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무대의 아래 (7)
기록으로는 남지 않는 교묘한 악행이 존재한다.
가해자나 증거는 없는데 피해자만이 있는 속 터지는 상황이 그러했다.
최편득이 적호에게 붙잡히지 않았으면 지금쯤 보석으로 석방되고 법적 공방을 거쳐 집행 유예 정도로 풀려났을 거다.
또 권레나의 양부모는 영원의 호수 소속 플레이어들을 속일 정도로 겉과 속이 달랐다.
사전에 알았거나 이들이 악행을 범했다는 가정하에, 진족 정도 되는 정보력을 가진 자들이 작정하고 조사하지 않았다면 이들의 악행은 평생 묻혔을 거다.
이건 단순한 예상이 아니었다.
게임 속에서 이들의 악행이 밝혀지는 일은 없었고 엔딩에 다다라도 끝까지 심판받지 않았으니까.
독고미로에게 카메라, 학교 공포증을 심은 건 그런 류의 악인이라고 추측했다.
‘독고미로와 한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큰 사건이 터진 후에 교사 몇 명이 직위 해제 처분을 받긴 했어. 하지만 그 사건은 딱히 카메라와 관련이 없었어.’
학교 발전 기금 횡령, 촌지 및 금품 상납, 방과후 학교 업체 선정 비리, 성적 조작, 도난 사건 등등.
초등학교의 교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불미스러운 사건이 종합 세트처럼 엮여 나온 바람에 성국언이 나서서 조사하고 고발한 그 사건의 결말은 그리 깔끔하지 않았다.
초범이고 범인들의 사회적 평판이 좋다는 이유로, 사건이 잊힐 즈음에는 아주 관대한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황지호는 그 사건에서 솜방망이 처분을 받은 교사들을 상대로 ‘사적 제재’를 가한 것 같긴 했다.
―걱정하지 마라. 그들은 잘 처먹고, 잘 살지도 못할 것이다. 발 뻗고 잘 일은 더더욱 없다.
신문부에서 그 사건 얘기가 나왔을 때, 황지호가 그렇게 코멘트 했다.
그래도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 사건에 카메라와 관련된 것은 없어.’
독고미로는 어디에서 카메라 공포증을 얻은 것일까?
학교 정문을 넘어서자 더 굳기 시작한 독고미로를 보니 학교와 관련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를 심은 건 교사 혹은 학생이겠지만, 학생이 주동한 것 같지는 않았다.
‘독고미로는 얼굴을 숨기고 초등학생 사이에서 패왕으로 군림했어. 학생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려워.’
초등학생들의 골목대장 패왕이 대항할 수 없는 상대는 교사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우선 용의자 선상에 교사를 올렸다.
‘그 사건 때 누군가는 걸리지 않고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어. 솜방망이 처분조차 받지 않은 교활한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이들이 멀쩡히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문제였지만, 차후 독고미로와 한이를 상대로 다시 무슨 짓을 벌이려 들지 모른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하지만 독고미로와 한이를 맡은 모든 담임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어. 무작정 족치면 무고한 교사도 말려들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 그 집단에 들어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내가 황지호에게 부탁한 건 직접 그들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초등학생인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있었으니 내가 직접 가는 방법도 있긴 했다.
그러나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얼굴을 빌려 초등학교에 잠입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컸고 가짜 신분을 새로 만들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반면에 호족은 정부와 협회와도 사이가 좋은 편이기에 새 신분을 확보하기 쉬웠다.
거기에 진족이나 후예는 겉으로 보이는 나이를 조절할 수 있으니 초등학교에 학생으로 잠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부하를 안 보내고 직접 갔구나.’
황지호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부하의 보고를 직접 확인하겠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는데.
‘저게 진짜로 황지호인가? 황지호인 건 분명하긴 한데.’
올무를 앞에 뒀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5천 살이 넘은 초등학생, 초딩 황지호라니!
평소라면 마음속에서 망할 노친네 소리가 절로 나왔겠지만, 기억 속의 내 친동생들보다 어린 모습을 한 초등학생 황지호를 깔 수 없었다.
고등학생의 모습도 나보다 키가 커 올려다봐야 했는데 초등학생인 황지호와 눈을 마주하려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싫은 소리는커녕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초등학생을 위해 덕담이라도 한마디 건네고 싶어졌다.
왕!
나를 제정신으로 돌려 준 건 올무였다.
그래, 제아무리 황지호가 초등학생의 모습을 해 봤자 나의 천사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하하하! 놀란 것 같군. 이 몸의 초등학생 모습 또한 흠잡을 곳이 없지.”
내 경악 어린 시선을 받고 만족했는지, 초등학생 황지호가 질린 표정을 지우고 대신 곱상한 눈을 반짝였다.
초등학생 모습이라 하지만, 입을 열고 눈을 저리 반짝이며 처웃으니 황지호스러웠다.
“황호 님, 어서 오세요!”
“와, 작은 황호 님이다!”
“다녀왔다.”
은호의 후예들이 초등학생 황지호에게도 저리 인사를 하는 걸 보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초등학생 황지호가 이쪽으로 와 목소리를 낮췄다.
귓속말을 듣기 위해 무릎을 낮춰야 했다.
“자리를 옮길까.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이들의 인성 함양에 좋을 것 같지 않군.”
초등학생 황지호가 저런 말을 하니 아주, 매우 미묘했다.
* * *
황명호 대저택의 응접실.
자리에 앉자 오토매틱 메이드가 간식을 내왔다.
‘차가 아니라 파르페라고?’
오늘은 차 대신 무화과의 과육과 얇게 썬 바나나, 시리얼이 들어간 파르페가 나왔다.
초등학생 버전은 입맛도 다른 걸까?
아니면 황지호가 초등학생 컨셉에 충실하기 위해 저러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오더 과정에서 실수한 걸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실수가 아니었는지 상석에 앉은 초등학생 황지호가 파르페를 먹기 시작했다.
“감히 겁도 없이 허락받은 시간 외에 신역에 발을 디딘 이들의 최후를 들었나?”
“그 스태프들 말하는 거야?”
“그래. 몇 시간 전 방송 장비가 고장을 일으켰는데 우연히 수도관이 파열되는 바람에 단체로 감전 사고를 당했다더군. 죽지는 않았지만 입원했다.”
몇 시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나.
사건의 내막은 모르겠지만 ‘우연히’ 일어난 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초등학생 황지호는 마치 남의 얘기하듯 계속 입을 열었다.
“방전을 일으킨 방송 장비는 남궁전자 제품이다. 남궁 그룹이 얼마 전에 광일동에서 일을 벌인 것도 그렇고, 참으로 채신머리가 없군.”
황지호는 1타 2피를 노린 듯했다.
“남궁물산 측에서 이쪽이 적극적으로 테마파크를 매입하려 드니 말을 바꾸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 인수하는 과정에서 네 차례에 걸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말을 세 번이나 바꿨다. 그 탓에 인수가 늦어졌어.”
서울 한복판에 있는 테마파크의 매입이 하루 이틀 만에 이뤄지지 않는 건 당연하지만, 예상보다 늦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나 보다.
남궁 그룹의 전략기획실의 최 실장이 부른 용역 업체가 은광구에서 날뛴 것도 그렇고, 남궁 그룹과 황명 그룹 사이가 조금씩 틀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앞으로도 남궁전자 제품에 문제가 많을 것 같으니 가려서 사용해라. NK자동차에서 나온 모델도 타지 말고.”
황지호는 앞으로도 보복할 예정인가 보다.
조만간 NK자동차의 에어백이 터지지 않거나, 브레이크 결함으로 제동이 걸리지 않는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탑승자는 아마 호족의 영역에서 날뛴 이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초등학교 생활은 어땠어?”
“하하하하! 생각보다 즐겁더군. 초등학교 문집이라는 걸 만드는데, 스무 개 중 여덟 개가 표절작이었어! 상당히 마이너한 동시를 베껴 왔더군. 이 몸 정도 되는 독서 이력이 없었다면 밝혀내지 못했겠지.”
일주일 넘는 사이에 초등학생 황지호는 대활약을 하고 온 것 같았다.
황지호는 신나게 처웃으며 말했다.
“그걸 지적했더니 문집에서 내 이름을 빼겠다는군. 급식도 혼자 먹어야 했어. 맛이 없어서 애초에 먹지 않았지만. 아, 집 주소를 집값이 싼 곳으로 해 놨더니 어떻게 알고선 나를 거지라고 부르더군.”
황지호는 들어가자마자 따돌림을 당한 것 같았다.
그런데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아이의 집 주소를 애들이 어떻게 알았지?
교사가 은근슬쩍 흘린 건가.
“또 부모가 없다는 설정인 청호의 제자를 쓰레기 당번으로 고정시켰는데……. ”
청호의 제자들이 잠입한 곳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터진 것 같았다.
그래도 초등학교 경험이 신선했는지 황지호는 매우 신나고 즐겁게 얘기했다.
그러나 덧붙인 말은 그리 즐겁게 들리지 않았다.
“이걸 어린 내 친우가 경험했다고 하면 역겹더군.”
황지호는 홀로그램을 여러 개 켰다.
홀로그램에는 소풍이나 체험 학습 때 찍은 듯한 초등학교 단체 활동 사진이 찍혀 있었다.
어린 독고미로와 한이가 한구석에 꼭 붙어서 찍혀 있었다.
처음에 웃는 표정으로 나란히 서 있던 어린 두 사람은 성장하면 할수록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떨어진 상태로 사진을 찍었다.
고학년이 되니 아예 독고미로는 찍혀 있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두 사람을 담당한 교사를 빼면 다 쓰레기였어.”
황지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둘이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을 때 그들을 담당한 교사는 평범한 교사였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앞에 나서진 않지만, 악행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솔선해서 둘을 보호하려 하진 않았지만 괴롭히지도 않았던 교사는 2학년 담임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 교사는 평판이 안 좋아. 교사들 사이에선 사회성이 없는 부적응자 취급을 받고 학부모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는 평가를 받더군.”
반면에 다른 교사들의 평가는 상당히 좋은 듯했다.
“반면, 쓰레기들의 평판은 매우 괜찮다. 교사들,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아. 한 명의 학생을 괴롭히더라도 스무 명의 학생에게 잘해 주니까. 영리하고 교활한 처신을 하더군.”
저렇게 처신했으면 나중에 했던 짓이 들키더라도 ‘저 착한 교사가 오죽했으면 저랬겠느냐.’라는 평가로 피해자를 더욱 궁지로 몰 수 있을 거다.
그리고 황지호와 청호의 제자들은 짧은 기간이지만 약자로 가장하여 그 피해자의 입장을 생생하게 겪었다.
“청호의 제자들은 이들을 은영관의 지하나 태호권 도장의 바닥 밑으로 처넣고 싶어 하던데.”
그 외에도 황지호는 호족과 황명 그룹을 이용해 가할 수 있는 제재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경중을 따져 교사들을 다 박살 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황지호가 제시한 모든 방법이 바람직했지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었다.
“처분은 맡길게. 대신 내 제안을 후보로 뒀으면 좋겠는데…….”
내 제안을 들은 초등학생 황지호가 눈을 반짝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 * *
초등학생 황지호와 만나고 며칠 후.
교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1학년의 첫 이계 공략 공격대 실습을 앞두고 있기도 했고, 군사관학교와의 스포츠 교류전 대표 선수단의 합동 연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동아리 혹은 개인적인 지원을 통해 선출된 은광고 선수단은 선수단복까지 맞추고 은광고 부지 안에 선수촌까지 만들었다.
[유상훈] (사진)
[유상훈] 이길 예정.
장남욱과 유상훈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
유상훈이 은광고 대표 선수단의 선수촌 입성식이 찍힌 사진을 긴 메시지와 함께 업로드했다.
[장남욱] 와, 은광고 선수단복 멋지다!
[장남욱] 우리도 맞출까? 건의해 봐야겠다.
[유상훈] 흉내 ㄴ
[장남욱] 선수단복은 국가 대표 선수들도 맞추는 건데 흉내라고 할 것도 없잖아!
[장남욱] 어쨌든 우리는 지지 않을 거야. 은광고는 통학생도 있어서 선수촌을 구성해야 했잖아? 군사관학교는 전원 기숙사제라 처음부터 합숙을 했어. 단결력이나 연습 시간에는 절대 밀리지 않아.
[유상훈] ㅋ
장남욱과 유상훈의 신경전은 아마 스포츠 교류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은광고 학생이니 유상훈 편을 들었는데, 비록 2 대 1이지만 우리 둘이 쓰는 텍스트량은 장남욱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아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등굣길에 자음 몇 개를 단체 메시지방에 올렸지만, 장남욱의 긴 메시지를 덮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제 플레이리스트 봤어? 어떡해……. 미로가 데스 매치에 올라갔어!”
“네…… 저번 무대가 반응이 좀 안 좋았는데, 결국 데스 매치에 가게 된 것 같아요.”
평소보다 늦게 1학년 0반 교실에 도착했더니, 아이들이 전부 도착해 있었다.
아이들은 우울한 얼굴로 ‘플레이리스트’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미션 봤어? 미션도, 상대도 별로 안 좋더라.”
권레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말없이 듣고 있는 한이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독고미로는 데스 매치 미션을 하게 되었고, 랜덤하게 미션을 정해 상대와 대결하게 되었다.
권레나의 말대로 상대도, 미션도 최악이었다.
“조작 아니냐? 상대가 완전 별로던데.”
“염준열 선배님이 뽑았으니까 조작은 아닐 거야.”
“맞긴 한데…… 너무 심했어요. 인터넷 유명 스트리머 플레이어를 상대로 영상 조회수 대결이라니요!”
독고미로의 데스 매치 상대는 이계 방송 스트리머로 이름난 플레이어였다.
그 플레이어를 상대로 카메라 공포증이 있는 독고미로가 영상 조회수로 대결이 될 리가 없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래도 끝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내 능력으로 독고미로를 도울 기회가 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