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44화 (244/925)

45. 처서에 비가 오지 않으면 (6)

권제인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 그녀의 조카 권레나.

권제인과 피가 이어졌다는 점을 차치하고도 권레나는 착한 아이, 훌륭한 제자였다.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권레나가 만들어 오는 수제 음료를 두고 다투자 권레나는 팀원 전원 분의 음료를 만들었다.

또 침묵맹세의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 정기 건강 검진과 권제인 즉흥 연주회를 가장했을 때, 대사가 없어도 숨길 수 없었던 팀 닥터의 발연기를 보고도 의문을 품기보다는 걱정을 먼저 했다.

이 착한 아이가 자신의 실수와 부주의로 고초를 겪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권제인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 나갔다.

‘은광한빛보육원 이야기를 들었을 땐 많이 걱정했는데.’

얼마 전, 권레나가 갑자기 레슨 일정을 전부 취소했다.

조사한 결과, 권레나가 은광한빛보육원에 봉사 활동을 하러 갔다가 어느 용역 업체와 부딪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황상 권레나는 민그린을 두고 도망친다는 선택도 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친구를 위해 그 자리에 남고 친구를 붙잡다가 반성문까지 쓰게 되었다.

친구를 보호한 권레나가 자랑스러웠지만, 가족으로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재러드 리를 비롯한 과보호 성향이 있는 팀원들은 마침 잘 됐다며 ‘레나의 음악 유학 플랜’을 짤 정도였다.

권제인도 권레나와 함께 오붓하고 안전하게 해외 생활을 하는 상상을 했지만, 일단 그 생각은 접어 두기로 했다.

‘레나가 같은 반 아이들을 보고 있어.’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게 처음인 권레나는 심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 아이들을 보며 심호흡을 하자 점차 안정되었다.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은 권레나가 권제인 쪽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레나의 안전에 더 주의를 기울이자. 유학은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야지.’

이번에는 황명 그룹 쪽에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권제인은 몇 마디 거드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음에는 권레나를 괴롭히는 것을 더 빨리 알아내 처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권제인은 이능 활을 들어 올렸다.

*    *    *

권제인이 활을 들어 현 위를 긋자 홀의 공기가 바뀌었다.

사용자의 이능파에 공명해 그 울림이 달라진다는 이능 바이올린이 청명한 음색을 홀 안에 퍼뜨렸다.

권제인이 한 소절을 연주했을 때,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기색이 느껴졌다.

연주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선곡 탓에 놀란 이들도 많을 거다.

‘이 곡은 청소년 수련회 사건 때 해변에서 권제인이 광림을 발동하면서 연주한 즉흥곡이잖아!’

문새론이 올린 영상의 조회수가 스트리밍 사이트의 역대 누적 조회수 순위 최상위권에 들어가도 음원이 풀리지 않아 원성이 잦은 그 전설의 곡이었다.

권제인의 팬이기도 한 음악가들이 수많은 커버 버전을 공개했지만, 원곡의 느낌을 살릴 수 없어 팬들의 아쉬움이 컸다.

거대한 파도 앞에 맞선 권제인의 감상은 권제인 본인도 재현할 수 없으니 스튜디오 녹음을 통해 음원을 내는 게 불가능할 것이라는 그럴싸하고도 신랄한 억측도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권제인의 연주는 그녀가 그날 느낀 것들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그날 권제인은 이렇게 느꼈구나.’

바다의 벽을 마주하고도 꺾이지 않은 굳건한 의지, 광기 어린 파도를 보고 느낀 희미한 두려움, 갑작스럽게 느껴진 의심과 혼란에 서리가 서린 듯한 마음.

권제인의 심경에 따라 연주는 점점 불안하게 변했다.

그 불안한 연주 위에 조심스럽게 화음이 얹어졌다.

권레나의 연주도 시작된 것이다.

‘마치 바이올린으로 말을 거는 것 같아.’

권레나는 신뢰, 존경, 응원의 메시지를 담아 최선을 다해 연주했다.

기교적인 면에서는 권제인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권레나의 연주가 거슬린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권레나의 미숙하고도 다정한 음색이 이어질수록 권제인의 연주가 안정되고 깊이를 더해 갔다.

바다의 벽과 두 사람의 합주가 팽팽하게 맞서는 듯한 곡조가 흐르고 있을 때.

‘어?’

무대 뒤로 워터 스크린이 등장했다.

물로 만든 영사막에 그날 문새론이 찍은 영상이 선명하게 투사되었다.

그때.

파아아……!

권제인의 광림, ‘수면의 요영(謠詠)’이 발동해 수면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워터 스크린에서 춤을 추듯 빠져나온 물방울이 빛을 반사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관객들이 탄성을 삼키며 연주와 물방울의 춤에 감탄하는 사이, 연주는 어느덧 절정을 향했다.

권제인의 이능파에 다른 이능파가 섞였다.

‘……이건!’

눈앞의 풍경이 일순 바뀌었다.

홀에 앉아 있던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석모도에 있었다.

우리는 그 거대한 바다의 벽과 그 사이로 밀려드는 에너미를 마주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고 난 후.

일순 관객을 사로잡았던 이능파가 자아낸 환상도, 두 사람의 연주도 끝났다.

‘방금 느껴진 이능파, 그 이능파의 주인이 가진 광림을 고려하면 누군지는 명확하긴 한데…….’

푸른 드레스에 백금 헤어 커프스를 착용한 권제인.

그와 대조적으로 백금 드레스에 로얄 블루 사파이어가 장식된 리본으로 머리를 고정한 권레나.

두 사람도 이 환상은 예상하지 못한 듯 연주를 마치고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발동한 환상은 권레나의 광림, ‘허상 연회’였던 탓이다.

이 현상의 원인이 권레나의 광림 탓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권레나의 광림은 이 정도로 강하진 않았어!’

플마고는 망겜답게 캐릭터 간의 능력치 밸런스가 엉망이었다.

그리고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던 ‘이레나’는 상당히 약한 축에 속했다.

기본 능력치도 낮았고 스킬은 미묘했고 광림은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광림, ‘허상 연회’는 지정한 대상을 극히 짧은 시간 동안 환상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지만, 써먹을 구석이 거의 없었다.

지속 시간이 짧은 것도 문제지만 환상의 구현력이 약해 적은 금방 환상임을 눈치채는 데다 상대가 이능파를 방출하면 환상은 금방 깨졌다.

그러니 기껏해야 낮은 희귀도의 에너미를 혼란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설마…… 권레나의 광림도 권제인의 광림 같은 타입인 건가?’

권제인의 광림은 연주가 없으면 의미가 거의 없다.

연주를 하지 않으면 이능파에 반응해 수면에 잔물결이 고작 일다가 마는 수준이라 공격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게임 속의 ‘이레나’는 바이올린을 배우지 못했으니까 제 능력을 다 살리지 못한 거구나.’

연주도 환상도 끝나 홀 안은 조용했다.

관객들은 아직도 그 연주와 환상에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당황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위해서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짝짝짝!

정적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그 박수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곧 우리 반 아이들을 시작으로 산발적으로 기립 박수가 이어졌다.

“놀랍군. 나도, 용제건도 아주 잠깐이지만 저 아이가 자아낸 환상에 사로잡혔다.”

황지호가 눈을 반짝거리며 저렇게 말할 정도라니!

숨은 재능을 개화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역시 굉장했다.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 우리는 다음 연주를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 이후로는 권제인의 독주가 메인으로 이어졌고, 앙코르 곡으로는 ‘for LENA’를 두 사람이 연주했다.

다시 권레나의 ‘허상 연회’가 발동하는 일은 없었지만, 두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에 모두가 환상을 보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

*    *    *

밤을 지새워 놀며 주오 아일랜드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돌아가는 길.

노느라 쌓인 피로 탓에 얼른 기숙사로 돌아가서 쉬고 싶다는 마음과 어딘가 아쉬운 마음이 상충했다.

다른 아이들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지 천자(天子)의 갑판 위의 선베드에 누워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다닐 기력은 없지만, 아쉬운 마음에 계속 잡담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참고로 우리 반의 화제의 중심에는 권레나가 있었다.

“어제 레나 연주 굉장했지…….”

“선배님이 음원으로 나오면 사인 CD 준다고 했어!”

“레나 사인도 들어가면 좋겠다.”

한편, 권레나는 어제 권레나 다음으로 주목받은 우리 반 학생을 언급했다.

“……우람이는 아직도 기절해 있어?”

“응…… 선 채로 기절한 이후로 한 번도 안 일어났어.”

목우람은 첫 연주가 끝난 직후에 감격으로 벅차 이미 라이프 포인트가 0이 된 듯했다.

그러나 목우람은 버텼다.

권레나가 다시 연주를 하러 무대 위에 서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앙코르 곡으로 ‘for LENA’의 듀오 연주가 있었고 그 곡이 끝나자 목우람은 기립 박수를 보내다 기절했다.

차오르는 영감의 격류에 질식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레나가 보여 준 환상은 기절할 만큼 멋졌어. 이해해.”

한이는 목우람의 기절을 그렇게 평했다.

청각으로 연주회를 즐길 수 없는 한이는 권제인이 워터 스크린으로 연출한 무대와 권레나가 보여 준 환상에 크게 감격했다.

한이는 두 사람의 연주가 어땠는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감상을 물어 우리를 통해 연주회를 즐겼다.

한이는 무려 황지호에게도 감상을 물었는데, 황지호 답하길.

―오랜 친우와 듣고 싶을 정도로 멋진 연주였다.

오만하고 취향은 까다롭고, 친우를 아끼는 황지호에게 있어선 최상급의 찬사였지만, 상대에게 전해지지는 않았다.

애늙은이 같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감상에 한이는 황지호에게 질문한 걸 조금 후회하는 것 같았다.

한이의 그런 속을 훤히 읽은 듯한 황지호는 그저 처웃었다.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 황지호는 돌아가는 길에도 실없이 굴었다.

“이 배에 천자(天子)가 없는 게 아쉽군.”

“네? 이 크루즈의 정식 명칭이 천자(天子) 아닌가요?”

“하하하하!”

저 늙은이가 왜 저럴까.

천자(天子)란 천신의 아들, 신인 공청훤을 칭한다.

공청훤이 이 배에 없으니 맞는 표현이긴 하지만 저걸 반 아이들 앞에서 말해야 하나?

한이도 ‘왜 저래?’라는 심정이 절절하게 담긴 표정으로 황지호를 보고 있었다.

나중에 한이가 청호로 돌아오면 태호권으로 처맞을 소리를 하고도 황지호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    *    *

집에 가까워질수록 김유리의 기분은 조금씩 우울해졌다.

퇴원 직후, 반 아이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느라 집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김유리가 집에 돌아가면 혼자다.

‘엄마…… 아빠…….’

입원해 계신 아버지와 간병 중인 어머니.

가뜩이나 자신의 광림 건으로 마음이 상한 두 분께 돌아와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었다.

지친 반 아이들을 부르기도 미안했다.

‘카페라도 갈까? 아니면 선생님을 뵈러 갈까? 그것도 아니면 지호가 감시로 붙여 줬다는 분들을 집으로 초대할까?’

김유리의 고민이 깊어졌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거실에 조명이 켜져 있어?’

조명이 켜져 있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부엌 쪽에서는 그녀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캐모마일차 향기가 났다.

“엄마! 아빠!”

김유리는 급하게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가방을 던지고 거실로 뛰어갔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 광경을 보면 잔소리를 할 모습이었지만, 김유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그리운 잔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리 왔니?”

거실 소파에는 많이 수척해졌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김유리의 아버지가 있었다.

김유리도 마주 웃으며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갔다.

*    *    *

인천항에 도착한 후, 기숙사생은 항구에 대기 중이던 황명 재단의 에어 셔틀을 타고 돌아가게 되었다.

기숙사로 향하는 1학년 0반 학생은 적었다.

목우람은 양호실로 실려 가고, 사월세음은 본가로 가고, 맹효돈은 마중 나온 탁거산 도인과 수련하러 간 탓에 남은 건 나와 한이, 권레나뿐이었다.

“그럼 다음에 봐!”

“먼저 들어갈게.”

1학년 기숙사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린 한이와 권레나와 인사했다.

1반, 2반 학생들은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는 바람에 두 사람이 내리고 나니 엘리베이터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니 잡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고를 전환할 겸, 방금 관찰한 것 중 마음에 걸리던 것에 대해 사고했다.

‘권레나는 이제 이능 바이올린만 쓰는 것 같은데 왜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니지?’

이능 바이올린과 이능 활은 카드화가 되니까 바이올린 케이스가 필요 없을 텐데.

땡.

짧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내가 내릴 층수에 도착했다.

“의신아, 안녕.”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나를 기다린듯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얘기 좀 할까?”

상대는 유희계 용족, 용제건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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