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무대의 아래 (6)
방송계에 있어 인기는 곧 권력이었다.
‘플레이리스트’는 염준열, 최지나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진행자로 섭외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룰 수 없던 꿈에 도전한다’는 서사를 품은 플레이어들 덕에 대중이 관심을 가졌다.
3회차 방송을 앞둘 즈음엔 시청률이 두 자리에 가까워지고 광고는 완판되었으며 PPL 문의가 쇄도했다.
프로그램이 잘 나가는 데다가 그 대단한 플레이어들이 꿈을 저당 잡혀 다소 불합리한 처사를 당해도 제작진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 하니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오만하게 구는 스태프도 있었다.
“촬영 일정이 있는데 고작 몇 시간 당긴 것 갖고 이렇게 구세요? 황명재단이 뭐 어떻다고요. 지금 당신들이 하는 거 폭행이고 협박이에요. 여기에 카메라 몇 대가 돌아가고 있는지는 아세요? 지금 싸우자는 거예요?”
황명재단 직원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조연출이 그러했다.
방금 기절한 서브 PD의 라인을 타고 있는 조연출은 잡일꾼 신세를 벗어나 처음으로 그럴싸한 직함을 얻고 그 프로그램이 승승장구하고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독고미로에게도 무례한 발언을 몇 번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로 듣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선을 넘었다 싶은 것들의 얼굴과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 두는 것 정도는 했지만.
“……막내야, 지금 나 얘기 중이잖아. 지금 촬영 중이라 전화 못 받는다 해. 응? ……국장님한테서 온 전화라고?”
막내 스태프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예능국장한테 전화가 왔으니 빨리 받으라고 사정했다.
조연출은 방금까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던 황명재단 직원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몸을 훽 돌려 디바이스를 켰다.
“네, 국장님!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요…….”
국장과의 친분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소리 높여 답하던 조연출의 얼굴이 삽시간에 죽어 갔다.
예능국장과 조연출은 디바이스 이어링을 사용해 통화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플레이어 중 한이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예능국장이 지르는 분노의 호통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등교생들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광고주는 제작진이 은광고 앞에서 깽판을 치는 걸 위법 행위, 사회적 물의를 빚는 행위로 정의한 후, 심각한 브랜드 가치 손상이 우려되니 광고를 빼겠다며 국장한테 직접 압력을 넣은 모양이었다.
황명 그룹 측은 ‘플레이리스트’의 방송 시간대의 광고뿐만이 아니라, 방송국 전체에 걸고 있던 광고를 철회하고 투자 중인 프로젝트에서도 발을 빼는 것도 고려하는 듯했다.
‘황명호 총수는 주로 교내에서 업무를 보는 괴짜로 유명해. 총수가 있는 학교에서 사고를 쳤으니 문제 삼을 만한 상황이야. 그런데 황명 그룹이 원래 이렇게 트러블에 민감하게 반응했었나? 심한 사고만 아니면 그냥 신경 쓰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독고미로는 뭔가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신속한 대응에 기뻐하기로 했다.
자신 혼자라면 모를까, 한이나 한이의 반 친구가 광대가 되는 건 싫었다.
“……서로 실수가 있던 것 같네요. 이쯤에서 넘어가죠.”
“서로? 재단 측에서 어떤 실수를 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플레이리스트’는 출연자가 많다 보니 메인 PD 외에도 서브 PD들이 존재했다.
독고미로를 담당한 서브 PD와 작가들은 하필 스태프 중 가장 인성이 개판이었다.
이들은 약한 자한테 강하고 강한 자들한테는 약했다.
어떻게든 쌍방 과실로 상황을 무마하려던 조연출은 결국 자존심을 내던지고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조연출이 굽신거리는 중에도 디바이스가 계속 울려 애꿎은 막내 스태프가 높으신 분들이 보내는 호통에 대응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이 없다 보니 기절한 PD를 응급실로 보낼 생각도 못 해, PD는 길바닥에 방치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독고미로는 아주 후련한 기분이 되었다.
‘저걸 보고도 불쌍한 생각이 안 드네. 내 정신은 아직 건강하구나.’
가해자의 불행을 안쓰럽게 여기고 공감하는 건 스톡홀롬 증후군에 걸린 환자나 가해자와 동류뿐이라고 독고미로는 믿었다.
독고미로는 자신의 정신이 매우 건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학교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어려웠다.
황명재단 직원들에 의해 스태프들이 물러나 이젠 카메라도 없는데 웃기 어려웠다.
“이제 괜찮을 거야.”
독고미로에게 말을 건 상대는 스태프들을 교문의 경계로 유도했던 조의신이었다.
‘그때 염준열 선배님이 소개해 주셨던 애였지. 부반장이라고 했던가?’
조의신이 이 상황을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반 아이들을 팔아먹는 사태는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감사를 표현하면 조의신이 스태프를 엿 먹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고맙다는 말을 하기에는 미묘했다.
“교실로 가자.”
조의신의 말에 반 아이들이 교실로 이동했다.
교실로 이동한 후에는 사월세음과 한이가 산 다과를 평화롭게 나눠 먹었다.
석류알이 올라간 수플레 팬케이크에 시럽과 플레인 요구르트를 취향껏 뿌려 먹었는데 칼로리 생각이 안 날 만큼 맛있었다.
하지만 맛이 있다는 말 외에 무슨 표현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맛은 있는데,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학교, 그것도 교실에서 이러고 있으니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이 좋은 아이들끼리 저러는 걸 몇 번 지켜보긴 했지만, 당사자가 된 건 처음이었다.
조례가 시작되자 험상궂게 생긴 담임 교사도 등장했다.
간혹 머리가 굳은 고참 플레이어들이 후배가 아이돌을 한다는 걸 듣고 꼰대짓을 하려 들기에 긴장했다.
그러나 독고미로가 경계한 것과 달리 담임 함근형은 출석에 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방송 잘 보고 있다는 말만 건넸다.
‘……괜찮네.’
독고미로의 학교생활 촬영은 흐지부지되었으나 처음부터 자신의 분량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루뿐이었지만 독고미로는 촬영에 관해선 잠시 잊고 평범한 학생으로 지냈다.
수상하게 웃던 부반장이 말한 ‘이제 괜찮을 거야.’라는 말에는 언령이라도 걸려 있던 걸까.
그날 이후로도 괜찮은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 * *
며칠 후, 황지호가 귀띔했다.
―예능국장이 직접 찾아와서 말해 줬다. 서브 PD가 교체됐더군.
서브 PD가 깽판을 친 이유 중 하나는 황명 그룹이 그간 방송국을 상대로 갑질을 크게 한 적이 없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황명 그룹, 그것도 그룹의 상징인 황명호가 직접 나서서 마음먹고 갑질을 시작하니 그 영향력은 엄청났다.
서브 PD의 은광고 정문 깽판 사건 이후 방송국 쪽에서 저자세로 나왔다.
‘이제 독고미로가 차별받는 일은 없겠지.’
이 프로그램은 공식적으로 황명호에게 찍혔고, 독고미로는 황명재단이 운영하는 은광고의 학생이었다.
독고미로에게 화풀이라도 했다가 황명호 귀에 들어가면 좋은 꼴을 볼 리가 없다는 걸 잘 알 거다.
‘은광고에서 소란을 피우고, 그다음에 은광고 학생에게 부당한 대우라도 하면 황명재단에게 대놓고 싸움을 거는 모양새가 되겠지.’
거기에 황명재단에 이어 염준열도 대응했다.
염준열은 그날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염준열] 스승님, 안녕하세요.
[염준열] 혹시 오늘 아침 은광고 정문 앞에 있었던 사건에 관해 들으셨나요?
[염준열] 사실 기획이 나오기 전부터 은광고에서 촬영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회의할 때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고……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서브 PD는 염준열을 상대로도 사기를 친 것 같았다.
촬영은 12시부터라고 해 놓고 갑자기 쳐들어가 촬영 준비가 안 된 염준열의 사적인 모습을 찍을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독고미로는 안중에도 안 두고 은광고 유명 플레이어를 노린 게 맞네.’
염준열은 사정을 간략히 설명한 후 속이 답답해 보이는 홍룡 스탬프를 올렸다.
염준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줬지만, 여전히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는지 염준열은 후속 조치도 철저하게 취했다.
특히 후배이기도 한 독고미로가 잘못되는 게 걱정된 건지, 독고미로를 촬영하는 스태프로 공정한 성품의 서브 PD와 작가가 붙도록 손을 쓴 것 같았다.
그렇게 염준열이 배려를 하면 붉은 사자와 용족, 그의 팬들이 무서워서라도 독고미로에게 헛짓은 하지 못할 거다.
그러나 독고미로의 데뷔는 여전히 험난해 보였다.
‘저번에 발표된 성적도 별로였어. 이대로 가다간 다음 회차에 떨어질 거야.’
보통 오디션 프로그램은 10주, 혹은 11주에 걸쳐 방영된다.
‘플레이리스트’는 실명 인증 기능이 있는 애플리케이션으로 투표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4주 차인 지금 독고미로는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독고미로는 더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같진 않지만, 하위권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독고미로는 시청자로부터 주로 이런 평을 받았다.
[솔직히 얼굴은 수요 많을 듯. 덕심을 부르는 상. 그런데 끼가 없음. 너무 없음.]
[걍 마네킹 같아ㅋㅋㅋ 카메라랑 아이컨택도 못 함; 춤은 좀 잘 춤. 노래는 완전 별로ㅋㅋㅋㅋㅋㅋ 입덕하려다가 노래 듣고 확 깸ㅋㅋㅋㅋㅋㅋㅋㅋ]
[외모가 아깝다. 비율도 좋고 귀엽게 생겼는데 왜 이렇게 끼가 없냐; 연습은 열심히 한 거 같은데.]
[↑노래하는 거 보면 연습 안 한 거 같은데? 춤만 연습한 듯.]
[춤도 뭔가 미묘함. 카메라 워크랑 안 맞아.]
독고미로를 상대로 혹평이 끊이지 않았다.
연습량이 적지 않을 텐데도 카메라 앞에서는 그걸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활동 기간 내내 카메라를 마주해야 하는 아이돌 지망생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또 자신의 매력을 화면 너머로 시청자들에게 어필해야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로서 카메라 공포증은 절망적인 수준의 약점이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하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기 위해 황명호 대저택에 방문했다.
황금 담장 결계와 미로 정원을 넘어서 현관문을 열자 은호의 후예들이 나를 맞이해 줬다.
“의신이 형! 어서 오세요!”
“개학하셨다고 했죠? 학교는 어때요?”
“방학이 너무 빨리 지나갔어요. 방학 전에는 자주 뵙고 얘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반가워하면서도 섭섭해했다.
방학 중에는 나름 자주 놀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한 모양이었다.
개학도 한 데다 2학기에 터질 사건들을 고려하면 놀아 줄 시간은 더 없을 텐데.
‘앞으로 자주 못 보니까 한번 날 잡아서 크게 놀아 주고 싶은데.’
미안한 마음에 어떤 수로 아이들을 달래줄지 생각했는데, 곧 발치에 다가와 몸을 비비는 천사의 존재에 머릿속이 텅 비었다.
나의 천사 올무는 잠깐 안 본 사이에 더 멋지고 귀여워진 것 같았다.
영약 덕인가, 털이 솜보다 더 폭신해지고 반질반질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올무가 오늘도 얼마나 멋진지 열심히 올무에게 설명해 줬다.
“……2학기가 되어도 조의신 네 지능의 하락세는 여전하군.”
황지호는 먼저 응접실에 있을 텐데, 목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황지호와 같은 말투인데 어린 티가 나는 목소리였다.
‘설마, 그 모습의 황지호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은호의 후예 삼 남매의 막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곱상한 눈매가 황지호와 똑같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