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45화 (245/925)

45. 처서에 비가 오지 않으면 (7)

우기환 일당이 캠프파이어를 틈타 야자타임을 시전한 둘째 날, 해가 진 이후로 용제건을 본 이가 없었다.

여행 기간 용제건은 보통 1학년 0반이나 김신록 주변에서 얼쩡거렸는데, 내내 보이지 않았다.

용제건이 평범한 교사라면 걱정했겠지만, 저 유희계 용족이 변덕을 부리는 건 흔히 있는 일이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용제건이 하는 소리를 들으니 그날 그 시간에 생각도 못 한 존재를 만나고 온 것 같다.

“의신아, 비탄의 웅녀 씨가 안부 전해 달래.”

은광고 안에서 황지호가 간섭하지 못한다는 몇 안 되는 공간, 스테일메이트의 부실.

용제건의 긴 머리카락은 공간술로 결계를 치기 위해 힘을 개방하느라 시안색으로 변해 있었다.

‘용제건이 학교에서 이 정도로 힘을 개방하는 경우는 거의 못 봤는데.’

호족의 신역에서 비탄의 웅녀 이야기를 꺼내려면 철저하게 방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호나 백호군은 어떨지 몰라도 황지호한테 걸리면 죽이지는 않더라도 재생 시술이 필요할 만큼 신체 일부가 없어지고 말 거다.

“캠프파이어 하던 날에 비탄의 웅녀와 만나고 오셨나 봐요.”

“응. 바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신록이랑 학생 모습을 한 황호 씨가 계속 주변에 있었잖아? 갑자기 너를 불러내면 이상하게 여길 거고.”

용제건의 가늘게 휘어진 눈 사이로 옥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과거에 비탄의 웅녀와 어떤 거래를 하셨다고 했죠. 그 거래와 관계가 있는 건가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용제건은 예전에 나를 ‘그 단어’와 연관 짓는 추리를 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마지막으로 단서가 된 건 이거야. 예전에 거래했던 진족이 대가로 준 거지. 선상 파티 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테니 이걸 이용해 갑판을 지켜보라고 했어. 이건 쓰고 남은 카드고.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적호를 걱정하는 그 진족이야.

그때 한 말과 지금 상황을 종합해 보면 용제건과 비탄의 웅녀는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

용제건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리고 천방지축이던 신록이를 꾀어낸 진족이 하나 있었어.”

“김신록 선생님을요?”

김신록은 대체 젊었을 때 어떻게 살았던 걸까.

김신록의 어린 시절을 아는 이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김신록을 사고뭉치 취급했다.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는 조금 무거웠다.

“그 진족은 시간을 오래 들여 신록이의 신뢰를 얻어 호족의 신역 밖으로 신록이를 빼냈지. 비탄의 웅녀 씨를 만나게 해 준다면서.”

공들여서 김신록을 회유한 건가.

용제건이 저리 표현한 걸 보니 좋은 일로 김신록을 신역 밖으로 유도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만나게 해 주긴 했지만, 비탄의 웅녀 씨는 신록이를 비호할 수 없는 입장이었어. 그때 신록이가 웅족에게 붙잡혀서 험한 짓을 당할 뻔한 걸 내가 구했지.”

그런 비화가 있었나.

플마고는 망겜답게 튜토리얼에서 김신록을 죽여 버리고 이름 한번 꺼내지 않았다.

거기에 나름 주요 인물이었던 용제건과 비탄의 웅녀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호의를 베푼 걸 계기로 신록이랑 친해졌더니 비탄의 웅녀 씨가 날 찾아왔어. 아들이 나쁜 친구와 어울리지 않나 걱정됐나 봐.”

용제건은 자기가 나쁜 친구 취급받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용제건은 선량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였지만, 아들의 친구가 용제건이라면 조금 고민이 될 법했다.

용제건을 선과 악, 두 축으로 구분하면 선 쪽으로 기울겠지만 ‘유희계’의 용족과 친해지면 위험한 장난질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

“김신록 선생님과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건 비탄의 웅녀와의 거래 때문인가요?”

“아무리 거래라고 해도 마음에 안 들면 친구로 지낼 리가. 웅녀 씨는 웅족이 자랑하는 기재(奇才)잖아. 거래라는 명목으로 선을 대 둔 거야.”

용제건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렇긴 했다.

그래도 김신록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뒤에서 용제건과 비탄의 웅녀가 자신과 관련해 연이 닿은 걸 알게 되면 배신감을 느끼고 우정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을까?

“적호 씨가 1년 내로 죽는다면서? 죽는 건 적호 씨 혼자야?”

용제건이 들려준 비화를 머릿속에 새기고 있을 때, 갑자기 방금 것보다 더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비탄의 웅녀는 그런 이야기까지 했나?’

당황한 탓에 표정이 무너진 모양이다.

용제건이 황홀해하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더 있나 보네. 그것도 너랑 아주 가까운 자가 죽나 봐.”

저기까지 추측할 만큼 이상한 얼굴을 했던 걸까.

용제건은 내 손 쪽을 보고 있었다.

체스를 둘 때처럼 손이 식고 있었는데, 용제건이 내 체온의 변화를 눈치챈 것 같았다.

일단 상식적으로 변명하기로 했다.

“저한테는 예지 스킬이 없어요.”

“예지 스킬과 별개로 너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 네 광림은 상당히 특별하잖아? 거기에…… 네 적벽괴도로서의 행보를 고려하면 말이지. 평범한 고등학생이 알 리가 없는 정보를 잡고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왜 이 중요한 장면에서 ‘그 단어’가 나오는 것인가!

차갑게 식은 손이 오그라들어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죽어?”

용제건은 죽는다.

1학년 말, 봉쇄된 은광고에서 홀로 탈출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을 지키기 위해 남는다.

그러나 은광고에서 교사로 일하기 위해 맺은 ‘교원 계약’ 때문에 제약이 걸린 몸으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죽고 만다.

용제건의 팬과 나를 비롯한 고인물들은 용제건을 살려 보겠다고 은광고 전체 맵을 털어 탈출로를 확보하고 비행 스킬과 공간술로 용제건 구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용제건은 시야에 학생이 보이지 않게 되면 멋대로 스타트 지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스타트 지점으로 돌아가는 용제건은 비행 스킬을 사용하는데, 그사이에 공격당해 죽기도 하고 무사히 도착해도 스킬을 사용한 탓에 기력이 상당히 깎여 버려 생존 가능성이 크게 떨어졌다.

그 바람에 대부분의 유저들은 ‘미친 망겜,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AI를 이따위로 짜!’라고 외치며 용제건 구출을 포기했다.

나는 수십 번의 리트라이 끝에 흩어진 학생들을 찾아가며 은광고 외곽까지 용제건을 유도하는 데에 성공했었다.

그러나 은광고 외곽에 도착해 비행 스킬로 탈출을 시도하면 용제건은 혼잣말을 한다.

[지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데.]

용제건은 체력이나 기력이 바닥을 기어도 저렇게 고집을 피우며 은광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12지의 배신자가 흐트러뜨린 결계 탓에 한 번 은광고 밖으로 나가면 들어오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용제건은 제자들 앞에서 힘이 다해 최후를 맞이했다.

‘교원 계약이 없었으면 용제건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교원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건 이사장 황명호, 즉, 황지호뿐이었다.

황지호는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플마고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 내내 나오질 않았다.

모든 게 끝나고 주수혁과 합류하는 게 플마고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 이후의 첫 등장이었다.

“그렇구나.”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용제건은 혼자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제건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묻고 싶어서 부르신 건가요?”

내 말에 용제건이 고개를 돌렸다.

형형히 빛나던 옥빛 눈동자가 실눈 사이로 감춰져 있었다.

“그것도 있고. 웅녀 씨가 까마귀의 가면에 대해서 전해 달라고 한 게 있어.”

비탄의 웅녀가 까마귀 마왕, 시델렌티움과 연이 닿은 건 알고 있었다.

최고의 아이템 제작자인 그녀가 마왕이 사용했다는 ‘침묵 맹세의 순은 동전’의 복제판을 제작했으니까.

그 동전의 앞면에는 까마귀 마왕, 방관과 침묵의 마왕 시델렌티움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걸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

웅녀는 내가 까마귀 가면을 쓰고 움직이는 걸 알았나 보다.

그래도 언제부터인지 짐작이 안 갔다.

최편득의 퇴폐 건물 붕괴 사건부터? 아니면 개입한 게 확실한 선상 파티부터?

용제건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닐 거면 까마귀 마왕과 그가 아끼는 인간의 기호품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기호품이요?”

“그래. 단순히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그의 호의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어.”

까마귀 마왕의 기호품.

게임 속 정보로는 명확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빛나는 것’,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것’이라는 추상적인 묘사가 존재하긴 했는데.

“내가 알려 줄 수도 있어. 그 마왕 씨가 아끼는 인간이 마침 은광구에 있기도 하고.”

“괜찮아요.”

용제건은 까마귀 마왕에 대해 아는 게 있는 듯했지만 일단 거절하기로 했다.

용제건은 용족 건으로 바쁠 텐데 까마귀 마왕 건까지 엮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용제건은 몇 번 더 돌려서 자신이 까마귀 마왕과 다리를 놔 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그러나 마지막 제안은 거절할 수 없었다.

“의신아, 언제 같이 용궁 갈래?”

호족의 힘을 빌려도 갈 수 없는 용궁.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의 주 무대가 되는 장소였다.

*    *    *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 용족이 직접 코디한 화려한 색의 여름 정장을 당연하게 소화해 낸 염준열.

평소라면 그가 사람이 있는 장소를 걸으면 누구나 주목하고 한마디씩 말을 거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현재 염준열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방송국 복도를 바삐 걷는 사람들은 염준열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투명인간 취급받는 염준열은 조금 들떠 있었다.

염준열의 매니저 겸 경호원 역할을 한 용족을 처음으로 따돌렸고, 지금도 기척을 죽여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덕이다.

‘스승님이 내 준 ‘기척 죽이기’ 과제를 처음으로 성공했어!’

오랜만에 스승님께 날씨 예보가 아닌 다른 주제로 말을 꺼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염준열은 기쁜 얼굴을 했다.

아직 방송이 시작되지 않은 탓에 찍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스포일러를 할 수도 없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과제 이야기는 더더욱 할 수 없었다.

내일은 다를 것이다.

“……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러나 염준열의 기쁜 마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분홍 머리카락의 오디션 ‘플레이리스트’의 본선 진출자이자 학교 후배인 독고미로가 염준열을 바로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독고미로는 은광고 후배답게 날카로운 감각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조금 늦게 봐서 선배님께 바로 인사드리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싹싹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독고미로를 보며 염준열은 복잡한 얼굴을 했다.

독고미로에게 악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염준열과 독고미로는 서로 안부를 물으며 학교, 연예계 선후배가 나눌 법한 대화를 나눴다.

“곧 은광고에서 같이 촬영하겠네. 준비는 잘 되어가?”

독고미로의 학교생활 촬영에는 염준열이 단독으로 진행을 맡게 되었다.

은광고 출입 허가 문제도 있었지만, 독고미로를 촬영할 겸 염준열의 교복 차림도 촬영하겠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엿보이는 기획이었다.

“그게요, 오랜만에 학교로 가는 거라서요. 학교 갈 시간도 줄여서 연습실만 오가서요.”

독고미로가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며 곤란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0반 학생들은 대부분 등교를 안 하고 있었고, 독고미로도 등교 거부자 중 하나일 테니 갑자기 학교생활을 찍으면 난처할 거다.

고작 연습생인 독고미로가 제작진이 내놓은 계획에 딴지를 걸기도 어려웠을 거다.

‘MC 입장에서 특정 출연자를 편애하면 안 되는데…….’

염준열은 고민 끝에 아주 작은 호의를 베풀기로 했다.

“0반에 아는 후배가 있는데. 촬영 전에 이야기해 볼래?”

염준열은 사월세음과 조의신,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며 말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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