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스포츠 교류전 (1)
무음 모드로 해 둔 디바이스가 수신을 알리며 작게 진동하다 빛났다.
영민한 올무가 작은 소리에 반응해 이쪽을 본 것 같았지만 다시 홱 고개를 돌리고 백호군의 품에서 꼬리를 파닥였다.
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을 받아 내가 멍하니 굳어 있는 사이에도 계속 디바이스가 전화 수신을 알렸다.
“급한 연락인가? 누구한테 온 거지?”
“장남욱이 전화했는데.”
황지호는 평소처럼 처웃을 만큼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올무한테 또 무시당하는 게 좋은가 보다.
망할 노친네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 내 저택에 방문할 예정인 플레이어 군사관학교의 생도가 한 연락인가? 약속을 연기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지. 연기됐다면 오늘은 이대로 본채에 돌아가 쉬면 되겠군. 받아 보도록.”
만약 약속이 연기되면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 쉴 거다.
올무가 나를 모르는 척하는데 여기 있을 이유가 있나?
괜히 본채에 갔다가 착한 은호의 후예들이 이번 건을 알게 되면 괜히 신경 쓸지도 모르고.
일단 전화를 받아 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의신아, 지금 통화할 수 있어? 아, 오늘 이계 공략 결과 봤어. 최대 공헌자 된 거 축하해.]
“어, 고맙다.”
먼저 축하 인사를 하는 걸 보니 급한 일은 아닌 듯했다.
유상훈의 안부를 비롯해 간단히 대화를 나눈 후에야 장남욱이 본론을 꺼냈다.
[다음 주 교류전을 대비해서 우리 쪽 대표 선수단이 묵을 연수원이랑, 경기가 치러질 체육관, 야구장을 방문해 봤어.]
다음 주부터 은광고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의 첫 교류전이 치러진다.
한중일 플레이어 교류전처럼 이능을 겨루는 게 아니라 일반 스포츠 종목의 교류전이라 학생들 사이에서 묻힐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학생들 반응이 좋았다.
은광고는 기존의 운동 동아리나 소모임에서 뽑힌 선발뿐만 아니라 공개 트라이아웃을 통해 선수를 추가 모집했는데, 모든 종목 평균 경쟁률이 3 대 1 정도가 될 정도로 치열했다.
이후 선발된 은광고 학생들은 선수단복을 맞추고 교내에 선수촌을 만들어 학기 중에 합숙해 연습 시간을 늘렸다.
직접 출전하지 않은 학생들도 관심을 가졌는지 누군가가 학생회 쪽에 응원단을 만들어 달라 건의했다.
그 결과 아직 임시지만, 학생부회장 지명수를 초대 응원단장으로 내세워 최초로 은광고 응원단이 생겼다.
‘은광고는 외부와 교류가 거의 없었어. 그래서 응원단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하여튼 은광고만큼이나 플레이어 군사관학교에서도 많은 생도들이 관심을 갖는 모양이었다.
그 덕에 기수장 장남욱은 교류전을 앞두고 매우 바쁜 것 같았다.
[그런데 방문한 시설에서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신경 쓰이는 거?”
[다른 아이들이 있어서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장남욱은 확신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서 본론을 꺼내는 게 늦었는지 모르겠다.
장남욱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 말했다.
[우리 쪽에서 대여한 시설에서…… 시후한테 느낀 ‘씨앗’의 흔적이 있는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의 체스판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예상치 못한 수를 둔 걸 본 듯한 감각이 들었다.
게임 속에서 도시후가 죽는 건 지금이 아니다.
그러나 게임 속에선 없었던 은광고와 군사관학교의 스포츠 교류전이라는 이벤트가 열리고, 거기에 도시후가 참가한다.
‘흑막은 은광고를 고립시키려 했어. 교류전이 달갑게 보이지 않을 거야.’
마침 도시후를 제거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흑막이라면 도시후를 어떻게 할까?
도시후를 이용해 어떤 수를 둘까?
머릿속에서 수를 둘 때마다 도시후를 해한 씨앗을 정화하던 날, ‘악의의 기억’ 속에서 도시후의 친척을 발견하고 절망 어린 표정을 짓던 장남욱의 얼굴이 떠올랐다.
* * *
장교와 부사관을 양성하는 국립 군사 교육기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입학 조건으로 고등학교 졸업 및 졸업 예정자 또는 그와 같은 학력이 필요한 육사, 해사, 공사와 달리 플레이어 군사관학교에는 고등부가 존재했다.
고등학생이 되는 17세부터 이능이 각성하는 플레이어의 특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플레이어 군사관학교는 고등부, 일반부로 나뉘었지만, 이들은 같은 학사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등부와 일반부의 동선은 대체로 겹치지 않았지만, 공통으로 이용하는 시설이 있었다.
그 시설 중 하나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근무지원단 예하 부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병원이었다.
“도시후 생도 피 검사 완료했습니다. 30분 후에 수면 검사도 마칠 예정입니다.”
“또 추가 검진 중입니까?”
군의관과 간호 장교가 캡슐 너머 잠들어 있는 도시후를 지켜봤다.
도시후의 전신에 이능파 감지용 접지전극이 부착되어 있었다.
도시후는 최근 이능파로 인한 수면 장애 현상을 자주 일으켜 몇 번이나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몇 번을 검사해도 결과는 ‘정상’이었다.
1학년을 담당하는 군의관이 차트를 재검토하며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생도가 증언했어. 꾀병은 아닐 거야. 이번 신입 기수는 기수장도, 생도들도 성실한데…….’
차트만 봤을 때, 도시후의 이능파에는 조금도 문제가 없었다.
정밀 검사 결과 도시후의 이능파는 정상 범주 중에서도 ‘매우 양호’에 들어가 수치상 도시후는 최상의 컨디션에 해당되었다.
“교류전 선발 선수로 뽑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결과를 보니 단순 스트레스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간호 장교는 군의관의 주의를 돌리며 커피나 한잔하자고 권했다.
어차피 수면 검사 결과는 여기서 죽치고 기다리고 있는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군의관은 짧은 고민 끝에 간호 장교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이윽고 수면 검사실이 텅 비었을 때.
삣, 삐잇.
수면 검사실 문이 재차 열렸다.
들어온 건 스크럽복 위에 의사 가운을 걸친 남궁규연이었다.
평소 입던 제복, 생활복이 아닌 차림에 늘 들고 다니던 야전삽도 없고 의료용 부직포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있으니 이 인물이 그녀라고 알아보긴 힘들었다.
“…….”
남궁규연은 캡슐 뒤에 누워 있는 도시후를 한 번 보다가 모니터 앞에 앉아 검사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능파 분석기가 역대 분석 결과를 차례차례 인쇄했고, 남궁규연은 품에서 파일철을 꺼내 이를 전부 안에 넣었다.
저벅, 저벅…….
인쇄가 아직 전부 끝나지 않았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찾는 값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모르는데, 어떡하지? 두 번 잠입하는 건 좀 힘들 거고.’
남궁규연은 짧게 망설인 끝에 밖으로 나가는 걸 포기했다.
대신 인쇄를 마저 끝내고 잽싸게 커튼 뒤로 숨어 버렸다.
그녀가 숨은 것과 거의 동시에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직후에 수면 캡슐에서 검사 완료 알람이 울렸다.
“도시후 생도, 일어났습니까?”
“……아, 네.”
수면 검사가 끝나는 시각에 맞춰서 군의관과 간호 장교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군의관이 도시후에게 무언가를 묻고 간호 장교도 간혹 말을 한마디씩 거들었다.
간호 장교의 손에 전극이 전부 제거되고, 도시후가 밝게 인사하는 게 들렸다.
“그래, 아버지께 안부 전하고.”
“네, 감사합니다! 아, 해군 커리큘럼 쪽에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 말에 남궁규연이 눈을 크게 떴다.
‘시후네 아빠랑 아는 사이라고?’
도시후의 아버지, 선박왕은 해군에 협력해 작전을 수행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말하는 걸 보니 군의관과 간호 장교 둘 다 선박왕과 친분이 있는 듯했다.
‘두 사람 다 해군에서 복무했나? 그럼 어떻게 이어지는 거지?’
남궁규연은 커튼 뒤에 숨어 생각을 정리했다.
모든 이들이 나가 검사실이 조용해진 후에도 그녀의 고찰은 계속 이어졌다.
* * *
장남욱과 통화를 마친 후.
흑막이 둘 법한 수가 몇 개 떠오르긴 했으나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확신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양해를 구하고 나가려 했지만, 호랑이들이 방해했다.
“내 저택 안에서 오후 늦게 사관학교 생도와 만나는 건 허락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치료도 끝났고 영약도 먹었잖아.”
“향록의 말을 못 들었나? 몇 시간은 이능 사용을 자제하라는 말을 했다. 이능 사용도 못 하면서 밖에 나가서 무얼 할 생각이지?”
애초에 지금 싸우러 가는 게 아닌데.
이능은 못 써도 머리는 쓸 수 있다.
그래도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는 일상다반사였다.
밖에 나갔다가 이계에 휘말리거나 교전할 상황이 발생하면 결국 이능을 쓰게 될 거다.
‘그래도 조심하면 괜찮지 않을까? 뭣하면 아이템을 써서 피하면 되고.’
아이템창에 있는 아이템들을 떠올리기 전에 사고가 중단되었다.
끄으응…….
나를 계속 무시하던 올무가 이쪽을 보며 목을 울렸다.
황지호한테 뭔가 반박하려 했는데, 금방 잊고 말았다.
“지정한 장소로 부하를 보내 놨다. 무슨 일이 발생해도 하루 정도는 문제가 없을 거다. 그러니 지금은 저택에서 머물고 내일 나와 가도록.”
황지호에 이어 백호군도 입을 열었다.
“전부 은광구 안이군. 내일 나도 동행하겠다.”
백호군이 ‘내일’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올무에 이어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 백호군까지 그렇게 말하니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알았어. 파견된 부하가 뭔가 보고하면 나한테도 알려줘.”
“그러마.”
자리에 앉자 황지호가 배숙을 내왔다.
잔인한 호랑이들은 지옥의 영약을 먹이고도 물 한 잔 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통후추가 박힌 제철 배를 꿀을 더해 조리한 배숙을 먹으니 살 것 같았다.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잔을 비웠더니 황지호가 피식 웃었다.
“조의신, 공격대로 이계 공략에 참가한 건 처음이 아니었나?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도 그렇고, 생각했던 것보다 무모하군.”
“처음은 아니야.”
거의 10년 동안 화면 너머로 이계 공략을 했다.
또 이 세계에서 이계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이사장 허락을 받고 공략에 참가한 적이 있잖아.”
나비령이 권제인에게 메시지를 남겨 들어가게 된 석촌호수 수중 미궁.
기록에는 남지 않았지만 나는 그 이계의 공격대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지만 그때는 거의 공략에 참가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보스 룸에 홀로 들어간 것도 그렇고.”
황지호는 아직도 나에 관해 추리하려는 모양이었다.
대충 흘려들으며 배숙을 한 잔 더 마시고 있으니, 별채 쪽 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별채에 계시다고 해서 이쪽으로 왔습니다.”
“다…… 안녕하십니까.”
마루 너머에 적호와 김신록이 서 있었다.
김신록은 적호를 따라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할 뻔했지만, 중간에 입을 다물고 말을 바꿨다.
김신록의 삼촌 격인 눈치 빠른 호랑이들은 그걸 다 알아채고 흐뭇한 얼굴을 했다.
“그래, 웅족은 잘 넘기고 왔나? 문제없었지?”
“네. 그 웅족에 관해선 문제가 없습니다.”
“그 웅족에 관해선? 다른 곳에 문제가 생겼나 보군.”
김신록이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그 웅족은 어제까지 이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무너지기 직전에 단서를 흘렸습니다.”
“말해 보도록.”
김신록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김신록이 옆에 서 있는 적호를 한 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호족의 가든에 갇혀 있는 웅족이 뭔가 알고 있는 듯합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