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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66화 (266/925)

48. 첫 실습 (5)

마왕 시델렌티움의 상징은 까마귀였다.

현대에서 까마귀는 보통 흉조, 불길함의 상징으로 취급받으니 마왕과 까마귀는 척 보기에 어울려 보였다.

그러나 까마귀를 길조로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영국과 런던탑을 비호하는 상징이 까마귀고, 까마귀가 런던탑을 떠나면 런던탑이 무너지고 영국은 멸망할 것이라는 설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동아시아 전역에 삼족오 관련 설화가 산재하고, 성역의 상징 혹은 마을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솟대 윗부분에 조각된 새가 까마귀라는 설이 존재했다.

‘칠석에 까치와 함께 은하수 사이에 오작교를 놓아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하는 것도 까마귀였지.’

거기에 까마귀는 수다쟁이나 시끄러운 존재를 상징했다.

방관과 침묵을 수식언으로 삼고 있는 시델렌티움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별자리 중, 까마귀자리의 유래를 생각해 보면 그랬다.

‘은빛 깃을 가진 아폴론의 애완조가 입을 잘못 놀려 새까맣게 타 하늘에 매달렸다는 일화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방관과 침묵의 마왕 시델렌티움은 까마귀의 부리와 깃털을 형상화한 인장을 사용했다.

이 미궁 타입의 이계에서 나타난 까마귀의 인장은 시델렌티움이 사용한 것과 동일했다.

스스스……!

내가 접근하자 시델렌티움의 인장이 거세게 이능파를 뿜어내며 형체를 바꿨다.

시델렌티움의 인장이 머금은 빛은 언뜻 검게 보였지만, 까마귀의 깃털처럼 녹색빛의 광택이 섞여 있었다.

이능파가 잦아지자 내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까마귀 가면을 쓴 반투명한 그림자가 보였다.

뒤가 비쳐 보이는 게 예전에 석촌호수 수중 이계에서 만난 나비령과 비슷한 스킬을 사용 중인 것 같았다.

‘시델렌티움의 인장에 저 까마귀 가면, 이능파의 색……. 시델렌티움이 분명해’

시델렌티움은 가면 너머로 이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우선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

내 인사에 시델렌티움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리곤 입을 벙긋거리기 시작했다.

의사소통을 할 생각은 있지만, 목소리를 들려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에너미가 접근할 기색도 없고, 이 주변은 순식간에 정적에 잠겼다.

‘게임에서는 자막으로 나왔는데, 여기에선 그냥 입 모양을 읽어야겠지.’

망겜 플마고는 음성 지원이 안 됐다.

모든 대사가 자막 처리됐으니, 시델렌티움이 게임상에서 등장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는 줄은 몰랐다.

시델렌티움의 말을 해석해 보면 이러했다.

―동요하지 않는군. 예상했나?

언젠가 나타나리라 예상했지만, 지금 나타날 줄은 전혀 몰랐다.

나는 매우 놀랐지만, 내가 이계에 있는 지금 이 상황을 ‘싸우는 중’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덕일까.

표정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중인 것 같았다.

―내 까마귀 가면에, 그 가면 안쪽에는 내 인장까지 새겼다면 내가 언젠가 나타나리라 예상했겠지.

―네 존재를 인식한 이후, 까마귀 가면을 통해 너를 지켜봤다.

―마왕이 너를 지켜보는 게 꺼려지지 않는가?

까마귀 가면을 쓰고 행동했을 때는 시델렌티움이 나를 보고 있었을 거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차피 가면을 쓰든 안 쓰든 망할 노친네 하나가 디바이스 추적도 하는 중이라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반 아이들은 괜찮을까.’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면 다치는 아이들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건곤(乾坤)을 품은 눈’으로 본 아이들 중, 가장 위태로운 건 사월세음과 권레나 두 사람이었는데, 다행히 아직 에너미와 마주치지는 않았다.

‘약점을 보일 수는 없지. 조금 늦더라도 숨겨야 해.’

거래하기 직전에 제 약점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대신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말해 봐라.

게임 속 시델렌티움은 신중하고 느리게 움직였는데, 생각보다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혹시 지금 저 까마귀 가면을 쓴 건 시델렌티움이 아닌 대리인인 걸까?

바로 답하지 않자 시델렌티움이 몇 마디 덧붙였다.

―대기시킨 권속의 힘을 빌려 이계에 간섭하는 범위와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또 나는 진족과 엮이는 게 귀찮다. 네 주변에 있는 호랑이나 용에게 내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아. 어서 말하라.

용제건은 이미 시델렌티움의 존재를 눈치챘다.

용제건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곧 시델렌티움에게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저 실용적인 사고는 시델렌티움이 할 법한 것들이었다.

나는 계속 염두에 두고 있던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말했다.

“마계를 안내해 줄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마왕님의 권속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이계 충돌 이후 많은 것이 변하고 융합했다.

진족의 주 무대는 현세가 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천족과 마족.

현세에 내려온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천계와 마계에 머물렀다.

천족과 마족이 존재하는 천계와 마계, 이들의 세계와 현세는 완전히 융합하지 않았다.

그저 그사이를 잇는 ‘길’이 열렸을 뿐이었다.

‘주수혁과 안다인 대신 내가 갈 가능성이 있어. 두 사람이 가더라도 같이 가야 해.’

주수혁과 안다인은 어느 시나리오 해결을 위해 사전 준비도 없이 마계로 향하게 된다.

두 주인공은 주인공답게 기연을 만나고 마족의 호의를 얻어 무사하지만, 두 사람의 일행 모두가 운이 좋지는 않았다.

―마계의 길잡이라. 너는 마계가 어떤 곳인지 아는 것인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길잡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게임에서 본 만큼만 알고 원하는 만큼은 알지 못한다.

천계와 마계는 천족과 마족 외의 진족에게도 미지의 대상이니 호족의 도움을 빌릴 수도 없었다.

희생과 수고를 줄이려면 마족 중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게임 속에서 등장한 마족 중 ‘거래’를 걸 만한 건 시델렌티움뿐이었다.

―길잡이를 수배하는 대가로 너는 무엇을 줄 거지?

그건 미리 확보해 놨다.

나는 아이템창에서 아이템 카드를 하나 꺼냈다.

UR급 아이템 카드 특유의 테두리 디자인과 색을 본 시델렌티움이 입을 작게 벌리며 감탄했다.

―부(富)와 생명의 무게!

내가 꺼낸 건 예전에 비탄의 웅녀로부터 양도받은 ‘부(富)와 생명의 무게’였다.

사용자의 부(富)와 수명을 대가로 인간의 가능성을 지우는 아이템이었다.

비탄의 웅녀가 넘긴 부(富)와 생명의 무게는 3개.

하나는 만우절에 박승현을 구하고 부정 입학자를 플레이어계에서 추방하기 위해 썼다.

이제 두 개 남은 아이템 중 하나를 쓸 때였다.

―내 순은 동전의 원본을 복제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리는 대신, 비탄의 웅녀에게 이 아이템의 레시피를 청한 적이 있었지.

―내가 만든 아이템에는 천칭에 설 상위 존재가 깃들지 않아 쓸 수 없더군. 원본을 갖고 싶었지만, 비탄의 웅녀가 주지 않았지.

시델렌티움은 이 이야기를 게임 속에서도 한 적이 있었다.

주수혁이 환몽 경매를 부수고 사월세음을 구한 3학년 때, 순은 동전을 단서로 뒤에 있는 진족을 찾다가 듣는 비화였다.

―좋다. 거래에 응하마. 단, 조건이 있다.

“말씀하세요.”

내 아이템창에는 아직 부(富)와 생명의 무게가 한 장 더 있었다.

여차하면 하나 더 얹을 생각이었다.

원래 생각하고 있던 세 번째 사용처가 있긴 했지만, 그건 좀 힘들어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마계의 길잡이와는 대체가 안 됐다.

―네 행동 원리와 동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 확인해 보고 싶다.

행동 원리? 동기?

그걸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걸까.

―나는 네가 지금 당장 이 미궁을, 공략의 최대 공헌자로서 클리어하길 원한다.

그 말에 시델렌티움의 의도를 알아챘다.

가면에 가려 시델렌티움은 입매만 보이는 상태였다.

가면 사이로 입꼬리가 아주 길게 올라가 있었다.

―이 길은 보스 에너미가 기다리는 다음 플로어로, 이 길은 이 미궁에서 가장 연약한 자들이 있는 장소로 이어진다.

―어떻게 할 거지?

*    *    *

이계에 돌입한 직후.

권레나와 사월세음은 둘만 남겨졌다.

갑자기 줄어든 인원 탓에 놀랐지만, 두 사람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R급 난이도에서는 분단 현상은 안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어? 미궁 모양이 브리핑 때 본 거랑 달라.”

“공략 난이도가 변경되었나 봐요! 우선 다른 애들한테 연락해 볼게요.”

그러나 디바이스는 외부로도, 또 이계 내부의 다른 플레이어들과도 연결되지 않았다.

통신이 되지 않는 케이스에 관해 교과서를 통해 배웠지만, 첫 실습에서 직접 이런 일을 당하니 당황스러웠다.

두 사람은 1학기 동안 실습을 통해 서로의 전투력에 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반에서, 아니, 은광고 전체에서 공격력으로만 따지면 두 사람이 하위권에 해당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다른 반 아이들 걱정부터 했다.

“어떡해. 혼자 남은 애들이 있을지도 몰라.”

“빨리 합류하러 가요!”

둘은 앞뒤로 서서 각각 전방과 후방 경계를 하며 전진했다.

미궁 타입 이계는 보통 천장이 낮고 위가 막혀 있어서 비행 스킬을 쓸 수도 없어 탐지계, 통찰계 스킬과 기억력을 이용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세음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혼자 있었으면 아직도 입구 주변에 있었을 거야.”

“저도요……! 비행 스킬도 못 쓰고, 레나처럼 탐지계 스킬도 없으니까 길을 잃었을 거예요.”

평소 반 아이들과 이계 시뮬레이터를 통해 파티 플레이를 할 때, 권레나는 후방을 맡았다.

권레나의 전투 스킬은 ‘채찍술’로, 이능파로 길이를 조절한 채찍을 활용하면 원거리 공격이 충분히 가능했던 탓이다.

하지만 오늘은 채찍을 평소보다 짧게 잡고 사월세음의 앞에 섰다.

탐지계 스킬 중 하나인 ‘에너미 탐지’ 스킬을 통해 척후 역할을 맡고 ‘바람술’은 접근전에서 불리하니 사월세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으로 전방에 선 탓인지 채찍을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 레나는 왜 채찍을 택했어요?”

사월세음이 권레나의 긴장을 풀어 줄 겸 말을 걸었다.

“채찍은 다루기 어려워 보여서요. 쓰는 분도 적고…….”

사월세음은 더 말을 하려다 입을 합하고 막았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 말이 오히려 사기를 떨어뜨릴 것 같았다.

채찍술은 보기보다 근력이 훨씬 많이 필요했고, 컨트롤도 까다로웠고, 또 소모되는 체력에 비해 적에게 주는 데미지도 적었다.

이계 공략 후 발견되는 보상 중, 채찍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채찍술을 쓰는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사월세음은 대화 주제를 바꾸기 전에 권레나가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은광고에 입학하려면 전투 스킬이 필요하잖아? 그런데 나는 효돈이나 한이처럼 맨손 격투 쪽에는 재능이 전혀 없고, 세음이처럼 자연계 전투 스킬도 타고나지 못했어. 그래서 이능 무기를 다뤄야 했어.”

“아하, 은광고 입시를 치르기 위해 배우셨군요. 혹시 중학교 선생님 중에 채찍술을 쓰는 분이 계셨나요?”

“하하하, 그건 아니야. 음…… 그게, 그러니까.”

편안한 어조였지만 어쩐지 말하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사월세음은 제가 말실수했다는 생각에 사과하고 말을 끊으려 했지만, 그전에 권레나의 말이 계속되었다.

“부모님은 이능 무기를 구해 주기 어렵다고 하셔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언니가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선물해 줬어.”

권레나는 간략히 그 과정에 관해 설명했다.

권레나의 언니는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채찍술은 인기가 없어 이능 무기 중 채찍은 비교적 구하기 쉽고 가격은 싼 편에 속한다.

그래도 일반인이 고가의 이능 무기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권레나의 언니는 권레나를 위해 채찍을 구한 모양이었다.

“채찍술은 그냥 독학했는데 에너미에게 타격을 줄 정도로 다룰 수 있게 됐어. 그 이후론 그냥 계속 채찍을 쓰고 있어.”

권레나는 완전히 긴장이 풀린 얼굴로 웃었다.

말도 별로 섞지 않는 서먹한 언니가 무뚝뚝한 얼굴로 선물을 내밀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권레나가 언니에 관해 좀 더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파팟!

권레나의 주변에 이능파가 몇 차례 터지다 사라졌다.

에너미 탐지 스킬이 연달아 발동한 이펙트였다.

사월세음도 그 이능파를 감지하고 긴장한 얼굴을 했다.

“에너미야. 상대는…… 넷.”

권레나는 기도하듯 채찍을 꽉 움켜쥐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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