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46화 (246/925)

45. 처서에 비가 오지 않으면 (8)

은광고는 학생들의 교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플레이어 특목고답게 방학이 길었다.

빠르면 8월 초, 늦어도 8월 중순에 2학기가 시작되는 일반 고등학교와 달리 은광고는 아직 방학 중이었다.

오늘은 8월 말, 더위가 기세를 멈췄지만 아직 곳곳에 열기가 남은 처서(處暑).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건 창밖을 보는 일이었다.

기숙사 창문 밖, 쾌청한 하늘 아래로 천익산이 보였다.

‘날이 맑아. 비가 오지 않았어.’

그리고 게임과 달리 처서에 비가 오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이 살아남은 덕에 날씨로 속풀이를 하는 상위 존재가 적었던 탓일까.

최근 날이 좋아 볕을 잘 받은 덕에 풍년이 예상된다는 기상 캐스터의 발언이 떠올랐다.

딩동.

날씨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날씨를 알려 주며 안부를 묻는 착한 내 제자가 보낸 메시지였다.

[염준열] 스승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처서예요. 하루 내내 구름 한 점 없이 날이 맑을 예정이에요. 폭염이 끝나긴 했지만, 일교차가 커지는 시기기도 해요.

[염준열] 홍룡의 컨디션은 최상이에요! 스승님만 괜찮으시면 뵙고 수업을 하고 싶어요.

얼마 전에 염준열이 처음으로 ‘기척 죽이기’에 성공했다.

내 향상심 깊은 제자는 성장했다는 사실이 기쁜지 메시지상에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기척을 감추는 게 완벽하지 않은 데다 용족이 집요하게 염준열을 찾아 대니 성공률은 그리 높은 것 같지 않지만.

‘플레이리스트’ 촬영 준비와 방학 숙제로 바쁠 염준열을 배려해 수업에 관해서는 얼버무리자, 불꽃 수염이 축 처진 모양새를 한 홍룡 스탬프가 날아왔다.

대신 개학 후의 수업은 알차게 준비하기로 다짐하며 다음 메시지를 읽었다.

‘다음 메시지도 염준열이네.’

이번 메시지는 착한 제자 염준열이 아닌 홍룡 염준열 선배님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염준열] 의신아, 안녕. 방학 잘 보내고 있어?

[염준열] 0반 학생에 관해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답변 가능할 때 연락 줘.

그렇게 자주 쓰던 홍룡 스탬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학교 선배로서의 면모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제자로서도, 선배로서도 완벽했다.

‘0반에 관해서라면 혹시 독고미로 때문에 그런가?’

독고미로는 플레이리스트 본선 진출에 성공해, 학교생활을 촬영하게 되었다.

황지호가 광일파출소를 박살 내고 초등학교 동창으로 한이와도 연이 있는 독고미로에게 큰 관심을 보여 은광고 촬영을 흔쾌히 수락했다.

‘독고미로는 그날 나타나서 우리 반 아이들을 구해 줬지.’

‘이 구역의 미친년’, ‘패왕’이라는 칭호가 조금 걸리지만 뭐 어떤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신세를 졌고, 내 제자가 부탁하는데 당연히 들어줘야 했다.

나는 염준열에게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염준열] 그래, 고마워. 언제 볼 수 있을까?

[염준열] 2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서로 인사하면 좋을 것 같은데.

염준열은 제 일처럼 고마워하고 계획을 세웠다.

중간에 용족이 난입해서 또 귀찮게 구는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게 느려져서 염준열이 사과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독고미로와 만나게 되었다.

‘……이런 놈들하고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를 해결해야 하는데, 괜찮을까.’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에 어떻게 개입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그건 용제건의 제안으로 해결되었다.

주오 아일랜드에서 기숙사로 돌아온 날, 용제건은 나를 용궁으로 초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의신아, 언제 같이 용궁 갈래?

용제건은 말은 쉽게 했지만, 용궁은 그리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용궁에 들어갈 수 있는 건 기본적으로 용족, 용족의 후예, 용족의 권속, 용왕신의 무녀뿐이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상당히 까다로웠어. 주수혁과 안다인도 용궁에 가기 위해서 엄청나게 고생했는데.’

단, 예외적으로 두 경우만 외부자의 출입이 허락되었다.

예외 그 첫 번째, 청룡과 황룡의 용새(龍璽)로 허락을 받는 것이다.

용족의 수장인 청룡.

용궁과 무녀를 지키는 황룡.

두 용이 제 뼈로 직접 만든 용새(龍璽)를 양 손바닥에 받은 자는 용궁의 출입이 허가된다는 말이 있었다.

‘게임 속 황룡은 용제건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어. 그러다가 주수혁, 안다인과 인연을 맺었는데…….’

용궁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황룡에게 용궁 출입 허가를 받는 건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

용제건도 황룡의 허락을 받으러 가는 건 번거롭고 어렵다고 여겼는지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할 생각인 듯했다.

―다음에 용왕신님이 계시를 내릴 때 네 얘기를 꺼낼 거야.

―초대하고 싶은 인간이 하나 있으니까 데려가고 싶다고.

다른 예외는 ‘용왕신의 허락을 받는 것’이었다.

용왕신의 무녀 후보생들은 엄밀히 말하면 후보생이기에 용궁 출입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용왕신이 계시를 내려 용궁 출입 허가를 내리면 후보생들도 용궁을 오갈 수 있었다.

‘무녀 후보생이나 받는 용왕신의 허락을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용제건은 상당히 낙천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냥 해 줄 것 같은데.

―내가 재미있어하는 건 보통 용왕신도 재미있어하니까.

그 ‘재미있어하는’ 거가 나인 모양이다.

과연 용왕신이 내가 용궁을 출입하도록 허락을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건은 용제건에게 맡기기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기숙사 문을 여니 마침 밖으로 나가는 중인 듯한 목우람이 인사를 하며 먼저 엘리베이터로 뛰어 들어갔다.

최근 목우람은 황명 재단 측에서 내준 공방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능 바이올린 장인이 남긴 유일한 제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호구였던 탓에 가난했고 가진 게 없었다.

‘목우람이 토벌한 에너미 포상금도 결국 돌려받지 못했지…….’

돌려받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회수에 성공한 금액은 10%도 되지 않았다.

또 호구 목우람은 수상한 외국 통판 사이트에서 기자재를 구입하다가 그 돈을 날려 먹었다.

입금을 하자마자 폐쇄된 통판 사이트를 며칠 동안 바라보며 목우람이 지은 순수한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17층 중앙 휴게실, 홀로그램을 보여 주며 목우람이 밝게 말했다.

―은광고의 통신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주문 이후에 3일째 화면에 아무것도 뜨지 않습니다.

이렇게 목우람은 완벽한 빈털터리가 되었다.

기껏 권레나에게 영감을 받아도 이능 바이올린을 만들 재료나 도구 같은 건 없었다.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받아들인 목우람은 천익산을 돌며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줍고 지익회 비품인 커터 칼로 목공질을 했는데 그 꼴은 지나치게 궁상맞았다.

‘이놈이 좋은 바이올린을 만들게 되면 권레나를 비롯한 전 세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기뻐할 거야.’

황지호에게 그런 요지의 말을 전하니 두말없이 공방을 하나 내줬다.

공방에는 가문비나무, 단풍나무부터 이계 금속으로 도금된 크롬강과 철선까지 각종 바이올린 소재가 구비되어 있었다.

내가 말하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호족 중에 소리에 환장한 것들이 많다, 이 정도의 투자는 할 생각이었다.

노친네의 돈지랄은 바람직했다.

주오 아일랜드 여행 이후, 황지호가 보인 행보 중에는 그 외에도 바람직한 게 많았다.

새로 발표된 음원이 듀오 연주인 게 밝혀지자 권제인에게 제자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황지호가 황명 그룹의 힘을 동원해 이를 억눌렀다.

‘아직 권레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어.’

공개된 음원은 권레나가 연주하는 파트도 권제인이 연주하긴 했지만, 은광고에 다니는 제자가 있다는 설은 어느 사이엔가 공공연해졌다.

권제인에게는 악성 광팬이 많았기에 권레나가 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벌써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권레나를 향한 악의 어린 악플이 드문드문 보였다.

권제인의 음악성은 혼자일 때야말로 오롯이 발현된다는 게 악성 광팬들의 주장이었다.

‘권레나에게 별일 없도록 주의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방학이 되기 전, 나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    *    *

은광고 정문 앞의 사설 스터디 카페.

예전에 한 번 방문했던 곳이라 헤매지 않고 예약한 스터디 룸을 찾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천동하는 나보다 먼저 와서 저번에 뒀던 대국을 복기하고 있었다.

천동하가 애용하는 듯한 나무 체스판 위로 지난 대국이 재현되어 있었고, 저번처럼 캡슐 커피 대신 믹스 커피를 마신 건지 포장지 몇 개와 텅 빈 종이컵이 보였다.

“바쁘실 텐데 불러내서 죄송해요.”

“아니야. 매일 일만 할 수는 없잖아. 체스도 두고 싶었어.”

“방학 동안에도 일하시나요?”

“응. 연구소 일.”

천동하는 종이로 된 명함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천동하는 황명 그룹 로고가 찍힌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이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은광고가 자랑하는 천재 천동하다운 스펙이었다.

‘연구원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황명 연구소 소속인 줄은 몰랐네.’

게임에서도 그 연구 내용에 대해선 언급이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천동하는 입이 상당히 무거운 편이라 주변의 신뢰가 두터웠지만, 그만큼 알려진 바가 없었다.

“대국 신청이 많았을 텐데, 날 지정한 이유가 있어?”

이유는 단순하다.

이 세계에서 체스로 나한테 이긴 건 백호군, 천동하 둘 뿐이었으니까.

백호군한테 압도적으로 밀린 대국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했다.

백호군에게 대항할 만한 실력을 키우기 위해선 그만한 파트너가 필요했다.

“선배님의 대국에서 배우고 싶은 게 많아서요.”

상당히 순화해서 표현했는데, 천동하는 그 속내를 금방 읽어 냈다.

“나 아니면 상대가 되는 사람이 없나 보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천동하는 딱히 더 추궁하지 않았다.

치열하게 각각 2승씩을 가져갔을 때였다.

마지막 한 판으로 결판을 지으려 할 때였다.

“그만하자.”

악수를 나눈 천동하의 시선이 내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이 식은 게 들킨 모양이다.

이능파 컨트롤에 상당히 신경 쓴 덕인지 네 번째 대국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아직 완벽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내 동생이 네 팬이라고 했잖아. 네 몸 상태를 알고도 대국을 더 하려 했다는 걸 들키면 화낼 거야.”

천동하의 동생이 또 언급되었다.

내가 입학 초반에 큰 사건에 휘말렸던 탓인지 가끔 기사에 오르내리는 플레이어긴 하지만 팬이 있다니.

속이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동생은 몇 살인가요?”

“너보다 한 살 어려.”

이 세계의 나보다 한 살 어리면 중학교 3학년인가.

“그러면 내년에 고등학생이 되겠네요. 플레이어인가요?”

“응.”

“은광고에 오면 좋겠네요.”

“……응, 입학시험을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천동하는 말꼬리를 흐렸다.

혹시 천동하와 달리 동생이 공부를 못해서 은광고에 입학할 성적이 안 되는 걸까.

말실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습하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점심 먹을까요?”

“그러자.”

그렇게 말하며 천동하는 손을 놓고 스터디 카페에서 제공하는 메뉴판을 홀로그램으로 불러냈다.

천동하는 스터디 룸 이용료를 계산한 것에 이어 밥까지 샀다.

점심을 먹고 천동하와 헤어져 은광고로 향했을 때.

정문 앞에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다.

‘……분홍 머리다!’

패왕 독고미로가 은광고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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