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패자 부활전 (5)
최근 황지호는 매우 바빴다.
그룹 경영, 학교 업무와 동시에 학교를 다니는 분신들도 굴리니 가끔 부하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교실에서 갑자기 입을 다물고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는데, 착한 0반 아이들은 돌아이에게 조울증이 있는 게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다.
황지호는 쉬는 시간 동안 관자놀이를 누른 채로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괜찮아?”
황지호를 대놓고 꺼리는 한이도 그렇게 물을 정도였다.
한이가 말을 거니 전구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하하하하! 물론이다. 내 죽마고우는 다정다감하구나!”
한이는 즉각 표정을 굳히며 말을 건 것을 후회했다.
황지호는 처웃으며 친한 척을 했고 한이는 황지호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가 하는 헛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둘에게 유독 신경을 쓰는 것 같던 송대석은 그 장면을 보며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둘 다 저 돌아이한테 까칠해서 감이 잘 안 잡혔는데…… 죽마고우라면…….”
송대석도 연구소 일이 바빠서 오후 수업은 전부 레포트로 대체하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스트레스가 심한 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워낙 유능하다 보니 일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송대석도 고등학교 생활을 즐겼으면 했다.
“어! 그린이가 기사로 나왔어요!”
“뭐! 어디!”
송대석이 바로 혼잣말을 멈추고 사월세음 쪽으로 달려갔다.
송대석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놀라운 속도로 움직였다.
업무는 많다고 하나 송대석이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월세음이 헤드라인이 잘 보이도록 홀로그램을 띄웠다.
[‘플레이리스트’ 독고미로, 데스 매치 무대 뒤를 장식한 신동 민그린]
권레나가 헤드라인을 보고 상황을 추측했다.
“아, 추가로 올라간 영상에서는 무대가 선명하게 찍혔잖아. 그거랑 1학년 0반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니까, 사람들이 저거 그린이가 그렸다고 추측한 것 같아.”
은광고 학생들의 후기 덕에 독고미로가 그날 정문 데스 매치 버스킹 때 여러 버전으로 노래를 부른 게 알려졌다.
다른 영상도 공개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쳐 내가 찍은 영상들을 전부 업로드했다.
영상은 독고미로가 새로 만든 채널을 통해 올렸는데, 올리는 영상들 전부 반응이 좋았다.
주역은 독고미로였지만, 영상이 여러 개 올라가다 보니 다른 요소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고 마침내 민그린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 것 같았다.
“그때 썼던 무대 장식은 어떻게 됐어?”
“미술부 사람들이 들고 갔는데…… 제비뽑기로 가져갈 사람 정한다고 들었어.”
“아……”.
악플이 달려 있을까 봐 걱정한 아이들이 민그린과 송대석을 대신해 먼저 댓글을 확인했다.
민그린 욕을 발견하면 송대석이 미쳐 날뛸까 봐 그를 제외하고 먼저 우리가 댓글을 읽기로 했다.
다행히 눈에 띄는 악플은 없었다.
아이들이 봐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을 전하자 민그린과 송대석이 댓글을 읽었다.
댓글이 아주 많이 달리지 않은 탓에 추천을 10개 정도 받은 댓글이 베스트로 선정되어 맨 위에 올라가 있었다.
[왜 작품 활동 안 함?]
민그린이 가장 위에 쓰여 있는 댓글을 읽고 중얼거렸다.
“작품 활동…….”
민그린이 그림을 쉰 적은 없었다.
등교하지 않을 때에는 좋은 재료를 쓰지는 못했지만 붓을 놓지는 않았다.
다만 세상에 제 그림을 내보이는 걸 그만뒀을 뿐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김유리가 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음…… 아, 곧 MITRON에 가을 한정 디저트 나온대!”
“와, 진짜요?”
“응, 파티시에가 원래 겨울 디저트 전문이라 날이 추워질수록 메뉴가 다양해져.”
화제를 바꾸자 곧장 사월세음과 한이가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댓글을 전부 읽은 민그린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지만, 분위기가 딱히 어두워 보이진 않았다.
* * *
주말, 황명호 대저택.
정신을 차려 보니 응접실에 있었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는군.”
내 앞에 5천 살이 넘은 초등학생이 한심해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응접실에는 철없는 5천 살 외에도 적호와 백호군이 있었다.
품에는 미용을 받았다는 올무가 안겨 있었다.
‘아, 올무를 칭찬하다 보니 정신이 없었네.’
호랑이는 털갈이를 3월, 9월 두 번 하고 강아지도 비슷한 시기에 한다고 한다.
올무가 외견과 본질, 어느 쪽을 따른 건지 모르겠지만 털갈이에 힘들어하자 백호군이 직접 털을 정리해 줬다 한다.
풍성한 솜뭉치 같은 모습도 귀여웠지만, 다듬어진 솜뭉치 같은 모습도 귀엽고 완벽했다.
“또 정신이 나가기 전에 들도록.”
초등학생 버전의 황지호가 아이스크림 크레이프를 내밀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하거나 좀 생각해 봤겠지만, 어린 모습의 황지호가 작은 손으로 권하니 어쩔 수 없이 바로 받아들였다.
‘맛있네.’
오렌지 시럽과 화이트 초콜릿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조합이 절묘했다.
어린 모습의 황지호도 벌써 아이스크림 크레이프만 두 개째를 먹을 정도였다.
“피곤해 보이는군요. 초등학교 잠입은 이제 끝나지 않았습니까?”
“곧 끝난다. 그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다. 그 교사를 통해 엮을 만한 쓰레기들은 다 잡았으니까. 그 담임은 한 달 정도에 걸쳐서 사회적으로 천천히 망가뜨리고 향록에게 넘길 예정이다. 마침 인간 실험체를 더 요청해 왔더군.”
아이스크림이 묻은 입가를 냅킨으로 닦아 내는 초등학생이 험한 말을 했다.
마치 붙잡은 먹이를 놀잇감 삼아 굴리는 호랑이가 할 법한 말이었다.
적호는 한이가 당한 일을 몹시 내켜 하지 않았기에 황지호의 말에 만족한 얼굴을 했고 백호군은 평소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문제는 학교 업무 쪽이다. 이능 전문 학교 간의 교류전 절차가 그리 까다로울 줄은 몰랐다.”
“그간 은광고는 다른 학교와의 교류가 적었죠. 제 아들도 많이 바빠 보였습니다.”
“처음이 힘들다곤 하지만 이상한 점이 많아. 누군가가 은광고를 고립시키려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황지호의 말에 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맹효돈을 구한 다음 날, 0반 쪽 출입구에서 기다리던 황지호가 이렇게 말했다.
―최편득이 한중일 청소년 플레이어 교류전 추진 위원회 맡고 있던 거 알아? 그거 걔가 무산시키려 했더라. 기획 단계부터 다시 해야 해.
은광고를 고립시키면 확실히 흑막에게 이득이 될 법했다.
플마고 콘크리트층 붕괴를 부른 시나리오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게 아니라 흑막이 보이지 않는 수를 한 수 한 수 쌓아서 터진 일인가 보다.
이후, 적호가 그간 벌인 일들에 관해 브리핑했다.
실종되었다가 하수구 등에서 발견된 교사들은 대부분 청호의 제자들 작품인 듯했다.
“그 교사가 망가지는 걸 보고 나면 이 몸도 곧 전학 절차를 밟을 거다. 그럼 다소 여유가 생기겠군.”
아이스크림 크레이프에 이어 애플민트 젤라토를 올린 와플을 먹던 초등학생 황지호가 내 쪽을 봤다.
“조의신, 전무영을 아나?”
뜬금없는 질문이 떨어졌다.
당연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전무영을 모를 리 없었다.
이 세계에서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전무영이 은광고를 졸업했다고 하나 예전 일인데.”
“성시완 선배님하고 식사하러 갔을 때 뵌 적이 있어. 저번에 홍천에 가서 마주치기도 했고.”
“그렇군.”
초등학생 황지호의 눈이 불길하게 반짝였다.
왜 나이가 어려져도 분위기는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차마 망할 노친네라고 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전무영이 최근 내가 재학 중인 광일초등학교 교실에 잠입했더군.”
국회의원 수석 보좌관이 초등학교 교실에?
성국언이 이번 일에 관해 뭔가 있다고 여겨 잠입을 지시한 건가.
아니, 성국언이 나선다고 했다가 전무영이 대신 갔을 게 분명하다.
전무영이 느낄 자괴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무영은 내가 그를 발견했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어떤 능력을 써서 몸을 감췄지.”
이건 좀 안 좋은 상황 같은데.
화제를 돌려야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너와 전무영은 같은 능력을 사용하던데.”
응접실에 있는 호랑이들이 다 나를 보고 있었다.
* * *
염준열은 시청자들이 올린 플레이리스트 시청 후기를 읽고 만족한 얼굴을 했다.
플레이어가 무대 위에서 꿈을 펼친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에 대중이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이 많았다.
초반에는 반발이 많았지만, 점점 시청률도 늘고 실력파 플레이어들이 멋진 공연을 보여 주며 논란이 종식되고 있었다.
또 처음에는 부진했던 은광고의 후배, 독고미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녹화를 앞두고 독고미로가 밝게 인사했다.
‘기척 죽이기’를 사용해도 이 유능한 후배는 곧잘 염준열을 발견해 인사하곤 했다.
최근 염준열의 작은 목표는 독고미로의 눈을 속이는 게 될 정도였다.
“그…… 반 아이들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님이 다리 안 놔 주셨으면 데스 매치에서도 도움받을 수 없었을 거예요.”
독고미로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데스 매치 결과 발표 이후로 염준열과 직접 대화할 기회를 잡지 못해 인사가 늦어졌지만, 독고미로는 계속 염준열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내가 버스킹 영상 찍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뭘.”
“아뇨! 선배님이 안 계셨으면 전 걔네들 이름도 몰랐을걸요. 초등학교 동창 한 명만 빼면 다 모르는 애들이었어요.”
염준열과 독고미로는 잠시 1학년 0반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염준열은 후배가 반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안심했다.
무엇보다 안심한 건 최근 변한 독고미로의 모습이었다.
“매번 카메라가 보이면 긴장하는 것 같았는데. 이젠 괜찮은 것 같네. 저번 녹화 때도 표정이 편해 보였어.”
“아…… 사실 카메라가 좀 무서웠어요. 지금도 좀 그렇지만…….”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아뇨, 언젠가 다 밝혀질 것 같으니까요. 상관없어요.”
독고미로는 어색해하다 솔직히 말했다.
독고미로는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보인 태도의 변화나, 초등학교 시절 그녀를 괴롭힌 급우들로 인해 언젠가 그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차라리 가까운 사람들에게 와전되어 알려지기 전에 미리 알려 두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버스킹 영상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아하하…… 사실 그때도 안 괜찮았어요. 그거 어떤 애가 스킬인지 광림인지를 써서 제 감각을 속이고 촬영한 거예요.”
“네 감각을 속였다고?”
염준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독고미로는 매번 기척을 죽인 염준열을 찾아낼 만큼 감각이 우수했다.
가끔은 용족도 따돌려 낸 염준열인데, 독고미로는 한 번도 염준열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독고미로는 감지 능력이 뛰어난데 무서워하는 카메라의 존재를 숨기면서까지 속이다니.
“그 영상을 누가 찍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독고미로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조의신은 딱히 자신이 영상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조의신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걸 관객인 은광고 학생들도 봤으니 괜찮다고 판단했다.
“부반장이 찍었어요.”
“부반장? 의신이 말하는 거지?”
“네. 반 아이들도 다 속았더라고요.”
염준열은 1학년 0반의 구성원을 떠올렸다.
0반에는 아주 강력한 진족이 있었다.
용제건의 말에 의하면, 그 후배는 무려 신화계 호족이었다.
‘그 호족의 정체는 이사장이야. 이사장의 눈도 속였다고?’
염준열은 차갑게 식은 손으로 자신을 체크메이트로 몰고 가던 조의신을 떠올렸다.
어쩐지 스승님을 떠올리게 하는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후배였다.
‘스승님께서도 기척을 죽이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신데.’
문득 수업을 마칠 때마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적벽괴도의 존재가 떠올랐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