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67화 (267/925)

48. 첫 실습 (6)

여느 게임이 그렇듯, 플마고에도 무수한 선택지가 존재했고 선택에 따라 전개가 변했다.

‘몇 번이고 리플레이해서 다른 선택지를 골라도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플마고에서 선택지가 등장했을 때,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반응은 두 개였다.

제시된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

주어진 제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

플마고는 망겜답게 플레이어가 선택을 하든, 안 하든 멘탈이 뒤흔들릴 듯한 가혹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선택을 강요했다.

덕분에 선택지 화면에서 플마고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강제 종료하고 게임을 삭제해 버리는 제3의 선택을 하는 플레이어가 속출했다.

음식에 곁들일 소스를 고르는 수준의 중요도가 낮은 선택지가 있긴 했지만, 선택지가 나오는 국면은 보통 주요 캐릭터의 부상과 사망으로 이어지곤 했다.

지금도 내 선택에 의해 누군가는 다칠지도 몰랐다.

‘……그래도 선택해야 해!’

먼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은 배제했다.

사실상 시델렌티움의 조건을 거부하고 그 손을 쳐내는 짓이 될 것이다.

‘마계의 길잡이, 사월세음과 권레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마족 중에 시델렌티움과 동급인 마왕, 마신의 대사제는 몇 명 더 존재했다.

그 바로 아래인 마신의 사제들까지 고려하면, 길잡이를 수배할 능력이 있는 마족들은 더 있긴 할 거다.

하지만 플마고 속에서 등장한 마족 중에서 거래를 걸고 거래한 인간을 존중할 만한 마족은 시델렌티움 하나뿐이었다.

호족의 수장인 황지호도 마족과 교류가 없어 정보가 없는데, 도박을 할 수 없었다.

마계의 길잡이는 반드시 필요했다.

길잡이가 없으면 마계 시나리오는 실패하거나 어마어마한 희생을 낼 거다.

이 선택지는 폐기다.

‘두 사람 쪽으로 에너미가 접근 중이야. 넷…… 아니, 진행 경로에 더 있어. ‘중간 보스’가 두 사람 쪽으로 가고 있잖아……!’

시델렌티움이 의도한 건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속칭 ‘중간 보스’라고 칭하는 플로어 마스터 에너미가 두 사람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길이 얽혀 있는 미궁의 특성상 무시하고 다음 플로어로 진행할 수 있긴 했지만, 막다른 길에 있는 두 사람이 중간 보스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능력, 소지 중인 무기, 소모형 아이템.

모든 것을 고려해 봐도 승산이 없었다.

‘중간 보스도 그렇지만, 잡몹이 너무 많아. 못 이길 거야.’

두 사람이 플레이어인 점을 고려하면, 오로지 탈출만을 목표로 방어와 도주에 전념하면 큰 부상을 입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팔이 잘리든, 몸이 베이든 절대 응전하지 말고 도망만 친다면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그 정도로 냉정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계의 핵인 보스 에너미를 제압하면 이계는 공략되고, 실체를 잃어. 시델렌티움의 말대로 지금 당장 이계를 클리어하면…….’

시델렌티움의 입꼬리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게 올라가 있었다.

내가 생각에 잠긴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건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은 마치 비장의 수를 던지고 상대의 묘수를 기다리는 체스 기사를 연상시켰다.

이 상황을 대국으로 비유하니 손끝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지만, 동시에 머리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야가 좁아졌어. 눈앞의 피스를 잡는 데에 급급하면 안 돼.’

머릿속에서 내 앞에 있는 시델렌티움을 체스 기사로, 이 미궁 타입의 이계를 체스판으로, 그 안에서 움직이는 플레이어들과 에너미를 체스 피스로 치환했다.

플레이어들의 성향, 사상, 능력, 무기를 체스 피스의 행마법의 일종이라고 가정했을 때였다.

한 수, 한 수 생각을 정리하니 답이 보였다.

“조건을 받아들일게.”

그 말을 마친 나는 사월세음과 권레나가 있을 통로 대신, 보스 에너미가 있는 다음 플로어로 달려갔다.

달리기 시작한 직후, 건곤(乾坤)을 품은 눈 너머로 권레나와 사월세음이 교전을 시작한 게 보여 상보심금파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    *    *

권레나와 사월세음은 선전하고 있었다.

첫 에너미를 상대로는 기습에 성공해 해치웠다.

권레나가 채찍으로 에너미를 감아 고정하고 사월세음의 바람술이 운 좋게 급소를 꿰뚫어 크리티컬 데미지를 입혀 토벌에 성공했다.

그러나 두 번째 에너미를 상대할 때 권레나가 채찍을 놓쳐 버리고, 공격을 피하다 이계 광석에 피부가 쓸려 찰과상을 입었다.

옆으로 굴러 먼지투성이가 된 권레나가 반사적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눈앞이 아득한 기분이었다.

‘무기를 놓쳤어! 무기만은 놓치지 말라고 수업 중에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는데!’

현재 소모용 아이템은 회복 아이템뿐이었다.

아이템 카드가 들어간 홀스터를 붙잡던 권레나의 눈에 SSR급의 아이템 카드가 들어왔다.

백금색의 이능 바이올린이 그려진 카드였다.

‘그래, 아직 이능 바이올린이 있었지.’

이능 악기를 다루는 스킬과 이능파의 컨트롤 능력이 더해지면 연주로도 데미지를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보통 정신력으로는 연주로 데미지를 주는 건 불가능했다.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고, 에너미가 밀려드는 이계 안에서 제대로 된 연주를 펼쳐 보이려면 권제인 만큼은 안 되더라도 그 옆에서 합주를 하는 영원의 호수 팀원 급의 연주 실력과 정신력을 갖춰야 했다.

‘안 돼…… 못 하겠어!’

권레나는 바다의 벽 앞에서 권제인과 합주한 것과, 주오 아일랜드에서 멋대로 발동한 자신의 광림, ‘허상 연회’를 떠올렸다.

바다의 벽 앞에서처럼 마음을 다잡는다면, 150명에 가까운 플레이어를 한순간이나마 붙잡았던 그 광림을 발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 두 번의 경우와 달리 권제인이 없었다.

“레나! 무기 쪽으로 달려요!”

콰아아아!

사월세음이 바람술의 출력을 최대로 올려 에너미의 전신을 속박했다.

바람의 칼날이 미궁계 어인형 에너미의 말라붙은 비늘을 베고, 비늘 사이로 녹색의 체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치명적인 데미지는 아닌 듯 어인형 에너미는 여전히 느리게 권레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사월세음보다 더 가까이에 위치한 권레나의 배제를 우선시한 것 같았다.

“크윽……!”

사월세음이 바람술의 출력을 올려 보려 했으나 이능파가 부족한지 비틀거리기만 할 뿐, 바람술의 출력은 그대로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권레나는 이능 바이올린 카드를 잡으려던 손을 놓고 바닥에 떨어진 채찍을 향해 몸을 날렸다.

채찍에 손이 닿자 곧바로 채찍을 휘둘렀다.

촤악!

끄으으, 크르륵!

채찍이 허공을 갈라 날아가 어인형 에너미의 안구를 찢었다.

첫 번째 에너미를 잡을 때보다 힘이 떨어진 일격이었지만, 사월세음이 무리하여 데미지를 입힌 덕분에 급소인 안구를 보호하던 눈꺼풀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에너미는 쓰러지지 않았다.

“레나, 빨리요!”

채찍을 휘두르는 팔이 무거웠다.

구를 때 데미지를 입은 모양이었다.

촤아아악!

권레나가 힘겹게 한 번 더 채찍을 든 팔을 놀렸다.

정확도가 떨어진 탓에 안구 근처를 가격하였으나 누적된 데미지가 HP 총량을 넘었는지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에너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앞으로 두 마리 남았어! 세음이한테 넘긴 포획용 소모 아이템을 다 써서 발을 묶고, 남은 하나는 연주 없이 그냥 내 광림으로 묶으면 될 거야,’

권레나가 희망적인 관측을 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파팟!

권레나의 머릿속에 섬광이 스쳤다.

‘에너미 탐지 스킬’이 발동을 알리는 이펙트였다.

“어, 어떡해. 세음아, 엄청 강한 에너미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네? 이제 남은 에너미 둘 말고 더요?”

“그 에너미들보다 더 빨리 접근하고 있어!”

콰쾅!

사월세음과 권레나가 반사적으로 폭발음이 들린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부서진 미궁의 벽 주변으로 파편과 연기가 쏟아졌다.

“미, 미궁의 벽은 강도가 높은 이계 광석으로 되어 있을 텐데…….”

권레나가 말을 더듬었다.

플레이어들이 미궁 타입의 이계를 공략할 때 ‘벽을 부숴서 목적지로 향하는 짓’을 하지 않는 건, 벽이 지나치게 강도가 높아 전부 부수기에는 효율이 떨어지는 탓이었다.

투과형 스킬이나 광림이 없는 한, 혹은 강한 담임 임연화처럼 인간의 섭리를 벗어나지 않은 이상 미궁은 정석대로 길을 따라 공략하는 게 보통이었다.

“플로어 마스터 에너미인가 봐요……!”

두 사람은 머리가 텅 비는 기분을 느꼈다.

플로어 마스터 에너미는 방금 상대한 에너미보다 훨씬 크고 거대했으며, 희귀도가 높아 보이는 삼지창을 들고 있었다.

미궁의 벽을 이계 금속으로 마감된 삼지창으로 부순 것인지, 삼지창의 날에 빛나는 이끼가 묻어 있었다.

또, 플로어 마스터 에너미 뒤로는 처음 권레나가 감지한 에너미 넷 중 남은 둘도 보였다.

“어, 어떡하지, 어떻게 싸우지? 발을 묶고…… 아니면 방어 위주로…….”

“도망, 도, 도망가요! 아니, 제가 막을…….”

패닉에 빠진 두 사람을 향해 플로어 마스터 에너미가 삼지창을 들어 올렸다.

삼지창 끝에 이능파가 스멀스멀 모이기 시작했다.

스킬 사용의 전조라는 걸 알면서도 굳은 두 사람은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삼지창에서 빛이 쏘아지려 할 때였다.

콰쾅!

파아아아아!

폭발음과 충격파가 미궁의 통로를 메웠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무사를 확인했다.

열기와 연기 사이로 서로의 안위를 확인한 두 사람이 시야를 돌렸다.

무언가가 에너미들과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건……!”

눈앞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화염의 용이 두 사람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불이 약점인 것인지, 플로어 마스터 에너미도 접근하는 기색 없이 경계만 하고 있었다.

“설마, 그분이 여기에…….”

두 사람은 환몽 경매장에서 직접 그 용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은 경매의 매물로, 한 사람은 경매의 입회인으로 참가했지만 둘 다 저 홍룡을 보았다.

권레나가 입을 막고 탄식했다.

“적벽괴도의 붉은 용……!”

홍룡을 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심감에 기뻐하던 사월세음이 권레나를 돌아봤다.

‘어? 왜 레나는 염준열 선배님이 아니라 바로 적벽괴도님…… 의신이를 떠올린 걸까요.’

사월세음은 위화감을 느꼈지만, 생각을 길게 할 수 없었다.

“붉은 용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어……!”

화염을 두른 홍룡의 존재감이 옅어지고 있었다.

*    *    *

천동하의 광림.

염준열의 광림.

그리고 12지의 수장이 다루었던 상보심금파.

세 가지를 동시에 다루는 내 집중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현재 내가 있는 플로어가 아닌, 전 플로어까지 천동하의 광림으로 지켜보고, 홍룡을 부리고 상보심금파로 적을 쓰러뜨려야 했다.

거기에 더해 수식언 ‘침묵’과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수다쟁이의 입 모양도 읽어야 했으니 더욱 그랬다.

―소홍룡의 광림이 원격 조작이 가능하다고 하나, 그 홍룡의 힘의 원천에 멀어질수록 실체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계 안, 그것도 플로어도 다른 곳에 있는 네가 그 연약한 자들까지 지키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그 말에 답하는 대신 상보심금파의 갈래를 사용했다.

콰콰콰!

갈래 사용의 효과로 이능파 덕에 시야가 한순간 막히니 시델렌티움도 한순간 입을 움직이는 걸 멈췄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조용해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보스 룸 앞을 지키던 에너미가 갈래에 당해 완전히 소멸되자 다시 시델렌티움이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스 룸에 들어가면 홍룡의 실체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둘을 지키려면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돌아가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우리 반 아이들을 지키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

―수상한 표정을 짓는군.

나는 까마귀 가면 쪽을 향해 보란 듯이 수상하게 웃고 보스 룸의 문을 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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