

아이들은 제각각 취향에 맞는 게임을 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던 건 에어 하키였다.

플레이어의 힘과 이능파를 견딜 강도의 퍽과 초대형 게임기 덕에 다들 신나게 몸을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반 대항 에어 하키 태그전을 치르게 됐는데, 끝까지 살아남은 건 애들을 상대로 봐주지 않는 철없는 노친네 황지호와 어쩌다 보니 같은 팀이 된 나였다.

“하하하! 잘 놀았다! 다들 수고했다.”

“쟨 대체 뭐냐.”

결승전에서 만나서 우리한테 진 유상훈이 투덜거렸다.

유상훈은 게임을 잘하는 편이지만 신체적인 능력도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에어 하키에서 저 사기캐 노친네를 당할 수 없었다.

게임을 한 후에는 점심을 먹고 반 아이들과 주오 아일랜드 전체를 둘러봤다.

돌아다니다 보니 가동 중이지 않은 시설도 보였는데, 겨울에만 한정적으로 공개하는 곳도 있는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3학년 0반을 비롯한 전원이 공연 홀로 모였다.

“오늘 밤에는 특별 공연이 있다고 했죠?”

“보통 그런 공연은 캠프파이어랑 같이하거나 캠프파이어보다 먼저 하는 것 같은데.”

“아, 우리 반 자리는 저기다. 와, 선생님들이 앉은 자리만큼 좋은 좌석이야!”

좌석 지정은 특별 게스트가 부탁해 준 덕에 우리 반이 최고 등급의 좌석에 앉게 되었다.

인원수가 적은 덕에 반 아이들 사이에서 좌석 등급이 갈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어 우리 0반은 가장 좋은 자리에 배치되었다.

“……레나 님이 안 보입니다.”

한편, 목우람이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앉는 걸 망설였다.

나는 지금 권레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앉자. 걔는 곧 올 거야.”

내가 일단은 목우람을 중국에서 주워 온 입장이라서 그런지 목우람은 주저하다가 내 말을 따라 앉았다.

삐이—!

모두가 착석을 마쳤을 때, 개막 콜과 동시에 무대를 가리고 있던 푸른 벨벳 커튼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 뒤에서 나타난 건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이었다.

무대 위에 있는 건 권제인뿐만이 아니었다.

권제인의 맞은 편에는 백금색의 드레스를 입은 권레나가 바이올린을 들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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