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패자 부활전 (6)
‘플레이어의 궤적’은 내가 게임에서 육성한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능력을 레벨을 조정해 사용할 수 있는 광림이었다.
동일한 광림은 오로지 한 시대에 하나뿐이라는 법칙을 무시한 능력이다.
한편 전무영의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은 그림자부터 시작해 존재감과 기척을 지운다는 원리의 이능이었다.
기척을 숨기는 유사한 효과를 가진 광림은 또 존재했지만, 그림자부터 효과가 퍼지는 광림은 이 세계에서 현재 전무영과 나 두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전무영은 은신 스킬을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내 눈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에 사용한 건 은신 스킬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들더군. 그건 분명 광림이었어.”
초등학생 모습을 한 호랑이, 황지호의 눈이 계속 반짝였다.
나이를 먹은 모습으로 저러면 밉상이었는데 지금 모습으로 저러니 부정적인 표현이 나오질 않았다.
“네가 다른 자의 광림을 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직접 본 적도 있고, 추측해 내기도 했지.”
황지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내 광림의 존재를 파악했다.
다른 사람의 광림을 쓴 것 갖고 추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황지호가 파악한 광림이 뭐 뭐 있었지? 만우절 날에는 천동하의 광림을 사용하다 걸릴 뻔했는데. 그건 아마 보지 못했을 거야. 그럼 황지호가 파악하고 있는 건…….’
황지호가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 단어’의 정체가 나라는 걸 알았으니 내가 염준열의 모습으로 ‘홍룡 소환’과 ‘원격 점화’를 사용한 걸 알았을 거다.
청소년 수련회 때는 눈앞에서 백호군의 광림에다 천신의 디버프를 해제하는 과정까지 보였다.
또 장남욱이 황명호 대저택을 방문한 날, 무녀 후보생의 광림으로 무구를 소환해 도시후의 소지품을 대상으로 벽사 의식까지 치렀다.
황지호는 이미 내가 여러 사람의 능력을 광림으로 사용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의신은 처음 저와 행동할 때 비행 스킬을 사용했죠. 평소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만.”
“비행 스킬이라. 그럼 만우절 때에도 아이템을 사용한 게 아니라 비행 스킬을 사용해서 이동한 건가.”
적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적호와 행동한 날과 만우절 때에는 용제건의 힘을 빌렸는데, 여기서 용제건 이름은 안 나왔으면 했다.
다행히 바로 용제건의 이름은 안 나왔지만 황지호가 머릿속에서 비행 스킬을 사용하는 존재를 추려 내는 게 뻔히 보였다.
그 존재의 후보 중에는 용제건도 있을 거다.
“신화계 호족, 백호의 광림을 사용할 수 있는데 다른 인간의 광림을 사용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다.”
황지호가 이만큼 서론을 길게 끌어 준 덕에 나도 어느 정도 추측이 됐다.
내가 다른 사람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건 현재로선 특별히 지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지호는 짧은 기간 동안 눈앞에서 전무영과 내가 각각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걸 봤다.
그렇게 둘을 비교하면 황지호도 깨닫는 게 있을 거다.
‘……내 정체에 관해 추리가 많이 진행됐겠구나.’
나는 동요한 기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황지호가 던질 말을 기다렸다.
“어째서 네가 전무영보다 더 광림을 강력하게 발현시킨 건가.”
왜 실제 전무영보다 내가 더 강력한 광림을 사용하는가.
‘황지호가 본 두 개의 ‘그림자 없는 시간’ 중, 전무영보다 내 능력이 더 강력하게 느껴졌을 거야.’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그 질문에 간단히 답할 수 있었다.
스킬이나 종합 능력치와 달리 광림에는 레벨이 붙지는 않았지만, 플레이어의 성장과 컨디션에 따라 사용 제한 시간과 발현 양상이 달라진다.
나는 전무영이 스토리 상 죽은 후에도 프리 배틀, 프리 퀘스트 모드 등을 이용해 캐릭터 육성을 반복했다.
독고미로의 데스 매치 미션 영상 촬영을 위해 사용한 전무영의 능력은 육성이 최대치까지 완료된 버전이었다.
‘게임 속에서 성인 캐릭터는 고등학생 캐릭터에 비해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적긴 했어. 그래도 지금의 전무영보다는 내가 더 광림을 잘 쓰겠지.’
플마고 게임 메뉴에는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는 ‘스토리 모드’와 스토리와 관계없이 게임을 즐기는 ‘프리 모드’가 존재했다.
스토리 상 죽은 캐릭터는 죽은 시점 이후의 ‘스토리 모드’에서 사용이 불가능했지만, ‘프리 모드’로는 얼마든지 출격시킬 수 있었다.
“…….”
이런 게임적인 부분을 호랑이들 앞에서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침묵을 고수하기로 했다.
내가 입을 다문 사이에 어린 모습의 황지호는 와플을 두 개나 먹었다.
그는 마지막 한 조각을 먹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말하기 어려운 중요한 정보인가 보군. 원본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쓸 수 있다는 점, 잘 기억해 두겠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초등학생 황지호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감이 잡힐 듯 말 듯 하군. 진족, 후예, 인간. 너는 이들의 광림을 모두 사용해. ‘은광고’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긴 하지만 성격도, 나이도, 사상도 다르지.”
어린 황지호는 먹는 것도 멈추고 신나게 추리해 대기 시작했다.
아직 황지호가 파악한 표본이 적고, 게임 플마고의 존재를 알 리가 없으니 정확한 추리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황지호는 제한된 정보 속에서 점점 답을 향해 접근해 가고 있었다.
“……조의신은 호족의 은인입니다. 그가 밝히려 하지 않는 개인 정보를 이렇게 캐도 되겠습니까?”
적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5천 년에 걸친 삽질 끝에 아들과 화해한 이후, 다소 본 성격이 드러났다고는 하지만 역시 적호는 황지호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친우가 저렇게 말하는데도 어린 모습의 황지호는 처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조의신의 허락은 받았다. 조의신이 내 분신의 정체를 꿰뚫어 봤을 때, ‘제 입으로 말하면 재미없지 않을까요.’라고 말했어.”
방금 황지호가 뭐라고 한 건가.
황지호는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을 하면서 한순간 내 말투를 흉내 냈다.
지금 황지호가 초등학생 모습을 하지 않았다면 호족의 수장이고 뭐고 크게 정색했을 법한 모습이었다.
고등학생 황지호 놈이나 그 위의 나이대의 모습으로 내 흉내를 냈으면 욕이 나올 만큼 꼴 보기 싫었을 거다.
그런데 저 말을 일종의 허락으로 받아들인 건가?
‘그건 허락이 아니라 변명이었는데.’
적호는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내 의중을 읽어 낸 듯 한숨을 쉬었다.
“조의신이 우리의 은인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황호.”
“하하하하! 그걸 잊을 리가 없지.”
어린 모습으로 처웃긴 했지만, 적호가 말린 게 어느 정도 먹힌 건지 내 광림을 파헤치는 작업은 중단되고 화제가 바뀌었다.
내가 긴장을 풀자 올무가 내 노고를 위로하는 것처럼 애교를 부려 왔다.
미용을 받은 덕인지 쓰다듬는 느낌이 달라져서 그런지, 열심히 쓰다듬는 사이에 잠시 넋을 놓기도 했다.
* * *
올무와 백호군과 기숙사로 돌아가는 산책로.
곧 9월 중순에 가까워지는데도 아직 날이 더웠다.
해가 지고 있긴 했지만, 달궈진 지면이 별로 식지 않은 탓에 올무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다행히 훌륭하게 재활을 견뎌 낸 이후 올무가 많이 건강해졌는지 아주 쌩쌩하게 땅 위를 달렸다.
예전에는 백호군이 올무가 넘어지지 않도록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 이제는 그런 주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올무는 안정적으로 뛰어다녔다.
‘백호군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황지호의 추궁 탓에 게임 생각을 많이 한 탓인지, 문득 묻고 싶은 게 떠올랐다.
백호군은 거의 처음부터 게임 속에 등장하지만, 주수혁과 안다인 두 사람과 알고 지내게 될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백호군과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마주치긴 한다.
그러나 서로 얼굴만 보고 지나갈 뿐 말을 나눌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정식으로 파티를 짜서 행동하기까지는 더욱 오래 걸렸다.
‘백호군은 보통 단독 행동을 하는 바람에 적호와 황지호가 주수혁과 동행할 때에는 거의 마주치지 않았었지.’
게임 속 백호군과 주수혁이 처음 만나는 건 1학년 1학기 여름 방학이다.
방학에 주수혁이 수행한 퀘스트 중, 진족의 가든이 남긴 잔해를 정화하는 과정에서 주수혁은 백호군과 마주친다.
주수혁은 백호군이 진족인 걸 알아보고 매우 경계하는데 백호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진다.
플레이어야 백호군이 악역이 아닌 걸 알지만, 주수혁은 백호군의 정체를 두고 혼란스러워한다.
‘내버려 둬도 괜찮을 것 같지만, 확인해 보자.’
만약 오해가 생겼다면 풀어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주수혁에게 대뜸 백호군을 언급하면 이상하게 여길 게 분명하니 백호군을 통해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저번 달에 은광구의 경계 부분에서 쌍검을 든 플레이어랑 마주치지 않았어?”
앞을 보고 있던 백호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봤다.
무심한 눈에는 평소대로 별 온기가 없었다.
“마주치지 않았다.”
주수혁은 게임 속 전개대로 퀘스트를 해결했는데 백호군과는 마주치지 않았다고?
게임 속 백호군은 황명호 대저택에 머무르지 않았고, 지금 백호군은 친우들과 후예들과 올무와 함께 대저택에 있으니 어긋난 걸까.
백호군과 주수혁이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내가 직접 나서서 다리를 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백호군이 한마디 덧붙였다.
“문제가 없을 테니 갈 필요가 없었다.”
문제가 없을 테니 갈 필요가 없었다고?
주수혁이 혼자서 다 해결해 버리니 문제가 없긴 했는데.
백호군은 말투는 어딘가 어폐가 있었다.
‘마치 문제가 발생해도 별일 없을 거라는 걸 아는 듯한 말투야.’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왕!
올무가 밝게 짖으며 기숙사와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리드를 잡은 백호군도 올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갔다.
은광고가 넓다고 하지만 이 둘이 거주 구역의 위치를 헷갈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어디 가?”
내 질문에 백호군이 답했다.
“이전에 대련으로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긴 했다.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한 날.
그러나 은련관에서 백호군은 대련 대신 체스를 두자고 제안했고, 나는 이에 응했다.
대국을 하느라 결국 대련은 하지 못했다.
“오늘 시험해 보도록 하지.”
역시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배려심이 깊었다.
물론 은련관 쪽으로 앞장서서 안내하는 천사도 그랬다.
* * *
조경 구역의 은련관 중앙 대련실.
밤하늘과 서방칠수가 구현된 돔 하늘 아래 백호군이 서 있었다.
스릉!
검명이 우는 소리와 함께 백호군의 광림이 발동해 백아가 등장했다.
“무기를 꺼내라, 조의신.”
나는 무기 카드를 꺼냈다.
평소라면 상보심금파를 꺼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지금 내 손에 들린 건 투명한 아이템 카드, ‘무명의 운명’이었다.
“시험해 보고 싶다는 게 그것인가.”
“어.”
내 말을 들은 백호군이 백아의 소환을 해제했다.
파앗!
백아가 사라지자 백호군은 맨손이 되었다.
상보심금파가 아니면 맨손으로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무기를 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했지만, 백호군은 내 손에 들린 ‘무명의 운명’을 주시하며 말했다.
“시험해 보고 싶은 걸 해 보도록.”
백호군은 무기를 꺼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투명한 아이템 카드에서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한 걸까?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광림으로 어떻게든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드 실체화를 위해 이능파를 발산했다.
파아아아……!
내가 이능파를 뿜자 투명한 카드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