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51화 (251/925)

46. 무대의 아래 (5)

서족의 수장, 서돌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중충한 하늘과 먹구름의 색보다 어두운 템스강을 근처에 두고 오만상을 쓰니 더 기분이 나빠 보였다.

운 나쁘게 계속 짐꾼 역을 맡는 중인 서돌의 부하는 죽을 맛이었다.

“또 내 메시지 읽고 씹었네. 여태까지 읽씹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황호는 어디에서 이런 못된 짓을 배운 거야?”

서돌의 기분이 나빠지자 그 지긋지긋한 존댓말을 쓰지 않게 되긴 했다.

그나마 말을 걸기 쉬워졌다고 생각하며 부하가 조언했다.

“상대가 메시지를 읽고도 무시하는 중입니까? 그럼 전화를 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급한 용무가 아니라서 안 돼.”

“네?”

“이번 용건은 급한 건 아니고 그냥 황호를 귀찮게 할 얘기야. 이런 일로 황호한테 전화 찬스를 쓰면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나중에 진짜 급한 일로 전화를 걸어도 안 받을걸?”

그렇다면 처음부터 불필요한 연락을 안 하면 되지 않나?

최근 황호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서돌이 별것 아닌 일로 자주 연락을 하곤 했다.

호족의 수장이 읽씹을 하게 된 것도 서돌의 평소 행실이 문제인 것 같다.

서돌의 부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서돌은 기분이 나쁜지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와.”

야외 테라스를 내다보던 서돌의 표정이 확 폈다.

서돌의 시선 끝에 몹시 눈에 띄는 차림새를 한 동양인 소년이 보였다.

동양인 소년은 푸른 비단 위에 무궁화 자수가 놓인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얀 꽃잎 부분은 은실과 하얀 실을 섞어서 수를 놓은 건지 입체감이 넘쳤다.

말이 그냥 눈에 띄는 거지, 오트쿠튀르 컬렉션에나 나올 법한 전위적인 의상이었다.

소년은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나, 홀로그램을 원수처럼 노려보며 걷느라 그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서돌이 입을 열자 존댓말이 줄줄 나왔다.

“저 아이, 괜찮은데요? 직접 만든 옷 같은데, 솜씨가 제법이네요. 재봉틀로 작업한 것보다 섬세하고 깔끔하군요.”

서돌은 세계적인 하이엔드 명품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인간이 만들어 낸 멋에도 깊은 흥미를 품고 있는 진족답게 즉각 동양인 소년에게 들이대기로 했다.

부하가 말릴 틈도 안 주고 서돌이 테라스의 경계를 훌쩍 넘어가 버렸다.

“안녕하세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전 이런 사람이에요. 아, 맞다. 혹시 한국말 못해요? 그럼 영어로…….”

“괜찮습니다. 당신은 디자이너 서돌이죠? 고명하신 디자이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소년의 자세는 상당히 우아하면서도 과장되어 보였다.

서돌은 저 소년이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살살 웃으며 답했다.

“절 알고 있나요? 그럼 자기소개는 생략할게요.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죠. 어깨 부분의 마감 처리 말인데요…….”

전위적인 패션을 한 소년은 서돌만큼이나 화가 나 있어 보였는데, 어느 사이엔가 표정이 풀려 있었다.

서돌은 한참 떠들다가 소년이 띄우고 있던 화면을 쓱 봤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 은광고의 교표가 보였다.

“지금 보고 있던 화면은 은광고 관련 홈페이지 같은데요. 거기 학생이에요?”

“네, 등교는 안 하고 있지만요. 제 거대한 야망은 은광고 안에서 이룰 수 없거든요.”

많이 이상한 애네.

서돌은 무례한 생각을 서슴지 않고 하면서도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런가요? 뭐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었나요? 표정이 안 좋은데요.”

소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 비교당하는 게 싫어요. 제 재능에 잣대를 들이대는 기분이에요.”

소년이 보고 있는 기사의 타이틀은 ‘적벽괴도 VS Phantom Thief’였다.

*    *    *

개학하고 며칠이 흘렀다.

드디어 ‘그 단어’가 포함된 기사가 신문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 내려갔다.

단신으로 올라가는 짧은 기사가 메인 자리를 차지했던 덕분이다.

신문부 홈페이지의 메인을 장식한 건 문새론이 작성한 독고미로의 인터뷰 기사였다.

문새론에게 독고미로를 소개한 건 나였다.

기사가 올라가고 얼마 안 있어 문새론으로부터 감사 메시지가 도착했다.

[문새론] 기사 봤음? 수상한 부반장님아, 미로 님께 다리 놔 주셔서 감사욧!

감사한 건 내 쪽이었다.

독고미로가 이름을 알릴 기회를 준다는 좋은 의도도 있었지만 ‘그 단어’를 빨리 메인 화면에서 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본래 체스 기사는 하나의 수로 둘 이상의 피스를 잡고 더 나아가 외통수를 노릴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독고미로의 기사가 학교 신문부 홈페이지 메인을 차지한 다음 날.

이른 시각, 1학년 0반 아이들이 정문 앞에 모였다.

‘독고미로의 첫 등교일이 되겠구나. 계속 등교하는 게 아니라 임시 등교지만.’

오늘 아침부터 ‘플레이리스트’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처음 등교하는 독고미로를 위해 김유리가 반 아이들과 다 같이 등교하자고 제안해 모두가 응했다.

사월세음과 한이는 사전에 ‘MITRON’에 들러 아침에 먹을 간식도 준비해 왔다.

“오늘 촬영하면 모르는 사람 많이 오겠지……?”

“그린아, 우리는 먼저 갈까?”

“아냐, 학교 안이면 괜찮을 것 같아.”

송대석의 말에 민그린이 고개를 저었다.

AR 글래스와 후드 모자를 단단히 쓰긴 했지만, 도망갈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미로야, 여기야!”

김유리가 손을 흔들며 말하자 교복 하복 차림의 독고미로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쪽으로 왔다.

“독고미로라고 해. 잘 부탁해! 학교에 처음 나와서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촬영은 점심시간이랑 선택 수업 시간 때 빈 교실에서 연습하는 장면을 찍기로 했어. 피해가 안 가도록 할게.”

패왕 독고미로는 패기를 완전히 감추고 수줍게 말했다.

김유리의 주도로 초면인 아이들과도 자기소개를 마치고 교실까지 걸어가려 할 때였다.

“……이야기가 다르군.”

황지호가 가라앉은 눈을 하고 하늘 저편을 올려다봤다.

은광고 정문을 향해 에어 셔틀이 하나 접근해 오고 있었다.

‘방송국 로고잖아!’

방송국 로고가 붙은 에어 셔틀 외에도 외주 업체 사람들이 탄 듯한 지상 차량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독고미로도 그걸 알아챈 듯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촬영은 점심부터라고 하지 않았나?’

독고미로는 왜 저들이 지금 오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플레이리스트’ 찍는 방송사 로고 같은데.”

“미리 와서 촬영 준비하는 게 아닐까요?”

“……아니야. 점심 먹을 때쯤 오신다고 했는데.”

독고미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문 앞에 멈춰 선 차량들 안에서 조명과 반사판을 척척 꺼내기 시작했다.

독고미로가 가장 앞에서 지시를 내리는 이를 향해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PD님. 저…… 12시쯤에 오신다고 들었는데요.”

“어? 연락이 안 갔나 보네. 촬영 일정이 꼬여서 미로는 일찍 찍기로 했어. 랩퍼 스님 분량을 좀 늘리려다 보니까 일정이 안 맞더라. 괜찮지? 옆에 있는 건 반 친구들이야?”

PD는 친근한 표정으로 말을 붙이면서도 독고미로가 항의하거나 물을 틈을 주지 않았다.

대충 상황을 봤을 때, 신입이자 화제가 크게 안 된 약소 출연자를 상대로 한 갑질 같았다.

PD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독고미로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같이 등교하는 장면 찍죠? 아, 이 반에 민그린 화백이 있는 걸로 아는데. 일단 그쪽 인터뷰부터 할까? 무명의 초신성 쪽도 괜찮은데. 담임인 창천명궁은 안 보이는데, 어디 계셔? 미로야, 얘기 좀 해 봐. 미로한테도 좋은 일이니까.”

카메라맨 하나가 어깨에 카메라를 얹고 독고미로를 비추고 있었다.

독고미로는 애써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점점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있었다.

처음부터 학교 촬영을 운운한 건 TV에 잘 나오지 않는 1학년 0반 소속의 유명인들을 노린 거란 걸 알아챈 것 같았다.

이대로 1학년 0반 아이들이 말려드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야, 저 사람들한테 준 출입 허가 말인데…….”

목소리를 낮춰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황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황지호가 내 말을 듣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반 아이들한테, 이런 얘기를, 미리…….”

늘어나는 카메라 앞에서 독고미로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고 있었다.

“일단 학교 부지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주차 문제도 있으니 교문 앞에서 촬영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가자, 얘들아.”

“미로보다 여기 학생이랑 이야기하는 게 얘기가 빠르겠네. 혹시 네가 무명의 초신성이야?”

난 예의 바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PD가 하는 말을 적당히 받아 주면서 학교 안을 향해 걸었다.

“음, 의신이가 잠깐 수상한 얼굴을 했으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네, 괜찮을 거예요!”

발달된 청력 덕에 아이들이 뒤에서 소곤거리는 것도 잘 들렸다.

“가자.”

“…….”

독고미로는 딱딱하게 굳은 상태로 한이에게 손을 잡혀 그대로 안으로 끌려갔다.

송대석과 함께 제일 먼저 들어간 민그린을 시작으로 카메라를 등진 아이들이 무사히 경계선을 넘어 학교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파지직! 파직!

“아아악!”

제일 앞에서 걷던 PD가 비명을 질렀다.

은광고 결계가 일으킨 방전에 당한 것이다.

곧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은광고 보안 시스템이 발동되었다.

위이이이잉!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약속된 시간을 어기고 신역에 발을 디디다니.”

차례차례 몰려드는 재단 직원과 멎지 않는 사이렌 소리 사이로 황지호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기절한 PD를 두고 황명재단의 보안팀과 조연출이 실랑이를 벌였다.

“아, 저 사람들 사전에 얘기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 ……결계에 걸린 거 보니 학교 측 허락은 안 받고 촬영 일정 바꿨나 봐.”

“레나 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들은 학교 규칙을 무시한 겁니까? 합당한 조치군요.”

“……방금 레나 님이라고 했어?”

“너무하네요. 미로한테만 말을 안 한 게 아니었나 봐요.”

우리 반 아이들은 방금 감전된 사람을 앞에 두고도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독고미로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카메라가 여전히 돌아가 있던 탓도 있긴 했지만, 그것뿐만은 아닌 듯했다.

‘독고미로의 모습에는 걸리는 게 많아.’

단순히 아이돌다운 면모를 보여 주기 위해 패왕으로서의 패기를 감추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독고미로는 어렸을 때 찍은 영상에서 보였던 모습과 달리 카메라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또 정문의 경계를 넘고 나서 표정이 더 안 좋아졌어.’

추측의 영역이었고, 확인할 방법이 몇 개 떠오르지 않았다.

‘……호족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은데.’

이번 일은 내가 만들려는 해피 엔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또 독고미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아니었고, 비중이 있는 NPC도 아니었다.

내가 고인물이고, 현재 1학년 0반 소속이 되지 않았다면 독고미로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돕고 싶었다.

가망이 적은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독고미로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확인해 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혼란을 틈타 황지호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독고미로의 과거가 황지호 피셜 ‘죽마고우’와 겹친 덕일까,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게 있었으니까.”

*    *    *

그 교사는 초등학생을 짜증스럽게 여겼다.

그중 가장 짜증 나는 건 독고미로의 존재였다.

TV 속에서 고등학생이 된 독고미로가 나오니 잊고 있던 짜증이 다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좀 더 인기가 생기면 끌어내려야지. 지금 끌어내려 봤자 의미가 없어.’

이 초등학교 교사는 사람의 인생을 말아먹을 간계를 꾸미는 데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교사는 한반도에서 취급받는 거룩한 직업, 성직(聖職) 아닌가.

감히 성직에 있는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아이들이 망가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런 아이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립되게 만들어 어렸을 때 미리 걸러지도록 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믿었다.

한때 뒤에서 저지른 일이 밝혀져 교사직을 잃을 위기까지 놓였지만, 일종의 의무와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독고미로에게 카메라 공포증을 선사한 건 스스로를 칭찬할 만큼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저 독한 년이 무너지는 꼴을 봐야겠어.’

교사도 나쁜 직업은 아니긴 했지만, 자신은 독고미로 같은 재능도 화제성도 용기도 없었다.

무대 위로 올라갈 마음은 없지만, 무대 위에 있는 것들을 끌어내리고 싶었다.

독고미로를 다시 무대 아래로 끌어내릴 방책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랜만에 애들을 불러서 맛있는 거 먹고, 독고미로 얘기를 꺼내면서 옛날 일을 좀 꺼내면 알아서 퍼뜨려 주겠지.’

교사는 독고미로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의 목록을 살폈다.

가장 성질이 고약하고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가벼운 입을 가진 아이들의 명단을 추렸다.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독고미로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거다.

처음 퍼질 이야기만 믿고 평생 그녀를 가해자로만 취급할 사람들이 많았다.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을 때,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집에 갈 시간인데, 뭐 하니? 교무실에 용건 없이 오면 안 돼.”

상대는 오늘 전학 온 아이였다.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는 대답하는 대신 교사가 전개한 홀로그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교사의 악의 어린 계략이 담긴 내용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독고미로에 관해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꾸밀지도 모르는 데다 막을 능력도 없는 아이가 보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왜 말을 안 하지? 어디 모자란 앤가. 귀찮게 됐네. 개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아이를 맡아선.’

교사는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집 주소는 어디였었지…… 부자 동네는 아니고, 평수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여기 임대 주택이었나?’

아이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 정도를 가늠한 교사는 이 아이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교사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한 각종 시험과 연수를 통과할 만큼은 똑똑했고, 제 주제를 알 만큼 현명했으며, 법망의 허점을 노릴 수 있을 만큼 교활했다.

그러나 알지 못했다.

인과응보의 법칙이 때로는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또 오늘, 한이와 독고미로의 초등학교 시절 담임을 맡았던 모든 교사들의 반에 전학생이 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곱상한 눈을 한 아이가 교사를 가만히 주시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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