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스포츠 교류전 (2)
‘이계의 틈을 제어한다’는 건 이계의 활성화를 저지하고 에너미를 배제하여 해당 구역의 이계화를 막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표현을 들으면 대중은 ‘이계 공략’, 플레이어들이 이계 안으로 진입하고 보스 룸에 도달해 이계를 클리어하는 광경을 떠올린다.
실제로 이계의 틈을 제어하기 위해 가장 널리 알려지고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오늘 나도 첫 실습을 통해 경험한 이계 공략, 이계의 클리어다.
그러나 이계를 제어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호족이 지배 중인 이계가 있구나.’
이계의 틈을 제어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이계 지배’가 있다.
이는 특정 개체가 이능파로 이계를 간섭해 보스를 비롯한 이계의 모든 에너미를 복종시키고 스스로 이계의 주체이자 핵, 새로운 보스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계 지배는 단순히 이계를 클리어하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고 강력한 이능을 필요로 했다.
또, 자칫하다간 정신 세계가 붕괴되어 이계 지배자가 에너미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이계 지배는 진족이나 가능하다고 여겼지만, 인간 중에서도 ‘이능파 링크’를 통해 성공한 사례가 있었다.
‘2학년 0반이 이계 지배에 성공했다고 했지. 아직도 가든을 유지 중이라고 들었는데.’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치고 리스크를 감수한 결과 누군가의 지배하에 놓인 이계를 ‘가든’이라고 불렀다.
“현재 호족이 확보한 웅족은 총 일곱입니다. 하나는 백호가 확보한 조련계 웅족, 다섯은 만우절에 잡은 웅족들, 남은 하나는 수장의 오른팔이었던 ‘흉내꾼’ 입니다.”
적호가 부연 설명을 했다.
일곱 장의 사진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이 사진은 잡힌 직후에 찍은 것인지 웅족들은 비교적 정상적인 모습으로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련계 웅족은 양팔이 잘린 직후에 정신이 나가서 그런지 혼자 맛이 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일곱 중, 제 아들이 관리하는 중인 웅족은 여섯이었죠. 오늘 하나를 향록에게 내줬으니 다섯이 되었지만요.”
적호가 화면을 조작하자 조련계 웅족과 흉내꾼을 비롯한 여섯 개의 사진이 그룹으로 묶였다.
한 그룹으로 묶인 사진 중 향록에게 넘겼다는 웅족이 찍혀 있는 사진은 흑백 처리되었다.
“이들은 보통 웅족의 수장이 내린 명을 받아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장이 아닌 자의 명령으로도 움직인 적이 있는 듯합니다.”
“수장이 아닌 자? 흉내꾼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웅족의 수장과 동급이거나 그 위인 자인 듯했습니다. 제 아들이 심문한 결과, 이들 중 그자와 직접 접촉한 웅족이 있다고 밝혀 냈습니다.”
흉내꾼은 웅족 수장의 오른팔이라고 했으니 수장의 아래다.
그렇다면 웅족에게 명령을 내린 건…….
‘흑막과 직접 접촉해 명령을 받은 건가!’
외양, 습관, 말투, 능력…….
뭐 하나 흑막에 관해서 분명한 게 없다.
게임을 통해 흑막이 벌인 짓을 봤으니 흑막이 얼마나 강한지,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흑막의 정체는 여전히 미지수로 존재했다.
흑막과 직접 접촉한 자를 심문해 단서를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린 자와 직접 대면한 게 이자입니다.”
적호는 그룹에 들어가지 못한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일하게 김신록이 심문하지 못한 자였다.
‘왜 이자는 김신록이 심문하지 않고 호족의 가든으로 보내진 거지?’
가든에 있다는 자는 첫째 은서호가 목숨을 걸고 은광고에 방문한 날, 습격해 온 다섯 웅족 중 하나였다.
뭔가 특이 사항이 있었나 떠올려 봤지만, 내가 아는 선에서는 딱히 별일이 없었다.
그에 비해 설명을 듣는 황지호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적호도, 김신록도 저자에 관해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느껴졌다.
“단서를 내놓은 놈은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이라고 했었지. 가든 밖에 있는 놈들 중 하나일 가능성은 없나?”
“악몽의 티끌이 정신을 잠식해 갈수록 순종적으로 변했으니 거의 확실합니다. 대질 심문은 하지 못했습니다만, 사진과 영상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제 아들이 심문할 때 동행했습니다. 확실합니다.”
“…….”
적호가 설명 중에 계속 아들 타령을 하니 김신록이 이를 꽉 깨무는 게 보였다.
이 부자는 화해하고 나서도 아직 어색한 모양이었다.
“알았다. 이 건은 내가 맡도록 하지. 가능하다면 직접 심문할 수 있게 이야기해 보겠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황지호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게 보였다.
웅족을 상대로 가차 없이 행동하고 적호와 김신록을 크게 신뢰하는 황지호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황지호는 그 웅족을 심문하라고 쉽게 허락하지 않았고, 적호와 김신록도 이를 당연히 여기는 듯했다.
호족에서 두 부자의 미묘한 위치를 고려해 보니 무슨 사연이 있을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확신할 수 없어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호족과 웅족이 대립한 건 알고 있겠지.”
내 의문을 알아챈 건지 황지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웅족이 배신하여 천신의 은총이 한반도를 떠난 직후, 저자의 손에 아직 어렸던 후예가 죽었다.”
웅족의 배신으로 이 땅에 천신의 은총이 떠난 시기라면…… 비탄의 웅녀와 적호가 죄를 짓고 파국을 맞아 호족과 웅족 사이에서 다시 전쟁이 시작됐을 때다.
그 전쟁을 계기로 후예를 잃었던 호족이 얽혀 있다면 적호와 김신록이 나서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후예를 잃은 부부가 내게 와서 무릎을 꿇더군.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했어. 호족의 영역 안에서 한다면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했다.”
황지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족이 후예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떠올리니 그 분노가 짐작이 갔다.
“내 허락이 떨어진 이후, 그 부부와 이 더러운 웅족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지금도 가든 안에서 곰 사냥을 하고 있겠지.”
“한 번도 가든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가든은 시간축이 왜곡되어 있을 텐데…….”
적호의 말 중, 시간축이 왜곡되어 있다는 표현에 눈을 크게 떴다.
호족이 관리 중인 가든은 최소 SSR급 이상인가 보다.
이계는 공략 난이도가 상승할수록 단순히 에너미가 강력해지고, 규모가 커지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시간 왜곡, 공간 압축 등 현실의 물리 법칙과 사물의 이치, 논리를 위배하고 무시하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가든의 주인인 수석 주술사에게 직접 말해 보겠다. 이 건은 나에게 맡겨라.”
“……알겠습니다.”
황지호의 말에 적호와 김신록은 두말하지 않고 수긍했다.
분위기가 매우 어두워졌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오토매틱 메이드가 등장했다.
오토매틱 메이드가 들고 있는 트레이에는 대추와 생강이 추가된 배숙과 비닐로 포장된 새 교복이 있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조의신, 은호의 후예들과 그 사관학교 생도를 만나기 전에 피 냄새를 지우고 옷을 갈아입도록. 다녀오면 상으로 배숙을 더 주마.”
망할 노친네가 어린애를 어르듯 헛소리를 했다.
그래도 은호의 후예들의 후각과 장남욱의 별 처녀의 눈이 이 핏자국을 꿰뚫어 보는 게 염려되었기에 두말없이 따르기로 했다.
* * *
플레이어 협회, 규정 집행부 내 홍규빈 전용 사무실.
윤 대리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홍규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습격을 당했다고 하셨습니까? 다친 곳은 없습니까?”
“정 사원이 전부 처리해서 문제없습니다.”
“습격당한 정황이나 상대가 사용한 이능에 관해 더 자세히 보고하세요.”
“네, 디바이스에 기록한 영상과 함께 설명드리겠습니다.”
홍규빈은 윤 대리와 정 사원에게 광일파출소장 김 경감 자살 사건의 조사를 명했다.
조사를 통해 얻은 성과는 전무했지만, 의심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윤 대리의 설명을 듣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규정 집행부가 습격을 당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 그래도 타이밍이나 수단이 마음에 걸려. 남궁 그룹의 전략기획실에서 개입했을 거다.’
규정 집행부 구성원은 협회 규정을 어긴 플레이어의 처벌과 광림, 스킬, 카드화와 실체화 능력을 봉인할 권한을 갖고 있다.
윤 대리는 직급상 홍규빈의 명령 없이는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없으나, 몇 번 작전에 동행한 적이 있으니 원한을 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홍규빈의 감이 이번 습격은 전략기획실이 개입했을 것이라 고하고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앞으로도 정 사원과 행동하세요.”
“……알겠습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깐죽거리는 정 사원과 계속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윤 대리가 한순간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힘드시면 저 대신 홍보팀 업무를 맡으셔도 됩니다.”
최근 홍보 1팀과 홍보 2팀 사이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원흉은 홍보 2팀의 박 팀장이었는데, 홍보 2팀은 비록 홍보 1팀에 비해 실적은 떨어지나 박 팀장의 사내 정치질과 인맥 관리 능력이 매우 훌륭해 실적으로 벌어진 격차가 좁혀지고 있었다.
박 팀장의 주요 타깃은 그의 여자 친구의 전 남자 친구인 윤 대리였다.
팀은 다르다고 하나 직위 차이를 이용해 박 팀장은 윤 대리가 보일 때마다 압박하고 갈구었다.
물론 박 팀장은 홍규빈을 상대로도 그 난리를 떨었다.
하지만 연차나 나이는 홍규빈이 아래라고 하나 직위가 팀장으로 동급이니 갈굼에도 한계가 있어 홍규빈이 팀원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박 팀장을 상대하는 실정이었다.
윤 대리는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짧은 고민 끝에 차악을 택하기로 했다.
“……아닙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윤 대리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홍규빈이 한숨을 토했다.
플레이어 사회를 뒤집어 놨던 환몽 게이트와 협회 위성 문제 사건이 가라앉자 다시 협회 내 사내 정치로 몸살을 앓아 쉴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부적으로는 문제가 없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수의 인원이 조용히 대응하기에 눈에 띄지 않을 뿐이었다.
자살로 위장된 광일파출소장 사건이 그러했다.
‘그나마 꾀돌이가 외국으로 나가서 노는 중이라 좀 조용하게 지내나 싶었는데.’
또, 홍규빈에게 가호를 내린 서족의 수장, 서돌이 불길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그랬다.
최근 서돌이 이것저것 조사를 해 달라 부탁해 왔다.
그중에는 은광고 1학년 0반의 어느 학생의 신상과 세계 10대 플레이어 팀 중 하나인 세 기사의 맹세의 동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도 서돌이 괜히 직접 조사하겠다고 한국에 돌아오는 것보다 해외에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적당히 조사하여 자료를 넘겼다.
‘은광고 1학년 0반 아이에 관한 거라면 의신이한테 말하는 게 좋을까?’
최근에 조의신에게 제갈재걸 잡지 초판 1쇄 건으로 아주 큰 빚을 졌다.
앞으로 조의신이 계속 제갈재걸의 신문부에 소속해 있을 것을 고려하면 더욱 친목을 돈독히 해야 하니, 서돌이 0반 학생을 조사 중이라고 조언해 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홍규빈이 사고를 마치고 디바이스를 켰을 때였다.
딩동.
디바이스의 통화 수신음에 홍규빈이 놀란 얼굴을 했다.
홀로그램에 뜨는 발신자 명에는 오랜만에 보는 가족의 이름이 떠 있었다.
홍규빈은 즉시 통화에 응했다.
“여보세요?”
[규빈이 오빠, 난데.]
홍규빈이 전화를 받자 상대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여동생의 변함 없는 모습에 홍규빈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요즘 규정 집행부 일 바쁨요? 뭐 좀 확인해 줬음 하는데.]
“바쁘긴 한데, 일단 말해 봐.”
이어진 여동생의 설명은 조금 길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홍규빈의 표정은 점점 진지하게 변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73)